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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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4>
나폴레옹 꼬냑
김영수의 '혈맥' 연출을 부탁받고 나는 소원했던 대로 전업적인 학생극 연출가의 첫 걸음을 떼었다. '혈맥'은 정통 리얼리즘 연극이다. 따라서 등·퇴장만이 아니라 연기자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무대미술·효과·조명까지도 극도의 세심한 배려를 요구했다.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3>
등단(登壇)
나는 고등학교 때 문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시를 쓰고 졸업한 뒤에도 썼다. 늘 써왔지만 웬일인지 전업적(專業的)인 시인(詩人)이 되리라는 생각은 한번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되고였다.그런데 학생시절에는 순전히 조동일 학형 때문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2>
현실동인선언
오 윤·임세택·오경환·강명희.이 네사람으로 구성된 '현실동인'(現實同人)의 그 '선언'(宣言)은 사실 서구적 미학 개념으로서의 리얼리즘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혹시는 멕시코 리얼리즘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무렵 젊은 우리에게는 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1>
쓰레기 위에 詩를!
그 무렵 내가 자주 어울린 선배와 친구들은 김윤수(金潤洙) 형님과 염무웅(廉武雄) 형, 그리고 시인 이성부(李盛夫) 형과 오숙희(吳淑姬) 선배, 또 오선배의 그림 그리는 후배나 친구들이었다. 예술이나 민족통일, 특히 서구 근대주의와 우리의 처지 사이에 나타나는 여러 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50>
마케팅
아버지의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더욱이 정밀한 회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혈압이 높아졌다. 나도 벌어야 했다. 나는 김정남(金正男) 형이 소개하는 마케팅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정남 형과 함께 취직했다. 사장은 '장만기'라는 젊은 사람이었다.마케팅에 관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9>
악어형
악어(鰐魚)형(兄) 한기호 선배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한 마리 크낙한 악어를 떠올리게 된다. 거기에 우스운 소리라도 들으면 큰소리로 홍소(洪笑)를 터뜨린 뒤 그 웃음이 슬며시 미소로 바뀌면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다. 영어에 'Crocodile teers(악어의 눈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8>
진달래 필 때까지
요양원에는 슬픈 유행어가 하나 있었다.'진달래 필 때까지'.장기적인 폐결핵 환자들은 대각혈로 질식해 죽는 것이 대다수다. 그런데 그 대각혈이 오는 것이 대개 진달래 피기 직전 무렵 하늬바람 불고 날씨 쌩고름한, 또 불두덩 아래는 후끈후끈한 그런 2월 하순 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7>
스테이션 러브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원이 집무하거나 주재하는 방을 일러 '스테이션'이라고 한다. 나는 2년 반에서 3년 사이의 그 길고 지루한 시간에 두 사람의 간호원과 연애 아닌 연애를 한 일이 있다. 그래서 '스테이션 러브'라는 말을 써봤다.그날의 담당 간호원이 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6>
김신조
그 날 역촌동 병원은 벌집 쑤신 듯했다.총검을 든 군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북으로부터 침투한 게릴라들을 이 잡듯 쥐 잡듯 소 잡듯 잡으러 다니는 난리를 떨었다.내가 입원해 있던 제일 높은 언덕의 제5병동까지 올라와 샅샅이 뒤지고 두리번거렸다. 총소리가 북한산과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5>
주선생(朱先生)
한 병실 바로 내 건너편 침대에 주선생(朱先生)이라는 분이 입원해 있었다. 전라도 사람인데 내게 조금씩 접근해 와서 냉정하게 검토해 보니 과거에 혹은 현재까지도 좌익, 그러나 필시 자기 집안의 누군가가 좌익을 했기 때문에 수렴 현상으로 함께 어울리다 슬그머니 좌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