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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죽은 다음 날 <동아일보>는…

[근대 의료의 풍경·63] 이재명 vs 이완용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그 시절을 되새기고 성찰하는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완용 암살 기도 사건"에 대한 조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재명이 처형된 지 꼭 100년을 맞았던 지난 9월 30일, 어느 신문이나 방송도 그 일에 대해 보도하지 않았다.

"안중근 순국 100주년"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완용의 살해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건에 관련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13명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이재명이 대통령장, 김정익·오복원·전태선·김병록·조창호·이동수 등 6명이 독립장, 박태은·이응삼·이학필·김병현·김이걸 등 5명이 애국장, 김용문이 애족장을 받았다. 대체로 형량에 비례한 서훈인데, 7년형을 받은 김용문이 애족장을 받은 연유는 알 수 없다.

이들의 서훈 사실과 그 이유를 기록한 <독립 유공 포상자 공적 조서>(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바로 가기)에도 이들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심지어 이재명과 김이걸을 제외하고는 사망 연도도 적혀 있지 않으며, 이재명도 다만 "1910년 사망"으로만 되어 있다.

<공적 조서>와 다른 자료에서 활동이 확인되는 김용문, 조창호, 이동수, 이응삼, 이학필, 김이걸 등은 모두 출옥 후나 도피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조창호, 김용문, 이응삼은 대한민국 2년(1920년) 1월 1일 유동열(柳東說), 김구(金龜, 즉 金九), 이상룡(李相龍), 안창호(安昌浩) 등 만주와 중국 본토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31명이 연명으로 작성한 군자금 모집 문서인 "경고 급수 군비서(敬告急輸軍費書)"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 문서의 강령으로는 군사는 절대로 독립할 것, 일체 거둔 돈은 존중히 하여 정의 인도로 쓰일 것, 전쟁은 혈전으로 하되 독립을 위하여 분투할 것, 이 정신을 어기는 자는 적으로 대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 <독립 유공 포상자 공적 조서>(국가보훈처)에 나와 있는 이완용 암살 기도 사건 피고들의 활동 기록. 독립유공자 등에게 주어지는 건국훈장의 훈격(勳格)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순이다. 대체로 형량에 비례한 서훈인데, 7년형을 받은 김용문이 상대적으로 낮은 훈격을 받았다. 괄호 안의 설명은 그밖의 자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경고 급수 군비서(敬告急輸軍費書)"는 대한민국 2년(1920년) 1월 1일 만주와 중국 본토의 독립운동가 31명이 연명으로 작성한 군자금 모집 문서이다. ⓒ프레시안

일제는 조선의 "전근대적 고문"에 대해 멸시와 비방을 아끼지 않았고 "행형(行刑)의 근대화"를 지배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지만, 사실 일제의 "근대적 고문"의 잔인함과 악랄함은 그 이상이었다. 일제에 체포되어 온갖 고초를 겪고 몇 해 동안 지옥 같은 감옥 생활을 하고 난 뒤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보통 정신력과 의지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 사건 관련자들이 수감되었던 1910년대 무단 통치 기간 동안은 일제의 잔혹함이 더욱 극렬했다. 하지만 김구가 그러했듯이 "진정한" 독립운동가들은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더욱 단련되어 갔다. (김삼웅이 지은 <백범 김구 평전>에 의하면, 김구는 서대문 감옥에서 김용문과 오복원 등을 만났다고 한다.)

▲ "경고 급수 군비서(敬告急輸軍費書)"의 서명자 명단. 이 문서는 1920년 5월 11일 일본 육군성이 총리대신 하라(原敬)에게 보고한 "조선 소요 사건 관계 서류. 국외정보―경고급수군비서에 관한 건"에 실려 있다. 감옥살이를 마친 김용문과 이응삼이 체포되지 않았던 조창호와 만주(아마도 흑룡강성)에서 다시 만나 함께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프레시안

대한의원 학생이었던 오복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에 관한 1차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다만 "출옥 후 고향에서 정양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져 가족과 함께 속리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두산 백과사전>)라는 얘기가 있을 뿐이다.

대한의원의 "우등생"으로 체포 직전까지 학업에 열심이었던(제62회) 김용문은 출옥한 뒤 아예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나섰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과 군사 활동을 함께 한 김용문은, <독립 유공 포상자 공적 조서>에 의하면 중국 흑룡강성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군사 교육 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송강의원(松江醫院)을 개설했다고 한다.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했고, 따라서 일제가 주는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결국 의사로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 강점기, 의사와 독립운동가로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던 김용문에 대해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요청된다.

▲ <신태양> 1958년 9월호에 실린 김동산의 "이완용 암살 의거 수기." 김용문을 화자(話者)로 한 글이지만, 김용문 자신이 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글의 필자 김동산은 누구인가? ⓒ프레시안
그런데 김용문과 관련지을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가 하나 있다. <신태양> 1958년 9월호(256~269쪽)에 실린 "이완용 암살 의거 수기―나라를 위하여 죽는 몸이 어찌 유언이 있겠소"라는 제법 긴 글이 그것이다. 필자는 김동산(金東山)으로, 편집자 주(註)에 의하면, "기사년(1909년) 이완용을 필두로 한말 5대 역적 암살 획책을 기도한 비밀결사 14인 중에 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 단 한 분"이다. 수기를 읽어 보면 공판 기록 등과 차이 나는 점이 꽤 있지만, 이것이 김용문에 관한 이야기임은 쉽게 알 수 있다. 필자 김동산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술회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즉 필자 김동산이 김용문인 것이다.

우리는 이 수기에서 그 사건과 사건 관련자들의 행적에 대해,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많은 사실을 듣게 된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와 오복원은 어느 날 두 분(양한묵과 오상준)에게 우리의 비밀 결사를 설파하고 후원하여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랬더니 두 분은 일언지하에 크게 찬성하고 그 후부터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을 뿐 아니라 교주 손병희 씨에게 직접 데리고 가서 소개까지 하여 주었다." (259쪽)

"한편 나는 (거사 당일 이재명에게 이완용의 일정을 알려준 뒤) 학교에 나아갔으나 나의 머리 속에는 과연 이재명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로 꽉 차 버리었다. 그날 학교에는 병리학 시험이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갔으나 시험 문제가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 오후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뒤 과연 이완용이 칼을 맞고 죽었다는 소식이 학교에까지 들어왔다. 계속해서 의사와 간호부가 인력거를 타고 창황하게 학교 병원을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66쪽)

"백소사의 집을 나온 나는 다시 천도교당으로 올라갔다. 천도교 현 이사장인 양한묵 씨는 우리 동지들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장로요, 선배인 이 어른의 지도를 받자는 생각이었다. 중앙총본부에서는 벌써 이완용의 암살 소식을 듣고 술잔을 올리며 비분감개한 낯빛으로 국사를 개탄하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들은 기쁜 얼굴로 맞아주었다." (267쪽)

"나는 5년 징역을 마치고 출옥하고는 사상 동지 성욱환, 이기필 씨들과 동행하여 북만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오인성 여사가 길림(吉林)에서 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길림에 들러서 오 여사를 만났다. 몇 해 만에 허허 만주 벌판에서 기구한 운명들을 지니고 있는 서른 사람들이 서로 만나니 비참한 눈물이 없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목능(穆陵)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오 여사도 굳이 따라가겠노라고 하여 우리 일행은 오 여사와 함께 목능으로 갔다. 목능 구참(九站)에는 안중근 의사의 자당이 그의 계씨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269쪽)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열넷 동지들 중에 생존자로서는 오복원이 아직 대전에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 만나 보지는 못하였다." (269쪽)

과연 이 수기의 필자 김동산은 김용문일까? 꼼꼼히 읽으면 수기에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많이 눈에 뜨인다. 큰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실제와 차이나는 점이 대단히 많다. 이재명의 처형일이 이듬해 봄이라고 한 것, 거사 뒤 체포되지 않은 사람이 이동수 한 명이라고 한 점, 살해 대상은 다섯으로 이재명은 이완용, 김정익은 송병준, 이동수는 이용구, 조창호는 박제순, 전태선은 임선준을 각각 맡기로 했다는 것이 사실과 분명히 다른 것들 중의 일부이다.

위에 인용한 수기 내용들에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많다. 예컨대, 김용문이 이완용 암살에 관여했다는 극비 사실을 천도교 총본부의 많은 사람이 알고 김용문을 보자 환영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반면에 김용문이 달리기를 매우 잘했다는 얘기는 남이 쉽게 알기 어려운 것이다. (김용문은 대한의원 재학 시절 학교 대항 경주에서 상을 타는 등 달리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필자는 김동산이 김용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위에 언급한 사실들도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그 정도로 중요한 사실도 세월이 지나면서 기억이 퇴색되고 왜곡될 가능성은 있다. 가명을 오래 동안 사용하다 보면 자신의 원래 이름조차 잊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되어도, 기억력을 크게 상실하거나 장기간 격리되거나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잊어버리거나 잘못 기억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김용문, 오복원, 김병록이 평양 및 그 인근 출신이라는 점은 공판 기록과 다른 자료에서 일관되며, 이들이 일부러 고향과 주소를 사실과 다르게 얘기했을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다. 김용문과 오복원이 처음으로 이재명을 만나 알게 된 것도 1909년 여름 방학 때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지난 회에서 언급했듯이 이 사건 피고 모두가 평안도 출신이다. 그런데 김동산은 자신과 오복원, 김병록이 서울 출신이라고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이재명의 평양 사투리와 이동수(평북 출신)의 평양 특유의 기질에 대해서 낯선 듯이 묘사했다. 이것이 김동산과 김용문이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 게다가 김용문이 석방된 뒤에 만주에서 다시 만나 함께 활동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조창호가 거사 뒤 도피에 성공했던 사실을 김용문이 모른다는 점도 이해가 안 된다.

▲ 김용문(왼쪽)은 이재명, 오복원과 함께 찍은 사진(제62회) 중의 모습이며, 김동산의 사진은 <신태양> 1958년 9월호에 실린 것으로 그가 중국 망명 시에 찍은 것(가운데)과 수기 게재 무렵의 것(오른쪽)이라고 한다. 세 사진의 주인공은 동일 인물인가? ⓒ프레시안

▲ "오인성 제1회 신문 조서." 오인성이 나중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부의 주장과는 달리 그가 이재명의 부인이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프레시안
김동산과 김용문이 다른 사람이라면, 김동산은 누구이고(독립운동가 중에 김동산이라는 이름을 쓴 경우로는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사람이 있었다) 김용문은 어떻게 된 것일까? 김동산이 김용문을 직접 만나기는 한 것일까? 직접 만났는데도 김용문이 평안도 출신인 것을 몰랐거나 잊었을까?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앞에 인용한 김동산의 언급은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가? 김용문에 대한 향후의 심도 깊은 연구가 대답해 주리라 기대한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이완용(1858~1926년)은 68세까지 살았으니,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었던 당시로는 부귀영화와 함께 장수까지 누린 셈이다. "부자 되세요"가 지고지선의 목표인 요즘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복 받은 삶일 것이다. 이완용은 마음 한편에서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고 죽었을까?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엿새 뒤, <경성일보> 보도에 의하면, "사이토(齋藤實) 총독 등 13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극도의 애도 속에" 장례식이 열렸다. 일제 강점기 고종과 순종의 국장을 제외하고 조선인의 장례로는 가장 성대하고 장엄했다고 한다.

▲ <경성일보> 1926년 2월 19일자. 그 전날 열린 이완용의 장례식이 "사이토(齋藤實) 총독 등 1300여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극도의 애도 속에" 열렸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전라북도 익산의 이완용 무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공격과 도굴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0여 년이 지난 1979년 후손들이 무덤을 파묘(破墓)했다. ⓒ프레시안

<동아일보>는 이완용이 죽은 다음 날인 2월 13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설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를 게재했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 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 이것이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 (…)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지! (이완용은 월급 100원이 희귀했던 시절에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긴 공으로 300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앙탈하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이완용에 대해 한껏 야유한,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될 것이다.

▲ <동아일보> 1926년 2월 13일자 사설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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