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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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4>
6ㆍ3으로 가는 길
5월 25일이던가 28일이던가, 일요일이어서 등교한 학생들도 별로 없었는데 20여명이 먼저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머리엔 흰 띄를 두르고 검은 작업복이나 교복 차림으로 가마니 위에 모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통해 방송반이 모든 의사표시를 하고 있었다.정문 밖과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3>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5월 20일이었다.당시 박정희와 김종필이 내건 정치이념이란 허명(虛名)은 ‘민족적 민주주의’란 것이었다. 우리들이 지향하는 민중 주체의 민족주의, 민중민족혁명의 이념을 도용(盜用)한 것이 분명했다. 말인즉슨 유럽이나 미국식 민주주의는 민도(民度)가 낮아서 아직 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2>
최루탄 문학
원주에서 나는 매일 밤, 매일 낮 바로 그 선교사 ‘이발소의 땅’으로 갔다. 가서 속으로 서투르나마 기도했다. 조국과 나를 위해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조동일에게서 원주로 소식이 왔다. 상경(上京)하라는거였다. 반가워 쏜살같이 올라왔더니 대학가는 거의 매일 데모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1>
화형(火刑)
‘3.24 제국주의자 화형식(火刑式)’을 보고 있었다. 그 날 나는 도서관 밑 숲속에 앉아 정문 안쪽에서 고장난 책상다리 등을 모아다 불질러 일본 제국주의자의 허수아비를 태우는 동료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김중태가 연설을 했다.과연 그는 웅변가였다.여기저기서 플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0>
성병
요절(夭絶)한 영화감독 하길종(河吉鍾)을 기억할 것이다. 문리대 불문과를 나와 도미(渡美)하여 UCLA에서 ‘대부(代父)’의 프란시스 코폴라와 함께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을 기억하는 사람도 아직은 많을 것이다.그의 ‘화분(花粉)’, ‘한네의 승천’, ‘병태와 영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9>
그 겨울
1963년 겨울.그 겨울 나는 원주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 겨울 나는 원주의 한 다방에서 시화전(詩畵展)을 열었다. 현실과 몽상,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미래에의 판타지, 모더니스트적이거나 슈르적(的)인 것과 민족적이고 민요적인 것이, 국가적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8>
미국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무엇일까?이 질문 이상 바보소리가 없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치고 바보소리 아닌 것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존재다. 그러나 그 때 그 무렵 우리들 사이에서 미국은 누구나 잘 알 듯이 신식민주의, 패권주의, 제국주의 종주국이었고, 6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7>
광주공민학교
목포에서 서울로 돌아온 것은, 햇볕은 따갑고 그늘은 추운 초가을, 토용(土用)의 계절이었다. 학교에 들려보니 조동일형이 사방으로 나를 찾고 있었다.그때 서울대 선후배 등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인 민족주의 그룹이 경기도 광주의 한 시골마을에 농촌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6>
황톳길
남도의 황토빛은 누른빛이 아니다. 그것은 핏빛이라 해야 옳다. 강변으로 난 그 핏빛 길을 따라 화당으로, 부줏머리로, 오감리로, 상리로 며칠을 일삼아 십리나 이십리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호풍이네 과수원 너머 갓바위, 그 밑에서 물결치는 푸른 물에 출몰하는 돌고래떼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15>
순애고모
연동에 있던 그 무렵 한밤에 공사판 근처의 포장마차에 갔던 적이 있다. 거기, 바로 거기서 오빠가 경찰에게 맞아죽은 충격으로 6ㆍ25때 좌익을 하다가 후퇴 때에 백아산에 입산했다는 아득한 소문만 떠돌던 순애고모가, 그래, 틀림없는 순애고모였다! 한 경찰관의 첩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