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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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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3>

영화

내가 정한 영화 제목은 '태인전쟁'(泰仁戰爭)이고 그가 정한 영화 제목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였다. 그가 나보다 더 시적(詩的)이었다.

테마는 '일본군 총알에 뚫어진 동학군의 궁궁(弓弓) 부적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서'였다. 1894년 당시 동학(東學)에서는 그 어떤 총알도 대포알도 동학의 '궁궁' 부적을 뚫을 수 없다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믿음으로 앙양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장에 나가는 신도나 농민들은 누구나 왼쪽 어깨에 궁궁 부적을 써 붙였다. 최수운(催水雲) 선생이 하늘의 상제(上帝)로부터 계시(啓示)와 함께 내림받은 생명(生命)의 영약(靈藥)인 궁궁 부적은 그만큼 신령하고 강력한 것이었다.

주인공 민(敏)도 이것을 확고히 믿어 부적을 어깨에 붙이고 마지막 전투인 태인(泰仁)전투에 참가한다. 그리고 패배한다. 시체가 산더미를 이룬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알이 주인공 왼쪽 어깨에 붙인 부적 한복판을 관통해 버리고 만다.

주인공 민은 이같은 현실의 숨겨진 뜻을 알 수 없다. 주인공은 거의 치명적인 관통상을 입고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동학 입도의 큰 혼란과 절망 속에서, 안내자였던 무당인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집에 가려고 사흘 동안 몸부림치며 기고 또 뛴다. 그러나 막상 집에 도착했을 때는 도륙당한 어머니의 시체만이 그를 맞이한다.

주인공은 집으로 가는 과정에서, 집에서, 동구앞 숲속의 상여간에서 수많은 동지들의 죽음과 그 죽음에 임하는 동지들의 살아 생동하는 외침 등의 경험을 통해 제3세계 약소민족의 새로운 삶의 길과 세계 변혁의 메시지가 품고 있는 '활인기'(活人機)로서의 정신주의(精神主義)는 일본군이 대표하는 낡은 물질문명과 무자비한 제국주의 군사무기의 '살인기'(殺人機) 앞에 현실적으로, 그리고 당대적으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하고도 슬픈 숙명, 그 역사적 한계와 동학 전개의 사회적 상황미숙 등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어디에도 이 비극적 최후를 회피할 수 있는 길이 없음을 마침내 깨닫고 불연(不然, 아니다), 오직 이 절벽과도 같은 역사·사회적 숙명의 한계 안에 갇혀 이미 죽었고 또 지금 죽어가는 동지들과의 저 장렬하고 거룩한 또 하나의 삶, 그 현실적 죽음을 함께 공유하는 슬픔, 사랑, 즉 생사를 넘어서고 이승 저승을 뛰어넘는 지극한 '모심'(侍)의 길(其然, 그렇다)밖에 남아있지 않음을 절감한다(其然不然, 그렇다·아니다).

그는 중간에 만난 이상한 소년으로부터 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라는 슬픈 민요를 부르면서 석양으로 붉게 물드는 저녁 하늘 동학군 환각, 천군만마 모양으로 진군하는 저 거대한 저녁 구름의 환각에 빠진 채 자기가 떠나온 태인의 전장, 그 노을진 싸움터, 죽임과 죽음의 자리로 되돌아가 동지들의 시체 사이로 기어 들어간다. 들어가 이윽고 그 사이에 기일게 몸을 누인다.

하늘을 날며 새로운 송장의 고기를 노리던 독수리가 고공(高空)에서 수직으로 하강한다.

"아―!"
하는 돌연한 외침이 공기를 끊어 가르고 드디어 사흘 동안 손 안에 쥐고 놓지 않았던 비극의 매듭, 수수께끼의 실체인, 그 총알에 뚫어진 피묻은 부적이, 펼쳐지는 손가락 사이에서 이윽고 천천히 빠져나와 가랑잎처럼 굴러 추운 늦가을의 송장 더미더미 죽음의 터전을 지나 바람에 흩날려 멀리멀리 사라진다. 수많은 들개들이 짖어대고 송장을 파먹는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울부짖는 잔혹한 죽음의 소리가 점점 높아지면서 어둠속으로 화면은 '디졸브'한다.

나의 시(詩), '황톳길'의 테마는 바로 이 '태인전쟁'의 또 다른 압축이다. 패배와 죽임의 역사적 필연을 예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심'의 지극히 거룩한 마음으로 싸움에 참가하는 민중의 내면적 삶의 생성 사이에서 드러난 '불연기연'(不然其然, 아니다·그렇다)의 모순어법 안에 상생과 상극의 상호 보완성은 이미 깃들어 있다는 말을 여기서 하고 싶다.

이것이 동학 용어로는 '아니다'를 '그렇다'와 함께 인식하는 대전환, 지난 '아니다'를 깨달음, 즉 '그렇다'인 '각비'(覺非)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말로 하자면 '흰그늘'이겠다.

나의 경개(梗槪)는 길종(吉鍾·하길종 감독)에 의해 시나리오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의 돌연한 죽음 때문에 영화로 실현되지 못한 채 동학의 뭇 원혼(寃魂)들과 함께 지금도 울며 울며 구천(九天)을 떠돌고 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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