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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부터 시작된 유학 열풍…수백 명의 日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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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부터 시작된 유학 열풍…수백 명의 日 유학생

[근대 의료의 풍경·66] 유학생 파견

<의학교 규칙>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타당한 지적이다. 조선은 개항 이래 근대 문물의 도입 과정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도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농후해졌다. 을사늑약 이후를 제외하고는, 특히 갑오·을미개혁 시기에 두드러졌다.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여러 면에서 조선을 "일본화"하려고 애썼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들의 "선진적인" 법과 제도를 이식하려 했고, 뒤에는 종교도 일본식으로 개조하려고 했다. 법과 제도는 일상생활을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법 조문 하나 때문에 인간의 삶이 얼마나 많이 달라지는가!)

▲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 참찬관 황쭌센(黃遵憲)이 지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조선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고 자강을 도모해야 러시아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중국과 일본에 유학생들을 파견하여 무기 제조, 외국어, 천문지리, 화학 등 서양의 여러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개항장에 신식 학교를 세울 것을 권장했다. ⓒ프레시안
또 종교는 개인과 집단의 마음과 의식, 과거와 미래까지 지배한다. (종교에 따라 조상과의 관계 맺기조차 달라진다.) 제국주의자들이 영토 침략, 경제적 수탈과 더불어 법·제도와 종교의 이식을 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그러한 시도는 천사의 얼굴로도, 악마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조선은 개항 이래 일본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려왔으며, 이에 대한 견제 장치로 국왕과 정부는 구미 열강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은 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잘못 쓰면 치명적인 독극물이 된다. 특히 미국에 대한 국왕의 기대와 호의는 지나치다할 정도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 구미 제국의 놀이마당과 먹잇감이 되었고, 광산, 철도, 전기 등 수많은 개발 이권이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고스란히 그 세력들에게 넘어갔다. 조선의 지배층이 국민과 국가의 이익인 "국익"을 지키려고 노력했더라도 결과가 어떠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데, 국왕을 비롯한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사익에만 집착했으니 결말은 뻔했다.

▲ 1890년대의 평안북도 운산(雲山) 금광. 동양의 "엘도라도"라고 불렸다. 당시 최대의 경제적 이권이 걸린 사업장으로 미국인 모스(J R Morse)를 거쳐 역시 미국의 실업가인 헌트(L S Hunt)가 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 미국 변리공사(辨理公使) 알렌의 재능이 크게 빛났다. 이밖에 독일은 강원도 당현(堂峴) 금광, 영국은 전라남도 은산(殷山) 금광, 일본은 충청남도 직산(稷山) 금광, 러시아는 함경북도 경원(慶源) 금광 등에서 조선의 이권을 탈취해 갔다. ⓒ프레시안

구미 열강은 주로 조선에서 직접적인 이권을 취하는 데에 힘을 쏟았을 뿐, 장기적으로 법과 제도를 자기네 방식으로 개조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선 역시 구미 열강으로부터 직접 근대적인 법과 제도를 도입할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의지가 없었다기보다는 역량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통한 도입이라는 통로가 있었다. 구미로부터 근대 문물을 곧바로 도입하는 길밖에 없었던 일본과는 그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보건의료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1880년대 중반부터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등 서양 여러 나라의 의료인들이 조선에 와서 의료 사업을 벌였지만 그들의 활동은 주로 환자 진료와 선교에 관련된 것이었다. 종종 국가의 방역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보건의료 분야의 법과 제도의 마련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에는 경험도 역량도 부족했다.

이런 형편에서 <의학교 규칙> 등 보건의료에 관련된 법령을 제정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데에 일본의 것을 참조하고, 또 그러한 가운데 일본의 영향이 미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제는 조선 정부가 얼마나 자주적으로, 그리고 실정에 맞게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운용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조선이 일본의 피보호국, 더욱이 식민지가 되면서 자주성은 사라졌다. 하지만 1906년의 통감부 설치 이전에는 일본의 간섭을 받기도 했지만 대체로 조선 정부가 그 일을 주도했다. 일본의 법과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조선의 실정과 경험에 맞게 변형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은 "근대식" 의료와 교육에는 뒤졌지만, 의료와 교육 자체가 아예 없었던 미개국이나 야만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 <고종실록> 1895년 2월 26일(음력 2월 2일)자. 국왕은 "교육입국(敎育立國)"을 조칙(詔勅)으로 반포했다. ⓒ프레시안
갑오을미 개혁기에 김홍집 내각이 가장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가운데 하나가 교육 개혁이고 근대적 교육 제도의 수립이었다. 1880년대에도 정부가 동문학, 제중원 학당, 육영공원, 연무공원 등을 세워 근대식 교육을 시행하여 약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용두사미 격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이제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체계적으로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1895년 2월 26일, 다음과 같은 교육에 관한 국왕의 조칙(詔勅), 즉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로 가시화된다. ("교육입국조서"는 원래 그렇게 이름 붙었던 것이 아니라 이만규의 <조선교육사>(제57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짐(朕)이 정부에 명하여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너희들 신하와 백성의 학식으로 나라를 중흥시키는 큰 공로를 이룩하기 위해서이다. 너희들 신하와 백성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너의 덕성, 너의 체력, 너의 지혜를 기르라. 왕실의 안전도 너희들 신하와 백성의 교육에 달려 있고 나라의 부강도 너희들 신하와 백성의 교육에 달려 있다.

요컨대 국왕은 이 조칙을 통해 신교육의 목표가 신학문과 실용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오륜의 행실을 닦는 덕양(德養), 체력을 기르는 체양(體養),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양(智養)을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삼아,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곧 국가의 중흥과 보전에 직결되는 일임을 천명했다. 아직 자아실현이나 개인의 권리로서의 교육은 때 이른 것이었다.

또한 국왕은 이 조칙의 발표에 앞서 1895년 1월 7일 왕족과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과 함께 공포한 "홍범(洪範) 14조"에서도 "나라 안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익히도록 한다(國中聰俊子弟 廣行派遣 以傳習外國學術·技藝)"(제11조)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위의 조칙에 따라 <법관양성소 규정>(1895년 4월 19일), <한성사범학교 관제>(5월 10일), <외국어학교 관제>(6월 11일), <소학교령>(9월 7일)이 잇달아 제정, 반포되었으며, 또 그 법률들에 의거해 법관양성소, 한성사범학교, 외국어학교,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이때 의학교 설립도 추진했는데(제7회), 만약 그 시도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일본인들이 의학 교육에 크게 관여했을지 모른다. 그 무렵이 일본의 간섭이 특히 심했을 때이고, 여전히 근대식 의학 교육과 고등 교육을 받은 조선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국내에 학교를 많이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과 더불어 정부가 역점을 기울였던 것은 유학생 파견이었다. 학문과 기술이 뒤떨어진 나라가 선진국에 유학생들을 보내어 그것을 배우도록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동서고금에 두루 적용되는 보편적 이치이다. 일본과 미국이 학문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데에는 유학(생)의 공이 매우 컸다. 19세기 당시 선진 학문을 주도하던 유럽 나라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어윤중(魚允中, 1848~1896년). 을미개혁 시기에 탁지부 대신으로 재정 개혁을 주도했다. 아관파천 때 일본 망명 제의를 거절한 어윤중은 며칠 뒤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던 도중 향반(鄕班)들에게 피살되었다. 어윤중은 정부 고관으로는 유일하게 동학 "비도(匪徒)"들을 "민당(民黨)"이라고 지칭하여 지배층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최초의 일본 유학생들인 유길준, 류정수, 윤치호는 모두 어윤중의 문인(門人)이었다. ⓒ프레시안
영선사(領選使) 김윤식의 인솔로 근대적 기술과 문물을 습득하기 위해 청나라로 갔던 경우를 제외하고 개항 초기의 유학은 모두 일본으로 향했다. 1880년 지석영이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잠시 동안 우두술을 배운 적이 있지만(제41회), 본격적인 일본 유학은 1881년 유길준(兪吉濬, 1856~1914년)과 류정수(柳定秀)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윤치호(尹致昊, 1865~1945년)가 도닝샤(同人社)에 입학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어윤중(魚允中, 1848~1896년)이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의 수행원으로 가서 일본에 계속 머물렀다.

그 뒤 급진 개화파는 1884년까지 유학생 100여명을 게이오 의숙, 육군 도야마학교(戶山學校, 서재필이 다녔다), 조선소 등에 파견하다가 갑신정변의 실패 뒤로는 10년 남짓 유학생 파견이 중단되었다.

그러다 "교육입국조서"가 발표되고 두 달이 지난 1895년 4월 다시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게 되었다. 정부의 전반적인 교육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서의 유학생 파견은 사실 박영효가 일본 망명 때인 1893년에 이미 피력한 바가 있었다.

"박영효 씨는 나에게 조선에서 젊은이 100명가량을 데려와 의학, 상업, 군사 기술을 배우게 하겠다는 자신의 계획도 말했다. (Mr. Pak Yong Hio further told me of his plans for bringing out about hundred young men from Corea to be taught in medicine, commerce, and military tactics." (<윤치호 일기> 1893년 10월 31일자)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전에 김옥균과 함께 유학생들을 일본에 보낸 경험도 있었고, 1893년에는 장차 유학생들을 위해 사용할 친린의숙(親隣義塾)이라는 기숙사를 실제로 세웠다고도 한다. 이처럼 박영효가 망명 시절부터 유학생을 대거 일본으로 받아들일 구상을 했던 것은 조선을 근대화시키려는 계획이기도 했거니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것이기도 했다.

1894년 6월 일본군의 진주(進駐)로 조선의 정세가 크게 바뀌면서 그에 힘입어 귀국한 박영효는 그해 말 내부대신이 됨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895년 상반기는 김홍집 총리대신과 박영효 내부대신의 연립내각이라고 할 정도로 박영효의 발언권이 강할 때였다. 특히 일본과 직접 관련이 있는 유학생 파견은 박영효가 주도했다. 유학생 선발부터 게이오 의숙에 유학생들을 위탁하는 것까지 모든 일을 박영효가 주관해서 처리했다는 당시 유학생 어담(魚潭)의 술회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조선 유학생들을 받아들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 정부에 제의한 적도 있었다. 장차 조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많은 청년 엘리트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선(특히 박영효)과 일본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1895년의 유학생 파견은 학부에서 관비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그 규모도 대단히 커서 1895년 한 해 동안 무려 150여 명이 유학생으로 파견되었다. 이것은 개항부터 1910년까지 중에 최대 규모의 관비 유학생 파견이었다. 이 대규모 유학생단에는 남순희(南舜熙), 방한숙(方漢肅), 김익남(金益南) 등 의학교와 직접 관계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1895년에 일본 유학생으로 파견된 학생들. 1896년 1월 6일 일본 주재 조선 공사관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친목회 회보> 제1호(1896년 2월 15일 발행)에 실려 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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