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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반은 했으나 처벌은 없다? 사법부의 은밀한 속삭임 "안전조치, 안 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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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반은 했으나 처벌은 없다? 사법부의 은밀한 속삭임 "안전조치, 안 해도 괜찮아"

[아리셀 2심 판결을 말한다] ④ 합의를 면죄부로 만들다

수원고등법원 제1형사부는 지난 4월, 노동자 23명이 사망하고 9명이 다친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항소심에서 ㈜아리셀 대표이사 박순관에게 징역 4년, 안전보건관리책임자 박중언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하였다. 제1심이 두 사람에게 각 선고한 징역 15년의 4분의 1 수준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와 같이 시 열감지기 설치의무, 선행 폭발 전지에 대한 후속공정 중단 또는 발열검사·분리보관 의무, 정기 및 채용 시 안전보건교육 의무, 소방훈련 의무, 위험성평가 의무 위반과 23명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모두 인정하였다.

나아가 양형이유에서 "선행 폭발 사고라는 중요한 전조증상이 있었음에도 안일하게 생각하고 구체적인 조치나 대비 없이 후속공정을 계속하였다", "매뉴얼을 마련하고 이를 준수하기만 했더라도 막을 수 있었던 참사"라고 스스로 판시하였고, 박순관에 대하여는 "안전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권한과 책임이 있음에도 이를 방치한 대표이사"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도 같은 양형이유에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 등을 완전히 방치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형을 깎았는데, 동일한 판결문 안에서 정합성이 무너진 것이다. 의무 위반은 전부 인정하되 그에 상응하는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이 판결이 전국의 사업주에게 속삭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안전보건조치, 안 해도 괜찮다."

▲ 아리셀 화재 현장. ⓒ연합뉴스

감형의 결정적 근거는 '사망 피해자 23명 전원과의 합의'였다. 그러나 형사 양형에서 합의가 감경요소로 기능하는 것은 두 가지 전제, 즉 피해자에 대한 충분한 피해회복과 피해자의 자발적인 처벌불원이 충족될 때이다. 그러나 본건 합의는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한다.

먼저 본건 합의금은 '민사상 손해배상과 별도의 형사적 노력'이 아니다. 회사가 본래 부담하여야 할 민사책임은 일실수익, 위자료, 그리고 중대재해처벌법 제15조가 정한 징벌적 손해배상(손해액의 5배 이내)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본건 합의금에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회사는 중국·라오스 출신 유족에게는 본국 임금기준으로 일실수익을 깎아 산정한 차별적 합의안을 송부하였다. 동일한 사업장에서 동일한 일을 하다 숨진 노동자의 생명값을 국적에 따라 달리 매긴 것이다. 결국 회사는 본래의 민사채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부 변제를 하고서 형의 4분의 3을 감경받았다.

자발성은 더욱 인정하기 어렵다. 피고인 측은 유족들이 법률지원단을 대리인으로 선임한 사실을 알면서도 개별 유족에게 직접 합의안을 보냈고(변호사윤리장전 윤리규약 제45조 위반 소지), 기한 내 합의 시 추가 지급과 기한 도과 시 공탁 통고를 같은 문서에 병기하였으며, 처벌불원서 작성을 합의금 지급의 전제로 요구하였다. 화성시의 숙소 지원이 종료되어 갈 곳이 없어진 외국인 유족들은 서둘러 합의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구조적 강박 아래 형성된 합의이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합의의 형성 과정과 진정성을 밝히겠다는 피해자 대리인의 진술 신청을 "합의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말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다"며 거부하였다. 합의를 양형에 반영하는 취지가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라고 설시하면서, 정작 그 피해가 회복되었는지에 관한 심리는 봉쇄한 자기모순적 재판이다.

이 판결이 선례로 굳어지면 효과 구조는 역전된다. 합의의 감경 효과가 사망자 1인당 누적된다면, 사망자가 많은 사건일수록 형은 오히려 더 줄어든다. 사업주의 입장에서는 열감지기, 안전교육, 위험성평가에 들어가는 사전 안전투자보다 참사 후 저가의 합의 처리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중대재해처벌법의 형사적 억제력을 양형 단계에서 무력화한, 사실상 이 법을 위헌이라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은 판결이다. 그리고 지금 유족들은 "내가 합의를 해주어서 형이 줄었다"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 합의를 면죄부로 만든 판결이 피해자에게 남긴 두 번째 상처이다.

합의의 외형이 아니라 그 형성 과정과 자발성, 진정성을 엄밀히 심사하고, 강박적·기만적 합의에 대하여는 양형 반영을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장래의 사업주에게 진정성 있는 피해회복을 유도하는 길이다. 23명의 죽음 앞에서 사법부가 할 일은 합의서를 세는 것이 아니라, 그 합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묻는 것이다. 대법원의 엄정한 판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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