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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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4>
여장부들
학생운동 전면에 이화여대가 돌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인지 독일인지 한 신문에 최루탄 연기 속에서 시위하는 여대생 집단의 커다란 사진을 싣고 '좌익학생들'이라는 제목을 달게 한 것은 바로 이화여대 학생들이었다. 그만큼 활발했다.그 리더의 한 사람인 법과대학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3>
전선(戰線)
한일조약비준반대운동(韓日條約批准反對運動)은 거대한 전선(戰線)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학생(學生) 측의 김중태 (金重泰) 형과 정당 쪽의 윤보선(尹潽善) 대통령 간의 연대가 그 중심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두 개의 힘이 가세(加勢)했다. 하나는 장준하(張俊河)·백기완(白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2>
청강(靑江)
1965년 초여름 언젠가 원주(原州)에서 감옥에서 출옥한 지 불과 몇달이 안되는 장일순(張壹淳)선생을 만나 술과 밥을 먹은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이미 한일조약(韓日條約)의 국회비준(國會批准)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시작된 뒤이다. 분명 시간적으로 뒤인데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1>
최한기(崔漢綺)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에 대해서 알아?" "몰라"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는 알아?" "몰라!" "그러면 황진이(黃眞伊)는 알아?" "알아?" "황진이(黃眞伊)의 스승이 누구야?" "그야 화담(花潭)이지, 서경덕(徐敬德)이지, 물론!"이제 됐다."그럼 화담부터 시작하자고! 우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30>
청맥(靑脈)
'청맥'(靑脈)이라는 민족주의 잡지가 그때 있었다. 문리대 선배인 김질락·이문규씨가 발행하고 송복·구동태·심재주 씨 등이 편집하는 새로 생긴 진보적 민족주의 잡지였다. 나중에는 그것이 평양에 의해 만들어진 남한 내의 '통일혁명당' 조직의 전위 기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9>
사상
아이들이 장난하며 노는 한 놀이가 있다. 하나가 제 눈을 가리고 한군데에 서서 "어디까지 갔나?"하면 다른 하나가 저만큼에서 "방문까지 왔다." 또 묻는다. "어디까지 갔나?" "마루까지 왔다." 또 묻는다. "어디까지 갔나?" 이번엔 거짓말로 답하여 "학교까지 왔다." 해버린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8>
박재일(朴才一)
그해 겨울이다. 그러니까 1964년과 65년 사이의 그 겨울. 지금 생각나는 것은 외우(畏友) 박재일(朴才一) 형이 고향 경북(慶北) 영덕(盈德)에서 장가가던 일뿐이다. 구식 결혼이어서 나와 김중태·최혜성·김도현형 등이 신랑 후배(後輩)를 서려 영덕으로 내려갔다. 영덕대게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7>
김기팔(金起八)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가족 외에 처음 만난 것은 아마 김기팔 형일 것이다. 술자리였는데 최불암 형도 함께했는지 모르겠다. 아주 가까운, 그리고 오래 된 술친구들이니까. 명색은 나를 위로한다는 술자리, 그러나 김기팔형 표현대로 '러시안 제스처'였다. 러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6>
첫미소
나의 첫 감옥 체험을 형상화한 네편의 시를 따라가며 기억을 정리한다.노을녘, 수리떼 떠도는 초여름의 옛 戰場에 돌아왔다. 한자루의 보습을 메고 흙 속에 묻히고 이미 바람에 흩어지고 수리의 밥이 되고 뜻모를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러나 아직도 날카롭게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5>
계엄령
‘계엄령’이라는 알베르 까뮈의 작품이 있다. 다 읽고난 느낌은 ‘상황’이 주인공이라는 것. 그것이 지나쳐, 하긴 지나칠 만도 하지만, 종교의 신(神) 대신에 실존적인 신(神), 즉 ‘신적(神的)인 것’이 되었다는 나의 독후감이다. 그 날 오후, 방송반의 후배 참모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