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시장을 지낸 아버지는 왕을 죽이는 재판정 배석판사였다. 그런데 정작 사형 집행장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남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정치에는 손도 안 대고 그저 "내면의 빛"을 찾겠다며 종교에 몰두했을 뿐인데, 정작 감옥은 아들이 더 많이 드나들었다. 역사는 가끔 이렇게 짓궂은 대비를 만들어 놓고 구경한다.
시장 아버지, 반역자로 죽다
아버지 아이작 페닝턴(Isaac Penington the elder, 1584~1661)은 생선장수 집안 출신으로 포도주와 옷감무역, 양조업으로 재산을 모은 뒤 정계에 진출했다. 1638년 런던 참사위원(alderman)이 됐고 1642년에는 런던시장 자리까지 올랐다. 참사회원은 런던시의 오래된 행정구역인 워드(ward)마다 한 명씩 뽑던 종신직 시의회 참사위원을 가리키는데, 시장(Lord Mayor) 바로 아래 서열로 시의 재정과 사법업무에 실권을 쥔 자리였다. 지금으로 치면 구청장급이라기보다는 시의회 상임위원에 더 가깝다. 그는 의회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며 왕당파에 맞설 전쟁자금을 대규모로 조달했고, 한때는 런던탑의 관리책임자 자리까지 맡아 대주교 처형현장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다 찰스 1세 재판의 특별법정 위원으로 지명됐다. 흥미로운 건 여기서 부터다. 그는 법정에는 매일 출석했지만, 사형집행 영장에 서명하는 것만은 끝까지 거부했다. 왕정이 복고된 뒤 그는 바로 이 점을 내세워 관용을 구걸했다. "나는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적이 없다. 서명을 그렇게 종용받았어도 끝내 하지 않았다"고 항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재판정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공모"라는 논리로 반역죄가 선고됐고,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런던탑에 갇힌 채 처형되기도 전에 옥사했다. 서명 하나 안 했다고 죄가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목숨으로 배웠다.
아들, 감옥에서 진짜 자유를 찾다
아들 아이작 페닝턴(Isaac Penington, 1616~1679)은 아버지와 전혀 다른 길을 골랐다. 엄격한 청교도 가정에서 자라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했지만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형식뿐인 종교에 신물을 내며 오랫동안 "구도자"로 방황했다. 이 시기 그는 짙은 영적 어둠을 겪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겼는데, "나는 마침내 씨앗을 만났다. 그 말의 뜻을 알게 되면 더는 헤매지 않으리라"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 방황 끝에 1650년대 후반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의 설교를 듣고서야 비로소 퀘이커가 됐다.
이때 이미 그의 곁에는 메리 페닝턴(Mary Penington, 1625~1682)이 있었다. 군인이었던 첫 남편을 병으로 잃고 어린 딸까지 둔 과부였는데, 1654년 재혼한 뒤 함께 퀘이커의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의 집은 한때 화려한 저택이었지만, 개종 이후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웃과 친척들은 발길을 끊었고, 예배모임에 가던 길에는 돌팔매질까지 당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반역죄로 얽혀 집까지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투옥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1660년부터 1670년까지 십 년 사이 여섯 번 갇혔는데, 죄목이 하나같이 대단치 않았다. 귀족에게 "각하"라는 존칭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홉 달을 갇혔고, 풀려난 지 삼 주 만에 다시 붙잡혀 이번엔 열여덟 달을 감옥에서 보냈다. 심지어 퀘이커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달을 갇힌 적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감옥에서마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자신을 괴롭히는 간수들에게조차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글은 점점 정치적 색채를 띠었다. 왕과 의회를 향해 "최근 내전에서 신이 정부를 뒤엎고 미천한 자들에게 힘을 실어준 적이 있으니, 또 그런 일이 없으리라 장담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양심으로 지킬 수 없는 법을 강제할 권리가 정부에 있는가"라고 정면으로 물었다.
가정교사, 사위, 그리고 이어지는 인연
페닝턴 부부의 집은 퀘이커들의 사랑방이었다.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들인 청년이 토머스 엘우드(Thomas Ellwood, 1639~1713)였고, 메리의 전남편 소생 딸 굴리엘마 스프링엣(Gulielma Springett, 1644~1694)은 1672년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과 결혼했다. 그 윌리엄 펜이 훗날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운 바로 그 인물이다. 아이작 페닝턴은 몰수와 투옥을 반복하다 건강을 크게 해쳤지만, 이 결혼식만은 지켜볼 수 있었다. 감옥을 들락거리던 작은 신념 공동체 하나가 대서양 건너 한 지역의 씨앗이 됐으니, 역사의 인연이란 참 얄궂다.
오늘 한국에 남기는 물음
이 부자의 이야기를 지금 한국에 견줘 보면 여러 물음이 떠오른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사회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거나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여럿 들었다. 아버지 페닝턴의 최후는 이런 변명이 역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준다. 서명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자체가 이미 책임이었다.
반대로 아들 페닝턴은 권력도 없고 무기도 없이, 그저 존칭 하나 거부하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섯 번 갇혔다. 그런데도 그 감옥살이는 시대를 바꾸는 씨앗이 됐다. 지금 한국에서도 내란에 부역한 이들의 책임을 끝까지 묻는 일과, 아무 힘없이도 양심을 지킨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은 함께 가야 한다. 가해의 책임에는 소멸시효가 없고, 저항의 기록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아버지처럼 권력의 심장부에 앉았던 이는 그 자리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고, 아들처럼 변두리에서 신념 하나로 버틴 이는 반드시 기억돼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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