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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정 사회'를 말할 수 있으려면…"

[복지국가SOCIETY] 복지와 정의

북유럽 복지철학의 기초는 존엄, 정의 그리고 연대이다. 즉, 인간 존재의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서 생명과 자유에 대한 존엄,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연대, 그리고 국가체계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으로서의 확고한 정의가 서로 맞물려 복지국가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자발적이고 상호적인 민간공동체의 관점에서 연대 또는 이웃사랑이라는 서사적이고 실천적인 개념이 중요하다면, 공적 영역의 복지국가는 정치적 합의에 기초한 제도적이고 강제적인 규범적 정의 또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기초하고 있다.

누군가가 정의의 뜻을 묻는다면 직감적으로 '옳은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런데 옳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이차적 질문이 발생하면서 문제는 근본적인 윤리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정의는 서양철학에서도 오랜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네 가지의 주요한 덕목으로 지혜, 용기, 절제 그리고 정의를 꼽았는데, 그 중에서도 정의가 앞의 세 가지 덕목을 매개하는 균형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중용 및 평등한 비례관계' 또는 플라톤의 입을 빌려서 '각자의 몫은 각자에게'라고 말했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저서에서 '제도로서의 정의'를 자연법과 실정법의 기초로 삼았고, 윤리적 내용으로서 정의를 남에 대한 배려로서의 도덕적인 보편적 내용과 자기보존과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특수한 내용으로 분류하였고, 후자를 다시 자발적인 교환적 시장논리와 비자발적 강제력이 필요한 규범으로 분리하여 논하였다.

정의의 근거인 윤리적 관점을 찾는 작업은 18세기 이후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계몽주의의 윤리적 기준은 신 또는 자연에 의해 부여된 천부적이고 생득적인 것으로 인간은 직관에 의해 남에게 부당하게 행해지는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고 저항한다고 주장한다. 칸트주의적 관점에서 정의는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이성의 실천적 판단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의 생물진화론자들은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보다 유리한 선택적 성향으로 정의감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상기의 다양한 입장처럼 윤리적 관점을 단정 짓는 것은 쉽지 않고, 정의의 근거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매우 난해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필요한 배경으로 아래의 두 사항에 대해서는 모두가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났고, 자연과 관계하며, 자연이 제공하는 자원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조건이다. 둘째, 사람들은 사회를 형성해 살아가면서 필요한 재화를 무제한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할 수 없는 상대적 부족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위에 언급한 제약과 결핍상태가 해소되면 정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도 꿈꾸었던 유토피아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사회"는 인류의 역사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신기루일 뿐이다.

따라서 정의의 구체적 내용은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해서 만들어내는 제 가치들, 생산과 소비, 분배와 소유, 권리와 의무, 명예와 지위, 이들을 위한 기회의 조건과 부여, 그리고 거래의 조건 등에 대한 기준과 절차로서 구성되어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정의는 스스로의 요구에 의해 표현과 내용에서의 참여적 일반성, 적용의 예외 없는 보편성, 전달과 인지의 공지성, 실행의 축차적 우선성, 판단기준으로서의 최종성 등을 자신의 특성으로 갖추어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 대립, 이해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적용할 '정의의 기본적 판단기준'에 대하여 예로부터 직관론, 공리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공동체주의 등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해 왔다.

직관론자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선의에 의지하는데, 모든 인간은 다소간에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에 위해를 가했을 때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존재로 파악한다. 흔히 하는 말로,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를 생물진화론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진화적으로 반복되는 긴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정합적 조건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대단히 근거가 있는 입장이며, 총체적 관점을 전(前)이해적으로 부여하는 강점을 가진다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개개인이 살아온 환경과 조건 그리고 선택적 성향의 임의성 등으로 많은 경우 충돌하는 사안들을 판단하고 정리하는 기준이 서로 간에 달라질 수밖에 없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필자도 직관론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참으로 소망스럽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직관은 문제에 접근하는 단초 또는 출발점으로는 여전히 매력적이며 유효할 것이나, 불행하게도 임의성과 애매함으로 인하여 이를 명확한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고대의 그리스에서는 쾌락주의로, 그리고 18세기 상업주의 발흥 이후에는 공리주의로 불린 입장은 지금도 우리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벤덤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출범한 이 논리는 자본주의 발흥기에 태동하여 시장경제와 결합함으로써 모든 요소를 상품화하는 자본제적 자유주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고,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로 확대되어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휩쓸게 된다. 그 논리는 '좋은 것이 옳은 것이고, 좋다는 것이 모든 판단의 우선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벤담에 의하면, 정의는 다만 특수한 경우에 특정한 방법으로 좋은 것, 즉 공리적 관점을 문제없이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요구되는 몽상적 수단에 불과하다.

동시에 효율성이야말로 명백한 측정의 기준이며, 모든 인간은 하나로 간주되어야 하고 아무도 하나 이상으로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심각한 병폐로 꼽을 수 있는 시장만능주의, 성공과 출세 만능주의, 성과 중심주의,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 등은 모두 공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2000년경 동경대학교에서 기획한 공공철학총서 1호로 발간된 <경제와 윤리>라는 책을 통해 시오노야 유이치 교수는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논박한다.

첫째, 가장 두드러진 약점은 개인의 권리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개인들은 단지 사람들의 선호도에 따라 계산되는 하나의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적 기준으로 효용과 만족만을 제시하고 자유, 탁월, 환경과 같은 비효용적 비정량적 가치를 무시한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최대의 효용성을 위해서는 개별적 희생도 불사하고 인권을 무시한 고문조차도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둘째, 효용의 총량만이 중요하고 내부에서 발생하는 분배의 불평등은 고려하지 않는다. 조금 더 고상하고 합리적으로 표현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소위 '파레토 최적곡선'의 법칙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총합적 성과만 같으면 내부의 수많은 문제를 야기함에도 상관없이 최대 성과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셋째, 성과와 효용을 평가하는 주체와 기준이 일방적이어서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견해와 입장, 특히 주어진 상황에서 소득이나 만족의 불평등을 당하는 계층과 개인들의 입장이 사회 전체의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무시될 위험성이 대단히 크다. 공리주의가 지닌 위험과 잔인성은 사회가 혼란의 와중에 빠질 때, 사회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무고한 죄인을 만들어내고,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희생시키는 과정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용산 참살과 재판과정을 상기시키는 언급)에 있다.

불행하게도 한국사회 내에서는 '시장만능주의 개발론' 뿐만 아니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언급했던 노무현 정부가 주장한 '사회투자국가론' 등의 영향으로 많은 복지 현장조차도 알게 모르게 이러한 공리적 사고가 팽배해 있다. 현실적 실효성을 인정한다 해도, 핵심은 우선성의 문제이다. 유이치의 비판에 하나를 더한다면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적 제약과 인간의 진보적 요구에 의해 공리적 우선주의는 절대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 ⓒ프레시안
반면, 공리주의 입장의 반대편에서 정의의 관점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평생을 싸워온 사람이 있다. 1960년대 이후 하버드 대학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존 롤즈 교수가 그다. 현재도 진행형인 정의에 대한 논쟁은 롤즈가 세운 정의론의 관점을 중심으로 인간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성격에 관한 다양한 입장들로 전개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 교수 역시 그의 많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자 비판자이다.

존 롤즈의 첫 번째 관점은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은 좋은 것뿐이라는 것이다. 더 나가서 학문의 세계에서 진리를 제1의 덕목으로 삼듯이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는 '옳은 것'이 제1의 덕목이며, 따라서 '옳은 것'이 좋은 것에 반드시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다는 것의 판단은 위에서 언급한 '사회를 형성해서 만들어 내는 제 가치들, 생산과 소비, 분배와 소유, 권리와 의무, 명예와 지위, 그리고 이들을 위한 기회의 조건과 부여, 거래의 제 조건 등에 대한 기준과 절차'에 대해 도덕적인 사람들의 참여와 숙고를 통해 중첩된 합의로 이루어져야 하며, 도덕적 출발점으로서 공정성을 그 생명으로 삼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공정한 사회의 '공정'이야말로 그에게는 정의에 있어서 알파요 오메가인 셈이다. 이러한 존 롤즈의 철학적 고민의 배경에는 전통적 사회가 무너지고 현대 산업사회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사회안전망의 필요성, 즉 복지국가 체계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야 하는 숙제가 놓여 있었다.

두 번째 관점은 계몽시대에 만개했던 사회계약론의 연장에서 이의 새로운 구성이다. 홉즈와 로크가 주장한 계약론의 전제를 비판하면서 루소는 각자의 권리를 양도한 공동체 내에서 각자는 동등한 성원이며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일반의지를 설파하고, 이의 목표인 공동선을 향한 인간의 성취와 진보는 사회 속의 제도 즉 사회구조를 통해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롤즈는 일반의지론에서 연장하여 사회관계 속에서 만나는 인간의 원초적 원형은 루소가 이야기 했듯이 과거회귀적 자연인이 아니라, 당위적이며 실천적으로 만들어 가야하는 전향적 모범이어야 한다. 그에게 도덕은 주어지거나 발견되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지고 재구성을 통해서 창조되어야 할 무엇이었다. 이에 칸트가 시도한 노력, 기존의 경험론과 관념적 인식론을 코페르니크스적 전환을 통하여 순수이성과 동 축을 이루는 선험적 실천이성과 정언명령으로 도덕철학의 기초를 구성해 냈듯이, 현실에 기초하되 이상적이며 실천적인 도덕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윤리적 구성주의를 시도한다.

우리사회의 현재 모습 속에 있는 인간들 간의 불평등과 모순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인간사회를 전진시킬 수 있는 최소 조건의 받침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기준점을 창조하는 작업을 통하여 좀 더 전향적으로 진보하는 인간사회의 모습을 만드는 것으로 그의 철학적 실천주제로 삼는다.

동시에 이렇게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의 기준점은 도덕적인 합당성, 객관적인 진리로서의 부합성, 사회윤리로서 현실에 적용 가능성으로 올바른지의 여부를 도덕적 숙고에 의해 반드시 재검증해야 하며, 이러한 도덕적 숙고는 현재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반성적 평형 및 판단력,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적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롤즈의 정의에 대한 입장은 통시적 완성형이 아니라, 모두가 일반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약한 전제로서 현재적 기준의 출발점을 찾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칸트의 철학적 사유 세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통찰이었다. 사회구조 속에서는 모든 성원이 상호협동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다는 긍정적 측면과 소득 및 가치의 분배과정에서 서로 간의 이해충돌이 발생하는 부정적 측면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이를 조정해 줄 원칙이 바로 정의의 원칙이고, 그러한 원칙을 요구하는 사회적 경제적 배경이 정의의 여건이다.

이러한 기준점을 찾기 위하여 실천적으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사회계약론적 전통과 칸트의 윤리적 구성주의 방식을 결합하여 바람직한 인간사회의 모형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었다. 질서정연한 사회 속에 도덕적 인간들이 경험과 우연성을 배제하는 합리적 자율성에 의한 숙고를 통해서, 지위와 재산이 관계하지 않고 미래의 상황을 알 수 없는 무지의 베일에서 출발하는 원초적 상황의 모형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합의적 내용을 찾아내는 일이다. 롤즈는 이러한 전제와 모형을 통하여 구성한 최소규범과 최소조건으로서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제1의 원칙으로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 가능한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한 총체적 체계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제2의 원칙으로 차등의 원칙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편성되어야 한다. a) 정의로운 저축의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득이 되고, b) 기회의 균등의 원칙하에 모든 이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가 결부되어야 한다. 상기의 원칙은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다만 필자 나름의 느낌과 해석을 겸해 풀어서 기술한다.

그저 주어지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복지혜택을 수동적인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주체자로서 자기존재에 대한 자존적 실현의 과정으로서 사회구성원의 일원인 평등한 자격으로 사회경제 운용의 조건과 원칙을 결정하는 정치적 과정에 능동적이고 합리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참여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정의의 제1평등원칙이며, 이러한 정치적 평등과 기본적 자유는 오로지 자유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서만 제한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평등과 자유의 원칙하에 운용되는 사회경제적 방식은 최소 수혜자의 여건이 개선되는 한에 있어서만 정당할 뿐만 아니라, 이들 최소 수혜자에게 보다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정의의 원칙이 효율성이나 총량적 극대화의 원칙에 우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위와 재산과 세대 간의 이유로 어떠한 불공정함이 이뤄져서는 아니 되며, 교육과정과 사회진출에 있어서 지위와 재산과 관계없이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사회적 저축도 세대 간의 공정성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현실적 차등을 인정할 수 있는 정의의 제2차등원칙이다

롤즈가 제시한 상기의 원칙들에 대하여 수많은 비판과 평가가 이루어 졌다. 그러한 비판은 진보와 보수의 양 진영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입장을 지닌 사람에게서도 있었다. 현대적 공리주의자로 평가되는 노직은 철저하게 사유권을 중심으로 비판하여 롤즈의 원칙들은 개개인의 신성한 사유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노직이 자신의 논리에 충실하여 완벽을 기한 점을 평가한다 해도 그는 인간존재의 가치를 오로지 재산소유자라는 단세포로 바라보는 결정적 약점을 노출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재산 형성이 타자의 도움 없이 전적으로 자신 혼자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을 로빈손 크루소처럼 무인도 삶을 통해서라도 입증해야 한다.

평등주의자들은 롤즈가 너무 개인적 자유주의에 치우쳐 현실적 불평등에 너무 쉽게 눈을 감았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하여 롤즈는 시장경제가 인간사회의 물적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는 현실적 수단임을 인정해야 하며, 다만 자본제적 시장경제체제는 최소 수혜자들의 생활이 나아진다는 전제 하에서만 유효하다. 또한 분배적 정의의 관점에서 상속 및 양도뿐만 아니라 과다한 개인적 소유에 대해서 민주적 합의에 의해 통제하고 필요하다면 과감한 누진적 과세를 해야 한다고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구조는 공정한 협력체제여야 한다는 점에서 생산적 자산과 인간자본이 일반시민 속에 광범하게 분포되어야 한다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 개념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제임스 미드교수가 주창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미드교수는 기본소득과 같은 개념인 사회(배당)소득을 열렬히 주장했고 롤즈도 그러한 입장을 확실하게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러한 부분들이 그의 저서에 좀 더 구체화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들의 과제인 셈이다.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는 왈져, 센델, 매킨타이어 등은 서로 다른 다양한 시각으로 롤즈가 인간 존재가 역사적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 때로는 특수한 문화적 서사로서 이루진다는 사실보다 개별자로서 자유주의적 존재방식에 집중하고 있으며 공동체적 사회관계의 주요한 전제이며 동시에 과제인 인간성의 선함과 덕성계발을 소홀히 다루었다고 지적한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상기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이 롤즈의 한계를 보완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 그가 고민했던 현실 상황과제에 대한 실천적 고민을 함께 공유했다기보다는 논리를 위한 비판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롤즈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적 논리의 완벽이 아니라 상황과제에 대한 실천적 제안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한편 조력자이자 동지로서 아미티아 센은 인간의 잠재적 능력개발에 대해 언급이 미진하다고 불평한다. 부언하자면, 롤즈는 상기의 주제들을 대부분을 조금씩 다루었으나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롤즈는 자신의 주제인 정의에 관하여 집중하였고 이에 대한 일부 오류의 가능성도 언급하였다. 그의 주요 목표는 본인이 언급하였듯이 정의에 관한 현재적 시점에서 최소의 조건으로서 출발점을 찾는 작업이었고, 이는 진행과정에서 반성적 성찰을 통하여 끊임없이 내용을 채워야 하는 주제였다. 그가 찾으려 했던 것이 아르키메데스의 기준점이었다면, 그가 발견한 기준점을 보강하고 지렛대를 더욱 강하게 하여 전향적으로 현실 정합적이고 보다 가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동시에 그를 비판한 공동체주의자들의 상기한 유의미한 내용들은 정의라는 단일한 주제로만 한정할 수 없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주제, 즉 연대와 인간학에 대한 다음의 과제로 넘겨져야 한다고 본다.

추가) 존 롤즈에 대한 철학사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는 전문인들만이 취급할 수 있는 언어 분석적 영역으로 폐쇄되었던 현대철학을 철학의 본래적 역할인 윤리적, 실천적 영역으로 되돌려 놓았다. 동시에 도덕적, 정치적 입장에서 정의에 대한 원칙과 관점을 완벽하리만큼 잘 정리하였고, 고전적 자유주의를 현실적 복지국가 체계의 요구에 부응하여 양립 가능한 자유주의로 재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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