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4>
모색
내가 2년 반을 요양한 시립 서대문병원은 서울 역촌동 벌판 뒤켠의 높은 언덕 위에 있다. 큰길이 있는 포수마을에서 걸어 들어가려면 한참 걸리고 힘도 꽤 드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후배들은 나를 면회하기 위해 그 비탈진 언덕길을 허덕이며 허덕이며 올라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3>
영화
내가 정한 영화 제목은 '태인전쟁'(泰仁戰爭)이고 그가 정한 영화 제목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였다. 그가 나보다 더 시적(詩的)이었다.테마는 '일본군 총알에 뚫어진 동학군의 궁궁(弓弓) 부적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서'였다. 1894년 당시 동학(東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2>
공부
그때는 라디오에,리시버를 꽂고 라디오에 의지해 살았지.남한의 연속극 외에 북한방송도 들었고 베이징(北京)의 한국말 방송도 들었지.그렇지.북한방송은 세 가지를 연속해서 들었지.남한 이야기를 남한 출신 학교 교사를 통해 짚어나가는 '인민속에서'와 김일성 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1>
첫여름
매일 끊임없이 누워서 안정하다 보니 라디오가 친구였다. 낮이나 밤이나 뉴스 아니면 연속극. 그 무렵 한 연속극 주제가가 잊히지 않는다. 문주란의 목소리.'꽃이파리 숙어지고새잎새가 푸르르던호젖한 오솔길에훈풍은 분다아, 첫여름, 첫여름에다시 만난 그 사람그러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0>
봄
'기흉'(氣胸)이었다.기흉은 기관지에 구멍이 뚫려 숨을 들이쉴 때 기관지를 통해 폐포와 늑막 사이에 공기가 들어차면서 그 판막문이 닫혀 숨을 내쉴 때 공기가 제대로 못나오는 것. 그래서 폐와 늑막 사이에 공기가 가득 차 숨이 가쁘고 심한 압박을 느끼다가 결국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9>
오윤(吳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캄캄한 겨울밤, 나는 수유리 쌍문동에 있는 미술대학생 오윤의 집, 소설가 오영수(吳永壽) 선생 댁으로 가고 있었다. 버스도 끊어져 없는 수유리 돌개울을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 서너걸음에 한번씩은 멈춰서서 숨을 갈아쉬며 피가래를 뱉으며 조금씩 조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8>
졸업
악어 형이 어떤 정확한 통로로 해서 정보부와 경찰에 알아본 결과 내 사건은 이미 지난 초겨울에 종결되었고 더는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나는 대학가에 모습을 드러냈다.원주에 다녀오고 친구들을 만났다.그리고 마지막 학기 등록을 마쳤다.나는 1966년 여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7>
남상(濫觴)
민족문화운동의 남상은 언제부터였을까.4·19 직후 최창봉(崔彰鳳) 선생이 내게 건넨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론 장래에 연극배우나 연출가가 되겠다는 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연극에는 참가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공부와 삶의 지루함에서 탈출시켰기 때문일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6>
답십리
원주의 청강 선생과 연락이 되었다. 악어 형을 통해서였다. 형의 친척동생인 정현기 형의 답십리 장한평 집에 가 피신할 수 있게 되었다. 정형은 지금 문학평론가로서 연세대 교수다. 지금은 어찌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곳이 아주 시골과 흡사했다. 너른 벌판에 뚝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5>
선언문
김중태형 등의 제 일선이 무너졌다.나·박재일·송철원·최혜성형 등이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제 2선언문을 작성했다. 그때 우리가 참고로 한 여러 문건(文件) 중 과거 코민테른의 국제공산주의운동선언문 한 쪽이 있었는데 그 중에 이런 표현이 보였다.'이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