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2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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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유학생, 공금 빼돌려 미국으로 간 이유는…
[근대 의료의 풍경·68] 日 유학생의 진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 리훙장 사이에 청일전쟁을 일단락 짓는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맺어진 것은 1895년 4월 17일이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주장) 포기, 일본에게 청나라의 랴오둥 반도(遼東半島)·타이완(臺灣)·펑후 제도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장래 희망은?" 최초의 유학생 100명에게 물었더니…
[근대 의료의 풍경·67] 게이오의숙
지난 회에 언급했듯이, 친일적인 개혁 정부는 1895년 한 해 동안 150여 명의 관비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여 우선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년)가 교주인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시켰다. 이 가운데 절반가량인 72명이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했으며, 이어
100년 전부터 시작된 유학 열풍…수백 명의 日 유학생
[근대 의료의 풍경·66] 유학생 파견
<의학교 규칙>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타당한 지적이다. 조선은 개항 이래 근대 문물의 도입 과정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도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농후해졌다. 을사늑약 이후를 제외하고는,
100년 전 의대에도 체벌이 있었을까?
[근대 의료의 풍경·65] 의학교
의학교는 일요일에는 수업이 없었다. 일요일이 학교 휴업일로 정해진 것은 1895년 9월 7일(음력 7월 19일) 소학교령(칙령 제145호)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의학교의 하루 수업 시간이 5시간(체조시간은 제외하고)이었으니 1주일에 30시간으로 지금과 큰 차이는 없었다. (요즈
의대를 쫓겨난 김 씨, 공부도 취업도 못했던 사연은…
[근대 의료의 풍경·64] 의학교의 설립
지난 몇 회에서는 시의에 따라 "경술국치"에 관련된 사실들을 언급했다. 다시 원래 논의했던 곳으로 돌아가 의학교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에서 의학교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1899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醫學校)"를 의미한
이완용 죽은 다음 날 <동아일보>는…
[근대 의료의 풍경·63] 이재명 vs 이완용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그 시절을 되새기고 성찰하는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완용 암살 기도 사건"에 대한 조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재명이 처형된 지 꼭 100년을 맞았던 지난 9월 30일, 어느 신문이나 방송도 그 일에 대해 보도
그 의사가 평양에 수술 가방을 놓고 온 까닭은?
[프레시안 books] 오인동의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창비 펴냄)의 저자 오인동 선생은, 책 뒤표지의 소개 글에 의하면, "통일과 의업(醫業)의 두 길을 걸어온" 재미 동포 의사이다.부연하자면 저자는 한국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미국에 유학한 이래 정형외과 의사, 특히 인공 고관절(엉덩이관절) 분야의 전문가로 70대인 지금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1992
9월 30일…이완용은 웃고, 조선은 울었다!
[근대 의료의 풍경·62] 이재명의 순국
"총리대신 이완용 모살(謀殺) 미수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이재명을 비롯해 13명이었고, 이 가운데 이동수(李東秀)는 도피에 성공했지만 결국 1924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검찰 측이 붙인 사건 제목은 "이완용 모살 미수 사건"으로 처음에는 "박원문 살해"가 언급되
행운아 이완용…저승길에서 살아난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61] 이완용의 치료
이완용의 상처와 그에 대한 치료, 회복 경과 등은 대한의원 외과 과장 스즈키(鈴木謙之助)가 경성재판소 검사 이토(伊藤德順)에게 제출한 상해 '감정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스즈키는 1887년 의사 시험을 거쳐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뒤 한때 요코하마에서 개업
세 번 찔리고 살아난 이완용, 그 일등공신은…
[근대 의료의 풍경·60]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기산도, 나인영 등의 친일파 응징 시도는 을사5적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더욱이 자신들을 영원히 지도 편달하며 보호해 주리라고 믿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10·26 사태"로 불귀의 객이 되자 이들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극에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