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받아 들었다. 김헌무(金憲武, 1940~) 항목은 여느 반헌법행위자 항목과 사뭇 다른 구조를 갖고 있었다. 반헌법 행위도 있고, 소신 있는 판결도 있다. 사형선고도 있고, 무죄선고도 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이렇게 물었다.
"똑같이 고문에 의해 사건이 조작됐는데 똑같은 재판관이 한 사건은 사형을, 한 사건은 무죄를 내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질문이 핵심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이 한국 현대 사법사의 가장 음험한 진실을 드러낸다.
1940년 대구 출생, TK 엘리트 코스의 전형
김헌무는 1940년 3월 6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양조장을 경영한 재산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 39회를 나와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1962년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고시 동기에는 이재화, 이규명 등이 있는데, 이들도 나란히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한 고시 기수에서 여러 명이 함께 수록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의 서울법대 입학 동기 중 한 명이 바로 김기춘(1939~)이다. 나중에 각각 '왕실장'과 법원장이 되는 두 사람이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이 한국 TK 법조 카르텔의 촘촘함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세계사 속의 동류, '선택적 양심'의 법관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 떠오른다. 나치독일에서 법관으로 일하면서 일부 사건에서는 피고인을 보호하는 판결을 내리고, 또 다른 사건에서는 정권의 의도에 복무하는 판결을 내린 법관들이 있었다. 독일 법학자들은 이를 "선택적 저항(selective resistance)"이라 부른다. 완전한 부역자도 아니고, 완전한 독립판사도 아닌 회색지대. 그러나 역사는 그 회색지대 안에서도 누군가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소련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있었다. 스탈린(1878~1953) 치하에서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비교적 공정한 판결을 내리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는 이미 결론이 정해진 재판에 복무한 판사들이 있었다. 김헌무는 이 유형에 가깝다. 일반 형사사건, 특히 언론이 주목하는 사건에서는 고문의 증거를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간첩사건에서는 같은 고문의 호소를 묵살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1981년 11월, 박동운에게 사형을 선고하다
김헌무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1981년 11월 3일 서울형사지법에서 내린 진도 가족간첩단사건 판결이다. 전남 진도에서 농협에 다니던 박동운은 1981년 3월 7일 새벽 권총을 찬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됐다. 이후 63일간 안기부 남산분실에 불법구금 된 채 전기고문, 물고문, 성기고문을 당했다. 박동운의 진술이다.
"이 계장이 나의 옷을 모두 벗기고 파이프에 묶은 뒤 '네가 계속 자백하지 않으면 모친도 이렇게 옷을 벗기고 고문을 하겠다. 너의 처자식도 똑같이 고문을 하겠다'고 협박했고, 계속 시인하지 않자 '너를 뱀굴에 처넣어버리겠다'고 협박해 결국 울면서 허위사실을 자백하고 말았다."
이 박동운의 1심 재판장이 김헌무였다. 공판과정에서 박동운은 온몸에 남은 고문흔적을 재판장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김헌무의 반응은 이랬다.
"안기부와 검찰 조사 때 다 인정해놓고 여기 와서 뭔 헛소리야."
그리고 탁자를 꽝 내리쳤다. 1981년 11월 3일, 김헌무는 박동운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009년 서울고법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28년이 걸렸다.
1982년 2월, 불과 석 달 뒤, 고숙종에게 무죄를 선고하다
박동운에게 사형을 선고한 지 석 달 뒤인 1982년 2월 1일, 같은 재판장 김헌무는 윤 노파 일가족 피살사건에서 피고인 고숙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언론은 이 판결을 "증거수사가 사건 수사의 요체라는 기본원칙을 재확인한 획기적 판결"이라고 대서특필했다. 법원 역사책도 이 판결을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는 수사관행에 쐐기를 박는 획기적 계기"라 높이 평가했다.
고숙종은 경찰의 물고문으로 허위자백 했다. 박동운도 안기부의 전기고문·물고문으로 허위자백 했다. 같은 재판장이, 같은 고문으로 받아낸 허위자백에 대해 한 사건은 "무죄"라 하고, 다른 사건은 "뭔 헛소리야"라 했다. 차이는 하나다. 고숙종은 살인피의자였고, 박동운은 간첩피의자였다. 간첩사건에서는 고문의 호소를 무시해도 됐다.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고문이 증거를 오염시켰다. 이중 잣대. 이것이 전두환(1931~2021) 시대 한국사법부의 민낯이었다.
국보위 사회정화분과 위원, 삼청교육을 설계한 자리
1980년 5·17 내란 직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었다. 김헌무는 여기서 사회정화분과 위원으로 공직자 숙정에 관여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충주지원장으로 첫 출근하자마자 "무조건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국보위가 뭐 하는 데인지도 모른다"고 항의했으나 "빠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따랐다.
그 '정화위원회'에서 그는 삼청교육도 논의했다고 했다. "사회를 CLEAN 해야되겠다라는 생각에서 삼청교육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6만 명 이상의 사람들 이야기다. 영장도 없이, 재판도 없이. 그 중 수십 명이 가혹행위로 사망했다. 김헌무는 그것을 '사회정화'라 불렀다. 그러나 이 경력이 나중에 대법관 승진의 발목을 잡았다. 재산문제와 함께 '정치판사 논란'이 제기됐고, 대법관 대신 청주지방법원장으로 전보됐다.
전두환이 "펄펄 뛰었다", 간첩사건 무죄선고의 대가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인 1987년, 김헌무는 재일한국인 심한식 간첩조작사건과 납북어부 강종배 간첩조작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87일간 불법구금 상태에서 이루어진 진술은 임의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 판결을 듣고 전두환이 기관장 모임에서 "간첩이 무슨 증거가 있다고 무죄판결을 하느냐, 이런 판사가 어떻게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되었느냐"며 펄펄 뛰었다. 사법부가 발칵 뒤집혔다. 김헌무는 "법관을 그만두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운이 좋아서 법원장까지 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독재자가 판사의 인사에 직접 개입하는 이 구조야말로 간첩사건과 일반사건의 이중 잣대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해준다.
2004년, 노무현 탄핵 사태의 방아쇠
2002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이 된 김헌무는 2004년 노무현(1946~2009) 대통령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며 선거법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이 이른바 탄핵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탄핵소추안을 기각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라 전체가 두 달여 동안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박동운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국보위에서 삼청교육을 설계하고, 노무현 탄핵사태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 그러나 같은 사람이 고숙종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간첩조작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해 전두환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이 인물을 단순히 '나쁜 판사'라고 규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그리고 그 복잡함 속에 한국 현대 사법사의 비극이 있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선택적 양심'을 가진 법관들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는지를 생각해본다. 일부에서는 선의를 인정하지만, 역사는 그 선의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함께 기록한다. 박동운이 28년 만에 재심 무죄를 받던 날, 김헌무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기록 잘못 봤다고 사과해야겠죠. 그러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본인이다. 자백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린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이 사법부의 이중 잣대를 다시 떠올렸다. 국가가 정한 '적'에게는 고문도 증거가 되고, 일반시민에게는 고문은 무죄사유가 된다. 그 이중 잣대가 지금도 살아 있는지를 우리는 계속 물어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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