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측이 붙인 사건 제목은 "이완용 모살 미수 사건"으로 처음에는 "박원문 살해"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모살 미수"만으로는 이재명을 처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는 인력거꾼(아마도 경호원) 박원문이 살해된 것을 끌어들였던 것이다(제60회). 그러나 박원문을 살해한 것에도 고의성은 없었기 때문에 애당초 처형은 무리한 것이었다. 결국 재판은 법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귀결되었다. 이재명 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생명을 받치기로 각오한 거사였지만, 그에 대해 일제와 친일파들은 보복으로 답했다.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은 이재명은 1905년 무렵 노동 이민 모집에 지원하여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생활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간 이재명은 안창호(安昌浩, 1878~1938년)가 조직한 공립협회에 가입했으며 그때부터 민족의식이 더욱 투철해졌다고 한다. 1907년 7월 헤이그에 국왕 고종의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준이 그곳에서 분사(憤死)한 소식을 듣게 된 이재명은 자신이 침략 원흉과 친일파 매국적들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가을 귀국했다.
대한의원 학생 오복원(吳復元)과 김용문(金龍文)은 1909년 여름 방학 때 고향인 평양으로 내려갔다가 이재명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재명이 미국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김병록(金丙錄)을 제외하고는 이 사건 피고들 중 가장 처음으로 이재명과 접촉한 인물들이었다.
이후 더 많은 동조자를 규합하며 기회를 엿보던 이재명은 한때 자신이 척결하려던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안중근에 의해 처단되자 11월 하순경 이완용과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년)를 척살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일제가 사건 발생 뒤 천도교 관계자들을 특히 주목했던 것은 한때 동학의 주요 간부였던 이용구가 살해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이완용 모살 미수 사건으로 기소된 13명. 전태선을 제외하면 이들의 나이는 평균 23.3세였다. 그리고 이동수 외에는 모두 평양 또는 그 인근 출신이었다. 이동수도 평안북도 출신이므로 이들은 모두 평안도 사람이었다. 종교는 기독교도가 7명, 천도교도가 2명이었다. ⓒ프레시안 |
▲ <동아일보> 1924년 10월 20일자. 이완용 암살 사건에 가담했던 이동수가 무려 만 15년 만에 체포되었다는 기사이다. 이동수는 단순히 도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완용의 목숨을 노렸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동수가 초지일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재명에 대한 의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동수의 재판은 공안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비공개로 열렸다. 하지만 이동수는 범행이 미수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1910년의 이재명에 대한 판결이 얼마나 과도한 것이었는지 일제 법원도 자인한 셈이었다. ⓒ프레시안 |
▲ "이재명 사건 판결문." 이재명은 교수형, 오복원은 징역 10년, 김용문은 징역 7년 등 형량이 적혀 있다. ⓒ프레시안 |
한편, 김용문의 임무는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정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이완용이 사건 당일 명동 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탐지한 것도 김용문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을 보면, 김용문은 12월 22일 아침 이재명의 숙소로 가서 <대한매일신보> 기사에서 알아낸 이완용의 당일 일정을 알려준 뒤 학기말 시험을 보러 학교로 갔다. 이렇게 "우등생"(제56회) 김용문은 체포되기 직전까지 학업에 충실했던 것 같다. 반면에 오복원은 적어도 11월경부터는 의학 공부보다는 천도교 포교 일에 더 열심이었다. 오복원이 거사 사실을 천도교 지도부에 (얼마나) 알리고 상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왼쪽부터 오복원, 이재명. 김용문이다. 이들이 처음 알게 된 1909년 여름부터 12월 사이에 찍은 사진으로 이들의 복장, 그리고 오복원과 김용문의 각모에 흰색 덮개가 씌워진 것으로 보아 여름철에 가까운 때로 여겨진다. 맨 오른쪽 인물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사건 관련자일 것이다. ⓒ프레시안 |
▲ <황성신문> 1910년 7월 24일자. 대한의원 부원장 다카카이(高階經本)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행한 훈시가 보도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환영 행사 참석 거부 사건, 이완용 모살 미수 사건 등의 전력으로 대한의원 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일제의 경계 대상이었을 것이다. ⓒ프레시안 |
"본교 학생의 성적이 본교에 대하여는 양호하나 정치 사회에 관한 정도에는 혹 불온한 점도 있어 매양 타인의 주목을 면치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새로 데라우치(寺內) 통감이 도임(到任)하면 여름 방학 기간 안에 합방(合邦) 같은 중요 문제가 있을 듯하니 학생 제군은 십분 주의하여 정치 관계에는 관여(參涉)하지 말라."
▲ <황성신문> 1909년 4월 17일자. 오복원이 황성신문사 신진부(新進部)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진부는 청년부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복원은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오복원뿐만 아니라 많은 대한의원 학생들이 그러했다. ⓒ프레시안 |
이재명 등 13명에 대한 경성지방재판소의 1심 판결은 1910년 5월 18일에 내려졌고 형량은 앞에서 본 표와 같았다. 그리고 김정익, 이동수, 조창호, 이학필 등을 제외한 9명이 항소했지만 7월 12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으로부터 기각 판결을 받았고, 9월 15일에는 이재명과 김병현이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재명이 상급심에 항소하지 않았다는 일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상고 기각 판결로 형이 확정된 지 보름 만인 1910년 9월 30일 즉 꼭 100년 전 오늘, 이재명은 서대문감옥소 교수대에서 스물셋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흔히 이재명의 "순국" 날짜를 9월 13일로 말하고 있지만(필자도 제39회에서 그렇게 언급했다) 9월 30일이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총독부 관보> 10월 4일자에, 이재명의 사형 집행일이 9월 30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등법원 판결일이 9월 15일인 점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재명이 처형된 뒤 시신 수습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 부인 오인성(吳仁星)에게 인도했다는 기록도 없다. 안중근처럼 이재명의 시신도 일제가 마음대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많다. 1999년 11월 서울시가 명동성당 앞에 세운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석"만 외롭게 서 있을 따름이다.
▲ 명동성당 정문 왼쪽(동쪽)에 세워져 있는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석.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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