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4>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44>

모색

내가 2년 반을 요양한 시립 서대문병원은 서울 역촌동 벌판 뒤켠의 높은 언덕 위에 있다. 큰길이 있는 포수마을에서 걸어 들어가려면 한참 걸리고 힘도 꽤 드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후배들은 나를 면회하기 위해 그 비탈진 언덕길을 허덕이며 허덕이며 올라오곤 했다.

아마도 나의 폐결핵 치유는 부모님은 물론이지만 도리어 내 벗들의 우정에 더 많이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지금도 한결같다. 언덕 위 숲속에 묘지들이 있고 묘지 앞에는 '만력(萬歷)…년(年)' '내시부(內侍府) 아무개'의 비석(碑石)이 여기 저기 널려 있다.

고자들이다.
나도 이제는 고자.

생물학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역시 불알 잘린 한 외로운 고자다. 아마도 생각과 말만으로라도 '사기'(史記) 몇 권은 써야 할 것이었다. 초기에 나와 벗들은 그 돌비석 사이 사이 풀밭에 그대로 몇시간이고 앉아 '모색'을 계속했다.

'통일혁명당' 사건은 급진좌익들 외에도 수많은 젊은 구도자(求道者)와 온건한 모색자(摸索者), 진정한 진리의 길을 가려 하던 수많은 동지와 벗들을 위축시켜 단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크게 마비시켰다.

전 사회가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색'을 계속했다. 매판경제에 대한 비판과 총통제 음모에 대한 민주주의 운동의 고양, 그리고 앞으로의 종교의 역할에 관해 참으로 신선한 논의를 제기해가며 '모색'을 계속했다.

베트남 트리 쾅 스님의 혁명적 사원(寺院)에 관한 상찬(賞讚)과 남미(南美)에서 총을 든 채 사살당해 민중을 침묵으로부터 분기시킨 카밀로 토레스의 혁명적 가톨릭에의 깊은 관심과 함께 종교(宗敎)가 이미 아편(阿片)이기를 그만두고 있다는 점에 모두 동의했다.

"포섭합시다. 기독교든 가톨릭이든 불교든 뭐든 다 통일전선으로 포섭합시다."

내가 여기에 못을 쳤다.
"포섭이라는 말을 사용할 단계나 차원이 아니다. 새로운 싸움의 전술과 새로운 전략은 새로운 이념을 만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새로운 전략이 종교 우회라면 새로운 이념은 뭡니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 종교적 영성의 결합이 되겠지만…."

"그게 뭐라는 말입니까? 잡탕 비빔밥 아니오? 유물변증법은 현대에 관한 한 불멸의 진리입니다. 이 과학과 실증의 시대에 신비주의라니요?"
"우리는 물질이나 육체나 감각이라는 감성(感性)과 신학적(神學的) 사고(思考)를 진행하는 이성(理性)으로 인간을 재단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그밖에 종교적 환희나 신비적 세계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영성(靈性)이라는 것을 너무 무시해 왔다.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유물론은 이 세 범주 중 한 범주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라는 말입니까?"
"포기가 아니라 한 단면으로 축소하는 대전환이지. 그 장점은 그대로 갖고 그 위에 새로운 창조를 모색해야 한다."

"선례(先例)가 없지 않습니까?"
"동학(東學)이 있지 않은가! 또 지금 세계의 어떤 곳에서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고…."

어떤 후배 한 사람은 내게 올 때마다 꼭 새빨간 사과 한 알을 갖고 왔다.
"무슨 깊은 뜻이 있나?"
"혁명의 상징입니다."

이 상징주의자에게는 마르크스주의적 설법(說法)만이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나 역시 그런 용어, 유물론과 변증법을 사용하면서도 아직은 감추어진 동양철학이나 민족적 고유사상과의 창조적 관계에 대한 철학적 준비를 잊지 말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다.

여러 후배들이 중국의 문화혁명과 프랑스의 문화혁명에 관해 물었고 나는 거기에 동서 사상의 융합에 의한 인류문화의 전면적 개혁이라는, 아직은 모호한 문명론적 대안을 말하며 그 조짐으로서의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의 바탕과 방향 및 내용을 분석, 해석해주기도 했다.

한 동료는 나와의 두 세 시간이 끝나면 반드시 춤추듯 뛰면서 언덕을 내려가곤 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자네 구라는 촉매에 불과해!
그 촉매 때문이기는 하지만 내 속에 잠자던 새 길이 스스로 환히 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춤추고 웃는 거야!"

나는, 우쭐했던 나는 그 말에 풀이 죽어 한동안 또 다시 고자가 돼버렸다.

이름이 '김주호'였나? 그 선배 환자가 사 두고 그냥 무료할 때 매일 한번씩 들르거나 사람이 찾아올 때 만나기 위해 사용하던 자그마한 흙집에서 나는 그들을 만났다. 나는 거기서 많은 말을 했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숱한 실험적 대안을 말했으나,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당대 상황의 인식과 그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대응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한때 청와대의 교육문화수석비서까지 했던 김정남(金正男) 형은 '불꽃회'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검거되어 혼이 난 뒤 또 그 비슷한 일이 있어 몸을 감추고 리어카로 채소장사를 하며 1주, 2주만에 한번씩 붕어빵을 사가지고 오기도 했고 문리대의 유명한 투사였던 손정박 형은 그 무렵 적발되어 검거와해된 지하의 '인민해방전략당'에 연루되어 도망다닐 때 내게 들러 절망과 고통을 호소했다.

그때 나는 결단했다.
사회주의의 어떤 면은 포기할 수 없다. 그 반대로 자본주의에서도 취할 것은 취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의 결합이 해결사는 아니다. 바람직한 것은 그런 잡탕이 아니라 세계 경제는 점차 '교환'과 '호혜'(또는 포트라치)의 이중 시장으로 변혁돼가야 할 것이다. 고대에 있었다는 '포트라치'나 계(契)를 바탕으로 한 '호혜경제'(互惠經濟) 같은 '신시경제'(神市經濟)와 화백(和白)과 같은 '직접민주주의'를 시도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물론 이것은 요즈음의 내 생각이지만 그때 이미 그 싹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것은 도그마여서도 안되고 폭력적이어서도 안되며 지하당, 소위 전위당도 물론 안되고 유물론이어서는 더욱 안된다고…. 그렇다면 무엇인가. 당(黨)으로서의 통일전선이었다. 나의 혼란과 복잡성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그 잡다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결정적 행동을 선택해 나가는 엉성하게 틈이 많은 창조적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전선당'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 행동의 네트워크 내부의 여러 뇌수를 움직여 끊임없이 각각의 이념과 경향끼리 논쟁하고 서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큰틀의 이념을 합의하고 건설해 나가는 '형성 과정중의 새 이념'만이 새 시대 새 세대를 이끌 수 있을 것이었다.

한참 훗날의 얘기지만 민중신학이니, 민중사회학이니, 민중예술이니 하는 '민중'자 붙은 사상문화의 등장이 이 생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민중'사상은 광주사태 이후의 좌익 도그마들의 범람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무엇이 우리를 도울 것인가.
천지인(天地人)이다.
역사의 때와 정치·지리적 조건과 우리나라라는 기이한 현실에 살고 있는 독특한 정신을 가진 한국사람이라는 3대 요소가 우리를 도울 것이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