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주장) 포기, 일본에게 청나라의 랴오둥 반도(遼東半島)·타이완(臺灣)·펑후 제도(澎湖諸島, 타이완 바로 서쪽) 등의 할양, 열강과 동등하게 일본의 특권을 인정한 청일 통상 조약 체결, 일본에게 전쟁 배상금 약 3억 엔(일본 정부의 4년치 세출 예산에 해당) 지불 등이었다.
아편전쟁(제1차 중영(中英)전쟁, 1839~1842년) 이래 구미 열강들에게 이미 여러 차례 치욕을 겪은 청나라였지만 이웃한 소국 일본에게 전쟁에서 참패하고 조약 체결 과정에서 온갖 수모를 경험한 것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일이었다. 또 조선도 이미 몇 달 전인 1월 7일 국왕이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을 반포함으로써 청나라를 "배신"한 바 있었는데, 그것을 청나라 스스로 공인한 셈이었다.
조약 내용 가운데 랴오둥 반도 할양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이른바 "3국 간섭"으로 철회되었고 대신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배상금 4000여만 엔을 더 받는 것으로 내용이 수정되었다. 그리고 5월 8일 청나라의 즈푸(芝罘, 지금의 옌타이)에서 비준서가 교환되어 청일전쟁은 종결되었다.
▲ 1894년 9월 평양 전투 직후, 부상당한 청나라 병사들을 치료하는 일본군 의료진. 선전용으로 찍은 사진임이 잘 드러난다. 관타나모의 미군 수용소에서 "테러리스트"들을 치료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일본군은 전투뿐만 아니라 의료, 선전(심리전), 병참 등 모든 분야에서 청나라 군대를 압도했다. ⓒ프레시안 |
전쟁과 조약 체결을 통해 청나라가 무위무능한 종이 호랑이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반면에 일본은 실질적인 이익을 크게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화된 일본제국"에 대한 국민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한 일본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청일전쟁과 갑오농민군 토벌로 조선 전역을 유린, 약탈하고 수많은 민중을 학살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더불어 일본의 위세에 대한 두려움이 조선인들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또 일부에서는 신흥 강국 일본에 대한 선망도 싹트고 있었을 것이다.
1895년 유학생들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한편으로는 전쟁 승리의 도취감이,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응당 차지해야 할 중요한 전리품인 "만주(滿洲) 이권"을 가로챈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일본 열도를 휩쓸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신과 일본(인)을 동일시하는 심리가 적지 않은 유학생 가운데 생겼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근대 학문과 기술 섭취, 그를 통한 입신출세라는 유학생들의 꿈은 잇따른 사건으로 퇴색되어 갔다. 자신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박영효의 실각(7월 6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 1846~1926년)의 진두지휘로 자행된 민 왕비 암살(을미사변, 10월 8일), 일본군과 친일파들에 의해 경복궁에 유폐되어 있던 국왕을 빼돌리기 위한 친미-친러파의 시도(춘생문 사건, 11월 28일) 등은 유학생들의 입지를 점차 좁혀갔다.
▲ <관보> 1896년 1월 20일자. 총 세출 예산 630여만 원 중 학부 소관은 12만6000여 원으로 2%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유학생비는 4만426원이었다. 의화군(고종의 5남)과 이준용(고종의 조카)의 유학비 9000원을 제외한 약 3만 원이 실제 유학생 학자금으로 책정된 셈인데, 이는 1인당 연간 200원꼴로 원래의 계획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프레시안 |
유학생들에게 가해진 결정타는 1896년 2월 11일의 아관파천이었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기어들면서 내린 지시에 따라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고, 총리대신 김홍집, 탁지부대신 어윤중,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는 참살되었다. 이로써 더욱 무능하고 기회주의적인 친러-친미파가 조선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보름 남짓 뒤인 2월 28일 이범수(李範壽), 여병현(呂炳鉉, 1867-?), 임병구(林炳龜) 등 유학생 6명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들은 그날 새벽 게이오의숙 기숙사를 빠져나가 요코하마에서 미국행 기선을 탔다. 특히 유학생 친목회 회계 이범수는 공금 423원을 빼돌려 지닌 채였다. (미국으로 간 이범수 등이 주미 공사 서광범을 통해 정부에 학비 지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 그리고 여병현은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배재학당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들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당시 유학생들의 동요하던 심경을 잘 읽을 수 있다.
이미 박영효의 실각 뒤부터 신병, 부친상, 집안 사정 등의 이유로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특히 아관파천 이후에 귀국자가 속출했다. 결국 절반가량은 게이오의숙도 졸업하지 못한 채 조선으로 돌아왔다.
1896년 예산에 책정되었던 도일 유학생 학자금은 실제로는 1897년 5월까지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또한 친러-친미 내각은 관비 유학생들을 "역적의 손으로 파견된 유학생"으로 취급했다. 더욱이 1896년 말에는 정부가 러시아에 유학생 30여명을 파견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실제로 정부가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유학생 파견국을 다변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파견한 유학생들에게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새로운 유학생 파견에 대한 풍문이 있었던 것은 작지 않은 문제였다.
▲ <독립신문> 1896년 12월 12일자. 정부가 러시아에 유학생 30여명을 파견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프레시안 |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저희들이 이번에 일본국에 유학하는 명을 삼가 받들었으니 이 명령을 받든 뒤에는 밤낮으로 노력하여 학업에 종사하되 중도에 폐지하는 폐가 없을 뿐더러 졸업한 후라도 관(官)에 들어와 국은(國恩)을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것"을 선서한 유학생들에게 정부가 취한 태도는 실망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국가의 능력 부족으로 충실한 지원을 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친러·친미·친일 정파 간의 갈등으로 유학생들을 박대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한 그러한 박대 속에 유학생들의 일부는 일본의 자그마한 호의에도 감복할 조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적지 않은 유학생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원래 유학의 목적이었던 근대 학문과 기술을 습득했다. 후쿠자와가 개탄했던 것과는(제67회) 달리 다음과 같이 공학, 과학기술, 농학, 의학 분야를 공부한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그 가운데 최영식(崔永植), 강영우(康永祐), 안형중(安衡中), 박정선(朴正銑), 홍인표(洪仁杓), 현귀(玄槶), 김정우(金鼎禹)는 도쿄고등공업학교에서, 그리고 남순희(南舜熙), 안창선(安昌善), 장승두(張承斗)는 도쿄공수학교(工手學校)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또한 이주환(李周煥)은 육지측량부수기소(陸地測量部修技所)에서 측량술을, 한만원(韓萬源), 박완서(朴完緖), 강용갑(姜龍甲), 우태정(禹泰鼎), 변하진(卞河璡)은 항해 학교에서 항해술을 습득했다.
한편, 농학을 공부한 사람으로는 도쿄농과대학을 졸업한 김동완(金東完), 도쿄 인근의 에바라군(荏原郡)농과대학에서 수학한 정석환(鄭錫煥), 오성모(吳聖模), 안경선(安慶善) 등이 있었다.
1895년 도일 유학생 가운데 의학 분야 전공자는 도쿄 지케이의원 의학교를 졸업한 김익남(金益南)이 유일했다. 그리고 3년 뒤부터 안상호, 박종환(이상 관비 유학생), 유세환, 유한성(이상 사비 유학생) 등이 김익남의 뒤를 이었다. (김익남에 앞서 일본에 가서 의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박일근(朴逸根, 1872~?)이 있었다. 그의 존재가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은 1898년 한성 수진동(종각 네거리 북서쪽)에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열면서부터라고 여겨진다.)
이들은 귀국한 뒤 주로 관립학교에서 교관(교수)을 지내거나 정부의 관련 부서에서 기술 관료로 활동했으며, 사립학교와 회사에서 자신들의 전공을 살린 경우도 있었다. 크게 출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 사회의 골간이 될 과학기술과 공학 분야의 기반을 닦는 데 헌신했던 것이다. 변하진과 오성모처럼 정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됨으로써 자신들의 경륜을 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 공학, 과학기술, 농학, 의학 분야를 전공한 도일 유학생들. ⓒ프레시안 |
▲ 망국 직전인 1910년 8월 변하진에게 추증된 "정3품 통정대부 규장각 부제학" 교지(장서각(藏書閣) 소장). 일본 유학에서 항해술을 전공한 변하진은 독립협회 시절부터 구국의 항로를 개척하다 1902년경 처형당했다.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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