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안중근의 행위는 "국격"을 떨어뜨리는 만행이라고 맹렬히 비방하면서 장례 기간 동안 가무음곡을 금지하고 조중응을 대표로 하는 진사(陳謝)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는 등 온 나라를 이토 추모 분위기로 몰아갔다. 또한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온갖 조치를 다 취했다. 철갑 속에 목을 쑥 집어넣은 거북이가 되었다.
▲ <황성신문> 1909년 10월 29일자. 대한제국 대황제 폐하(순종)가 일본 천황에게 "吾國의 兇手"에게 목숨을 빼앗긴 이토 히로부미의 서거를 추도한다는 전문을 보냈다는 기사이다. 그뿐만 아니라 순종은 통감부에 직접 찾아가 조문을 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프레시안 |
▲ 1909년 11월 4일 거행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 일본 역사상 국왕의 장례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격식을 갖춘 장례 행사였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진사 사절단은 안중근의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하며 이토의 명복을 빌었다. ⓒ프레시안 |
두 달에 가까운 이토 추모 행사가 끝나갈 무렵 이번에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 2세(1835~1909년 12월 17일)의 별세를 애도하는 추도식이 벨기에 영사관 주최로 종현 교회당(명동 성당)에서 열렸다. (레오폴 2세는 벨기에보다 10배나 넓은 아프리카의 콩고를 병탄하여 "콩고 자유국"의 국왕이 되었던 인물이다. 벨기에의 문명 전파와 교화가 얼마나 철저했던지 한 세대 만에 콩고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영국의 탐험가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4년)는 레오폴 2세가 콩고를 차지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피습을 두려워하여 대중 앞에 나서기 꺼려했으나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12월 22일의 추모 행사가 끝나자마자 오전 11시 30분경 경호대를 앞뒤에 거느리고는 차부(車夫) 박원문(朴元文)이 끄는 인력거에 올라 황망히 귀가 길에 올랐다. 인력거가 교회당 문을 막 나서는 찰나 어디선가 괴한이 나타났다. 평양 출신의 스물두 살(나이에 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기소장에 적힌 것을 따랐다) 청년 이재명(李在明)이었다.
이재명은 몸에 단도와 육혈포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익숙한 단도를 든 가운데 손으로 차부 박원문을 한 칼에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겁에 질린 51세의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그 단도로 몇 군데를 찔렀다. 인력거 아래로 굴러 떨어진 이완용은 움직이지 않았다. 곧 이어 달려온 경호원들은 이재명을 포박하는 한편 대검으로 등을 찔렀다. 이완용과 이재명이 흘린 피로 그 일대는 유혈이 낭자해졌다. 그러는 사이에 이재명이 "대한 만세"를 외쳤다는 얘기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23일자. "벨기에(비국) 황제 폐하 추도식에 참례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후좌우로 엄밀히 보호하고 교당 문 밖에서 칠팔 간 되는 데 이르러서는 단발한 사람 일 명이 돌출하여 여덟 치 남짓한 한국 칼로 인력거 끄는 차부부터 찔러 거꾸러뜨리고 몸을 소스쳐 차 위에 앉은 이완용 씨의 허리를 찌르매 이 씨가 달아나려 하거늘 이 씨의 등을 찔러서 세 군데가 중상하였는데, 그 자객은 평양 사람 이재명이라 즉시 포박되었다더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어진 기사에서 이완용이 왼쪽 어깨 한 군데, 등에 두 군데 자상을 입었으며 특히 등의 상처는 허리에까지 걸쳐 있어 생명이 위독하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황성신문> 보도도 대체로 비슷하나, 이완용이 중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무관하다고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거사에 사용한 무기는 한국 칼이 아니라 일본도라고 했다. ⓒ프레시안 |
차부 박원문은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이완용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완용 대신 애꿎게 박원문이 죽은 것이다. 이러한 박원문의 죽음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정당한 폭력의 무고한 희생자"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완용이 중상을 입었음에도 살아남게 된 이유는, 이재명의 길을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막았기 때문이다. '매국'을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었던 평민 박원문이 이재명의 다급한 칼에 찔려 죽었고, 이완용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완용에 대한 이재명의 공격이 정당화될 수 있다 해도, 매국노를 인력거에 태워준 죄(?) 이외에 별다른 죄를 저지른 일이 없던 박원문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정의인가? 일제는 일제대로 박원문의 죽음을 이용해 이완용의 암살 미수 건만으로 사형을 받을 수 없던 이재명에게 '박원문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했다.
이재명이 공판에서 박원문을 죽인 것이 '우연'이었음을 강조하고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했지만, '무지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평민 하나쯤 목숨을 잃는 것은 당시에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별다른 고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우리는 '이재명 의거'에 대한 기억에서 박원문의 죽음을 꼭 빠뜨려야만 하는가?" (박노자,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 21> 2007년 4월 13일자)
필자는, 이재명이 재판 과정에서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하면서 박원문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시의 언론 보도나 재판 기록에서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필자가 못 보았을 뿐 박노자의 언급이 사실일는지 모른다.
그러면 박원문은 누구인가? 이완용을 인력거에 태워준 죄밖에 없는 사람인가? 그러나 박원문이, 이완용이 이동할 때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단순한 인력거꾼이 아니라 핵심 경호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박원문은 원래 이완용의 사위 홍운표(洪運杓)의 인력거꾼이었는데 신체가 건장하여 이완용의 인력거를 끌게 되었다. (<황성신문> 1909년 12월 24일자). 그리고 이재명이 이완용에 앞서 박원문을 칼로 찌른 것은 공판 기록에 나오듯이 박원문이 이재명을 제지하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박원문을 놓아 둔 채 이완용에 달려들었다면, 등을 보인 이재명은 박원문에게 쉽게 공격당하고 거사가 수포로 돌아갔을지 모른다.
이재명이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은 박원문의 죽음 때문이었다. 사건 담당 검사 이토(伊藤德順)는 이재명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일제도 살해 미수만으로는 처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박원문의 죽음을 끌어들였던 것이었다. 이 일을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재명은 살인 미수로 그쳤기 때문에 일부러 차부 박원문을 살해한 건을 끌어들여 이재명에 대해 고의 살해의 죄를 덮어씌우고 드디어 사형을 구형한 것이다. 일본인 변호사 大崎, 岩田, 木尾 세 사람은 모두 이에 반박하여, 박원문을 살해한 것은 오살(誤殺)이요, 고살(故殺)이 아니니 만약 이재명을 처형한다면 법률의 본의를 크게 잃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인 변호사 이면우, 안병찬도 한 목소리로 이재명은 사형의 율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변호했는데, 안병찬의 변론이 더욱 결연했다. 법정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교수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듣고 눈물을 떨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황현이 언급한 일본인 변호사 오오사키(大崎熊之亟), 이와타(岩田仙宗), 기오(木尾虎之助) 모두 국적을 뛰어넘어 법의 정신을 구현하려고 노력한 점에서 귀감이 될 만하다. 굳이 말하자면, 이들과 검사 이토 가운데 누가 일본을 빛내고 누가 일본을 욕보였는가?
또 황현이 위 글에서 이재명의 변론에 가장 앞장섰다고 말한 변호사 안병찬(安秉瓚, 1854~1921년)은 법률가이기에 앞서 민족운동가였다. 안병찬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 법부 주사 신분으로 을사 5적을 죽일 것을 상소했지만 오히려 경찰에 구속되었다. 1909년에는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핵심 인물인 이용구(李容九)와 송병준(宋秉畯) 등을 대역미수(大逆未遂)와 국권괴손죄(國權壞損罪)로 고소했으며, 안중근의 거사 후에는 그의 변호를 맡기 위해 뤼순(旅順) 법정으로 갔지만 일제의 방해로 변호를 하지는 못했다. 1911년 9월에는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1919년 신의주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뒤 안병찬은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총재로 활동하다 8월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말 병 보석으로 가출소하게 되자 즉시 탈출하여 남만주 관전현에서 조직된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총재로 선임되었다. 1920년 가을에는 상해로 가서 9월 임시정부의 법무 차장(차관) 및 법률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안병찬은 1921년부터는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여 활동하다 반대파에게 암살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또 다른 변호사 이면우(李冕宇)는 1894년 관립 일어학교를 거쳐 1895년 3월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896년 7월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보통과를 졸업했고, 1899년 7월에는 도쿄 법학원대학 법률학 전과 졸업장을 받았다. 1895년 12월 게이오 의숙 보통과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1899년 7월 도쿄 지케이카이 의학교 의학 전과 졸업장을 받은 김익남(제59회)과 거의 같은 학업 과정을 밟았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이면우는 1902년 농상공부 주사, 1904년 한성재판소 검사를 거쳐 변호사로 활동했다.
▲ 이재명. 출처 미상으로 거사 직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또 체포된 사람으로 천도교 지도자 양한묵(梁漢默, 1862~1919년, 3·1운동 33인 대표 중 유일하게 옥사)도 있었다. 이 사건 가담자 중 오복원과 김용문 등 천도교도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한묵은 넉 달 가까이 구금되었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 양한묵의 신문조서(訊問調書)에는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과 함께 전의(典醫) 박종환(제59회)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다.
박종환은 1910년 3월 16일 의원 면직 형식으로 전의에서 물러났는데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박종환이 천도교에 입교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유학 때부터 손병희와의 관계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김익남도 감시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아마 거의 모든 유학생이 감시 대상이었을 터인데 박종환은 경우가 특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까지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부의 신임을 누렸다. 1913년 3월에는 천도교에서 세운 병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박종환은 1910년대 후반부터는 이완용, 송병준 등 대표적 친일파들처럼 아들과 딸을 일본인 소학교에 보내는 등 그 전과는 다른 행적을 보인다.)
▲ <매일신보> 1916년 10월 21일자. "순화(醇化)되는 아동의 교육." 일제는 조선인 유력자들이 자녀를 일본인 학교에 보내는 것을 일선동화(日鮮同化)의 큰 성과라고 선전했다. 의사로는 박종환 외에 안상호(安商浩, 1902년 일본 지케이카이 의학교 졸업)도 들어 있다. 안상호는 일본 유학 중에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이른바 "선부일처(鮮夫日妻)"가 된 경우이다. ⓒ프레시안 |
박원문의 죽음을 대가로 목숨을 요행히 부지한 이완용은 어디서 어떻게 치료를 받았을까? 다음 회에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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