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운데 절반가량인 72명이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했으며, 이어서 61명이 상급 학교에 진학하여 그 대부분이 전문학교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일본에 유학하여 새로운 전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온 것은 당시 조선(한국)의 형편에 비추어 볼 때 대단한 일이었다.
유학생 파견의 실무는 학부가 담당했다. 학부는 한문 시험과 체격 검사를 통해 응시자 400여 명 중에서 114명을 선발했다. 공개 선발 형식을 갖추었지만, 개화파 관료들과 연관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합격한 것을 보면 그리 공정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합격자 가운데에는 내부대신 박영효의 조카 박완서(朴完緖), 농상공부대신 김가진(金嘉鎭)의 장남 김중한(金重漢), 그리고 탁지부대신 어윤중과 내부협판 유길준의 친척들도 있었다. 또한 윤치호의 동생 윤치오(尹致旿)와 윤치성(尹致晟)은 그보다 조금 앞서거나 뒤에 유학생 대열에 합류했다.
이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여전히 개화와 외국 유학 등에 비우호적인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개화파들의 솔선수범이고 고육지책이었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고관 자녀 특혜에는 어떤 핑계거리가 있을까?
4월 12일(음력 3월 18일) 학부대신 박정양(朴定陽)은 선발된 유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훈시를 했다.
대군주 폐하의 교육대정(敎育大政) 조칙을 본 대신이 받들어 총명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이웃 나라에 파견하게 되었다. 여러분은 각과에 나뉘어 실용 사무를 실심강구(實心講究)하여 지식을 넓히고 사리를 깨우쳐 의연한 정신으로 독립 문명한 세상의 필요에 응하기 바란다. 여러분은 힘껏 덕행과 재예를 함께 닦아 일신의 사사로움을 잊고 나라를 사랑하여 국왕에게 충성하는 뜻을 확립하라. 일체 학업 질서는 경응의숙(慶應義塾)의 지도를 준수하여 수치스러운 일이 없게 하고 본 정부가 바라는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라. 여러분의 학자금, 의식주 비용, 잡비 등은 복택유길(福澤諭吉) 씨를 통해 관비에서 지출할 터이니 낭비하지 말기 바란다.
유학을 포기한 한 사람을 제외한 113명은 4월 26일 꿈만 같았을 유학길에 올랐다. 그들은 한성에서 인천까지 도보로, 인천에서 1박한 뒤 부산까지 화륜선으로, 부산에서 다시 1박한 뒤 나가사키까지 기선으로, 나가사키에서는 2박한 뒤 기선을 타고 고베로, 그리고 그 다음날인 5월 1일 기차편으로 도쿄 신바시(新橋)역에 도착했다. 5박 6일의 긴 일정이었다. 하지만 조선통신사 시절에 비하면 대폭 짧아진 여정이었다. 세상은 그만큼 좁아지고 빨라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변화한 세상에 조선(사람)도 적응해야만 했다.
출발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도정도 도보 행진이었다. 환영 나온 게이오의숙 생도 200여명이 앞장서고, 청색, 백색, 녹색의 조선옷을 입은 유학생들이 태극기와 "대조선국 제생동창학회(大朝鮮國諸生同窓學會)"라고 쓴 깃발을 높이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이들보다 앞서 도쿄에 유학 온 윤치오, 어윤적(魚允迪, 어윤중의 동생), 이병무(李秉武, 제61회) 등 10여 명과 일본 주재 공사관원도 행진에 함께 했다.
위풍당당하게 게이오의숙까지 행진한 일행은 곧 연설관으로 인도되어 후쿠자와의 일장 연설을 듣고는 기숙사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 <매일신보> 1933년 12월 11일자. 박태원의 중편소설 <낙조(落照)> 제4회치가 실려 있다. 후쿠자와가, 일본에 막 도착한 유학생들을 면담하여 일일이 신원과 지망을 묻고는 조선인 학생들이 근대적 실용 학문과 기술에 관심이 없다며 실망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소설에는 유학생 지망자가 천명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프레시안 |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1909~1986년)은 1933년 12월 8일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 <낙조(落照)>에서 1895년 일본 유학생들에 대해 몇 회에 걸쳐 묘사하고 있다. 경오년(1870년) 생 최 주사를 화자(話者)로 하고 있는 이야기는 대체로 사실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이며,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몇 가지 사실도 전하고 있다.
그런 것으로는 선발 시험 전에 일본인 의사가 신체검사를 한 일(피검자를 온통 발가벗겼다는 묘사로 보아 매우 강압적이었던 것 같다), 일본 도착 직후 모두 단발(斷髮)을 한 일(조선에 단발령이 내려진 것은 그보다 8개월가량 뒤인 1896년 1월 1일이었다), 게이오의숙 교복 차림으로 시내의 술집에 갔다가 쫓겨난 일 등이 있다.
유학생 거의 대부분이 건달이었다는 둥 당시 일본 유학생들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묘사를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주목을 끄는 장면은 연재 제4회의 후쿠자와 유키치와 관련된 부분이다.
"우리가 들어가는 길루 복택유길(福澤諭吉)이를 맛낫구려."
"어듸서요?"
"학교서… 우리가 경응의숙(慶應義塾)엘 다넛섰거든… 지금두 동경에 그런 학교 잇지요?"
"잇습니다."
"처음에 복택이가 물어보드구면. 성명이 무엇시요. 아무개요 대답하니까 조선 사람들은 성명 외에 자가 잇구 별호가 잇구 하다니 그것두 말하우 하길래 일일히 대겟다. 그랬드니 이번엔 신분을 물어 보드군. 황족(皇族)이시요 화족(華族)이시요 사족(士族)이시요 하구… 백여명 유학생을 일일히 물어보구 나드니 이번엔 지망이 무어냐구 뭇습듸다그려."
"그래 뭐라구 그러셋습니까?"
"흥!"
노인은 자조미(自嘲味)가 풍부한 코웃음을 치고 나서 어느 틈엔가 또 불이 꺼진 담배에 다시 석냥을 거대고 그리고 또 한번 "흥!"하고 코웃음을 친 다음에야 이약이를 게속한다.
"역시 관직(官職)을 원한다고 그랫조. 하나하나 물어보니까 백명이 하나 빼지 안쿠 관직 지망자라구 그러는구료."
"그럼 모두 정치과에 들어가세야만 하겟군요."
"앗다 이 냥반, 그냥 얘기나 들으슈 하하하… 그래 그 말을 듯드니 복택유길이 얼골에 실망하는 긔색이 떠오릅듸다. 자긔는 설마 백명 학도 하나 빼지 안쿠 그러케 대답할 줄이야 몰랏섯든게지. 원내가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 농공상 세 가지가 나라 흥하는 근본이로구려. 관직이란 매양 거저먹구 행세하구 엄벙뗑하는 그거지 아무것두 아니예요. 그야 하나두 업서서야 그도 어렵겟지만, 이건 모도들 그걸 하겟다니 될 말인가. 정작 농공상 세 가지는 아주 천하게들 생각하구… 흥! 참!"
▲ 1만 엔(円)짜리 일본은행권에 새겨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년).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일본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그"라는 상반되는 것 같으면서도 연결되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인 유학생들을 후쿠자와가 세운 게이오의숙에 입학시킨 데에서도 박영효와 일본 정부, 그리고 후쿠자와 등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후쿠자와는 유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는 등 직접적으로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인간은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존재는 아니다. ⓒ프레시안 |
관비 유학생 1진이 일본으로 건너간 지 한 달 남짓 지난 6월 13일에는 김익남을 포함한 2진 26명이 게이오의숙에 합류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달가량 뒤 이들 유학생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7월 6일 박영효가 내부대신 직에서 전격적으로 해임되고 일본으로 다시 망명했다는 것이었다(제24회).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새로운 학문을 공부한다는 기대와 함께 박영효를 통해 입신출세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졸지에 출세는커녕 자신들도 역적으로 몰릴지 모를 처지에 놓인 것이다. 실제로 1896년 아관파천 이후에 구성된 친러·친미·반일(反日) 내각은 관비 유학생들을 "역적의 손으로 파견된 유학생"이라고 공언했다고 한다.
일본의 <고쿠민신문(國民新聞, 현재 <도쿄신문>의 전신)>은 유학생들이 망명 온 박영효를 마중 나갔다고 보도했다. 설상가상이었다. 유학생들은 <고쿠민신문>에 항의하여 잘못된 보도를 바로잡도록 했고, 그러한 사실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는 한편 수업도 중단함으로써 자신들의 결백을 호소했다.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 주재 조선공사관도 전말을 파악하여 정부에 보고했다. 여기에 대해 정부는 유학생들에게 동요하지 말고 학업에만 전념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1907년 6월 박영효가 다시 귀국할 때 조직된 "박영효 씨 환영회"에는 이들 유학생들이 발기인의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은 만고의 인지상정인가?)
유학생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조변석개함을 느끼면서 그럴수록 학업에 열중해야 했다(박태원의 소설 <낙조>에는 최 주사 등 많은 학생들의 주업이 놀고먹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들이 우선 공부해야 할 과목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어였다.
유학생 가운데에는 조선에서 일본어를 배운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일본 <지지신보(時事新報, 1882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간)> 5월 4일자에 의하면 "8명은 이미 경성에 있는 일본어학교에서 6개월간 어학을 배워 일본어에 자못 능통했다"고 한다. 2진으로 도착한 김익남도 마찬가지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본어를 공부한 적이 없었다.
게이오의숙에서는 "조선인 유학생 학칙"을 만들어 1년 8개월 만에 졸업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에 따라 일본어 실력별로 학급을 편성하여 학생들에게 우선 일본어를 배우고, 이어서 게이오의숙 보통과 과정을 이수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보통과 과정에서는 일본어 한문, 영어, 지리, 역사, 수학, 일본어 습자, 미술, 역독(譯讀)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유학생들은 세 차례에 걸쳐 보통과 과정을 졸업했다. 1895년 12월에는 김윤구, 김익남, 박정선, 장명근, 최병태, 진희성, 유문상, 김동완 등 8명, 1896년 7월에는 신해영, 이면우(1905~1906년 법관양성소 소장을 지냈으며 1910년 이재명 재판 때 변호를 맡았다, 제60회), 남순희 등 45명, 1896년 12월에는 원응상, 박완서(박영효의 조카) 등 19명이 졸업했다. (이들 "1895년 유학생"보다 먼저 게이오의숙에 입학했던 윤치오는 1896년 12월에야 보통과를 마쳤다. 유학생 친목회 회장을 맡아 유학생들을 뒷바라지하느라고 졸업이 늦은 것이었을까?)
▲ <(대조선 일본유학생) 친목회 회보> 제2호(1896년 6월 16일 발행)의 "친목회 일기". 1895년 12월 29일(음력 11월 14일) 김윤구, 김익남, 박정선, 장명근 등 8명이 유학생들 중 처음으로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했으며, 특히 이 가운데 김윤구와 김익남은 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익남의 "관원 이력서"와도 잘 부합하는 내용이다. 김익남은 이미 조선에서 일본어를 6개월가량 공부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그러한 경력이 확인되지 않는 김윤구는 어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는지 모른다. 김윤구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는 않고 철도 실무를 익혀 귀국한 뒤 철도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프레시안 |
조선인 유학생으로 게이오의숙을 처음으로 졸업한 8명 가운데 김윤구(金允求), 진희성(陳熙星), 유문상(劉文相)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철도와 우편 전신 실무를 익혀 귀국한 뒤 철도와 체신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한편, 김익남(金益南)은 이들 중에서 최초로 고등교육기관인 도쿄 지케이의원(慈惠醫院) 부속의학교에 진학하여 1899년에 의사가 되었고, 김동완(金東完)은 몇 해 뒤 도쿄농과대학(東京農科大學)에 진학하여 1905년 졸업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서 농상공부 기사를 지냈다.
그리고 장명근(張明根)과 최병태(崔炳台)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 격인 세이조학교(成城學校)에 진학했다.
반면에 박정선(朴正善)은 게이오의숙만 마친 뒤 곧바로 귀국하여 원산부(元山府) 주사가 되었다. 원산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으므로 일본 관계 업무를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후쿠자와가 조선인 유학생들이 근대적 실용 학문과 기술에 관심이 없다며 실망했다는 것과는 달리 적지 않은 사람이 철도, 우편 전신, 의학, 농학 등을 공부했고 귀국 뒤에도 그 일에 종사했다. 이는 후쿠자와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3차례에 걸쳐 72명, 즉 전체 유학생의 절반가량이 1차 관문을 통과했다. 1902년 한국 최초의 정규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될 방한숙은 게이오의숙에 입학은 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게이오의숙 도난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조기에 귀국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방한숙은 귀국 전에 누명은 벗었다.) 함께 일본에 유학했던 김익남과 방한숙은 몇 해 뒤, 의학교에서 사제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된다.
▲ <친목회 회보> 제2호의 "회원 동정". 김윤구와 김익남 등의 게이오 의숙 졸업 뒤의 진로가 기록되어 있다. 1897년 종두의양성소 제1기를 2등으로 졸업하게 될 고희준(제50회)은 이 당시 도요에이와학교(東洋英和學校)에 다니고 있었다. ⓒ프레시안 |
박정양 훈시, <고쿠민신문> 오보, 게이오의숙 학과목 등 이 글에 소개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은 한양대학교 박찬승 교수(사학과)의 연구에 힘입은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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