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변명으로는, 복지국가를 형성하는 데는 국가운영 시스템으로서 정치적 이슈를 만들어 내고 정책적인 내용을 담아가는 정치적인 접근, 즉 상층부 방식만으로는 어렵고, 동시적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사회 속에서 삶의 태도, 철학, 실천 그리고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는 현장의 방식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제도는 북유럽 사람들의 생활 속에 존엄과 정의와 연대라는 이념이 깊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실효적으로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역으로 아직 생산영역에서 재벌 독식체계가 확고하고 시민사회의 일반적 행태가 출세제일주의에 경도되고 천민적 지대추구와 지독한 가족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의 현 상황에서, 복지 이슈를 정치 일선에서 전면화한다고 해서 이를 돌파해 내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일시적으로 돌파한다고 해도 이를 제대로 지속하기는 더욱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극심한 혼란과 예기치 못한 반동을 야기할 수도 있다.
▲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스웨덴 노인들. 북유럽 사회의 높은 복지수준은 사민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진영이 긴 시야로 오랜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
한국사회 내에서 시민 개개인의 삶 속에 복지가 일상적, 실천적으로 뿌리를 내려야 복지국가의 기초가 다져진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상기에 언급한 존엄, 정의 및 연대에 대한 치열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당연히 존엄의 다른 이름인 자유라는 문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순서일 터이다.
두 번째 설명을 하자면, 복지국가로 가는 여정에서 예상되는 사회정치적 갈등과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내부적 입장만이 아니라 복지국가의 의미를 축소 또는 그 중요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타자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다. 복지체계는 투쟁과 일방적 굴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당당하고 합리적인 설득과 포용을 통해서 지속가능한 조건을 이루어 왔음을 지난 역사가 보여준다.
논쟁을 통해 반대편의 입장인 시장만능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애매한 중간적 입장 또는 절충적 입장을 취하는 공동체적 자유주의와 사회투자국가론 등에 대해 철학적 비판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편에서는 진보진영의 학자들이 모여 한국사회 현 단계의 과제와 지향으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지목하고 나섰다. 학문적으로는 엄정하게 선정하였으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으나, 가슴에 정확히 와 닿는 느낌이 없다. 진보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는데, 진보에 보태진 자유주의는 일반인으로는 뜻을 정확히 헤아려 알 길이 없다. 자유론의 대가로 알려진 이사야 벌린은 자유의 개념이 백가지도 넘는다고 푸념을 했다 한다. 이리저리 해서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논쟁을 제기할 필요성을 느꼈다.
학자가 아닌 생활인으로 다루기에는 무모하고 벅찬 주제이나, 무식함을 핑계삼아 인터넷 검색을 시작해 본다. 자유와 소유의 개념이 인류 역사에 기록으로 남겨진 것을 추적해 보면 BC 24세기경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지역의 상형문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여 법을 규정한 이들의 기록을 보면, 재산을 소유자의 뜻에 반해서 처분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며, 부당한 일을 당하면 이를 항의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한다. 문명의 시작부터 인간은 사유권과 자유의 문제를 핵심적 주제로 삼아온 것임을 보여준다.
노예제라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기는 했으나 현대 민주주의의 원형을 보여준 그리스 시대에는 자유시민 중심의 직접적 민주정치가 있었고, 로마시대에는 원로원과 호민관제에서 비롯한 공화정신이 황제의 권력에 대립하여 시민적 자유를 방어해 왔다.
암흑기라 불리는 중세 시기에도 자유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신학대전을 집필한 아퀴나스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은총과 자유의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든 이상적 공간인 에덴의 섭리를 거부하고 자유의지로 스스로 자신의 선택을 고집한 인간이 삶 속에서 마주치는 고통, 배신, 좌절 등의 원죄 속에서 신음할 때 신은 은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논지이다.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자유의 내용은 보다 풍부해 진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설인 <리바이던> 저술로 유명한 홉스가 놀랍게도 자유에 대해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다음의 세 가지 관점, 즉 기존의 관행과 철학으로부터의 단절, 내재된 욕망의 실현 과정, 그리고 필연과 양립되는 주제로서의 자유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특히, 필연으로부터 구분되는 자유의 개념은 뉴튼의 물리학적 대법칙 발견과 다윈의 진화론 이후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자연법칙의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결정적 필연론 또는 섭리에 의한 예정조화론 등이 등장할 것에 대해 선각자적으로 제기된 중요한 문제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세 사람의 존(John)을 만나면 현대적 자유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인물은 사회계약론과 근대적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만든 존 로크(John Locke)다. 천부적 인권, 즉 인간의 존엄과 가치로서 주어지는 자연적 자유와 사회계약에 의해 법의 규제 하에 형성되는 사회적 자유의 개념을 구분하여 주창했고, 이의 경제적 적용으로서 사유재산권의 신성함을 지지하였다. 일부에서는 로크가 사유재산권을 무조건으로 지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그는 모든 소유권의 근본은 자연인 대지에 있으며 노동을 통해서만 소유형태의 이전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두 번째 인물은 자유론을 저술한 존 스튜어트 밀이다. 이 분야에서 천재적 걸출함을 보인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진정한 나의 개성과 욕망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보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을 자유로 규정한다. 나아가 자유의 행사는 남의 자유를 해치는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삶에 긍정적 효과와 효율성의 증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공리적 흔적을 보인다. 그는 제한받지 않는 개개인의 자유야말로 독특함과 창의성으로 결국에는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가져온다고 확고히 믿는다. 특히, 표현의 자유는 무조건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이후 고전적 자유론 또는 순수한 자유론 또는 소극적 자유론의 기초가 된다.
세 번째 인물은 1970년대 미국 지성의 상징이었던 존 롤스(John Rowls)다. 존 롤스는 현대적 복지국가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로 '정의론'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저술을 통해서 각자 개인의 지위와 재산여부와 관계없는 원초적 상황에서,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무지한 베일 속에서, 모두가 동등한 조건 하에 정치적 합의, 즉 사회계약을 이루어야 하며, 이의 당연한 전제로 자유를 이야기한다. 이에 그의 사상적 스승인 임마뉴엘 칸트의 자유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다.
칸트는 형이상적으로 논증할 수 없는 주제로 시간, 공간, 영혼과 신의 존재, 그리고 자유를 언급한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의 문제는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거이어야 하며 실천이성의 전제가 된다. 자연계에서 목도하듯이 단순한 본능과 충동에 따르는 것은 동물적 또는 노예적 조건인 임의성이며, 인간이 실천이성 속에서 강제(의무)에 의하여 스스로 정한 법칙, 즉 선험적 형식에 복종하는 것이 자유 또는 자유의지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자유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이 충돌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하나는 개성과 욕망의 연장으로 자유를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 존재형식으로서 실천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자율이 자유라는 관점이다.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자유에 대한 해석이 보다 정교해진다. 이사야 벌린은 "무엇으로 부터(free from)"의 개념과 "무엇을 하고자 또는 무엇이 되고자(free to do or become)"의 개념으로 구분하여 전자를 소극적 자유, 후자를 적극적 자유로 지칭한다. 소극적 자유는 외부적 장애 및 장벽 또는 구속이 없는 상태에서 행동 또는 사고하는 것이다. 적극적 자유는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 또는 성취할 가능성을 말한다.
흔히 소극적 자유는 개인적 상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적극적 자유는 집단적 형태 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루진다고 한다. 전자는 주로 정치적 자유와 사적소유권 문제에 집중하게 되고, 따라서 정부나 공공의 개입을 부정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적극적 자유는 행위의 주체가 자신의 뜻과 의지를 실현하는 능력에 강조를 두며, 따라서 자유의 척도는 주어진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상황구조 하에서 발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된다. 자연스레 소극적 자유는 개인에게 강조와 우위를 둔다. 적극적 자유는 주어진 상황과 조건 하에서 제도적이고 구조적 문제에 보다 집중하게 된다.
스탈린 시대를 경험한 이사야 벌린은 적극적 자유의 긍정적인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가져올 수 있는 전횡적이고 집단적 폭력의 위험성을 경계하였다. 그래서 기본적 조건으로 소극적 자유를 적극 강조하며, 어떠한 조건과 경우에 있어서도 소극적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자유를 소극적 관점과 적극적 관점으로 구분하여 대립시키는 것은 의도적 오류이며, 오히려 자유는 위에 언급한 두 개의 측면과 자연적 한계를 종합하여 구성되어야 하며, 따라서 자유는 여러 가지 종합적 지표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포괄적 입장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관점을 받쳐주는 이론가로 하버드대학 교수인 맥칼럼(Gerald MecCallum)은 3요소 화음론( triadic relations )을 주장한다. 맥칼럼 교수에 의하면, 자유는 주어진 조건과 상황 하에서 행위의 주체, 행위를 제약하는 조건, 행위의 의도 또는 목적의 세 가지의 요소가 서로 삼각적인 화음관계를 이루며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지금까지 자유에 대한 주요한 관점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미국에서 대단히 인기를 끌고 있는 진화론 입장의 철학 교수인 다니엘 데닛은 자유도 진화한다고 선언한다. 혹자는 자연 진화의 입장은 결정론적 관점이어서 자유와 결정론이 서로 충돌하는 자기모순이라고 할런지도 모르겠으나, 데닛은 자연 진화를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대립과 보완의 종합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데닛의 주장처럼, 필자도 자유는 비가역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다. 자유에 대한 내용이 시계 바늘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이 원숭이로 되돌아 갈 수 없듯이 말이다. 오히려 시대를 지나가면서 제약조건이 하나씩 풀리면서 적용의 지평을 넓혀가고 내용이 보다 풍부해진다. 물론 일시적 반작용과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제약이 발생할 수도 있으나, 이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과정이며, 인류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결국, 자유는 탄력적으로 새로운 진보의 내용을 획득해가면서 전진해 나갈 것이다.
이사야 벌린이 이야기한대로 JS Mill 입장의 정치적 시민권적 자유, 즉 소극적 자유는 대단히 소중하고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출발선(embedding platform)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출발선을 침해하는 행위는 반동적이며 반인권적인 것이므로 당연히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분연히 일어나 저항하고 분쇄해야 한다. 한국 시민사회는 현대사 속에서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이미 이를 확인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동시에 자유는 출발선인 소극적 자유를 넘어서서 현재적 시점에서 자유의 확대를 제한하는 조건과 상황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운동해 간다. 제한적 조건이 자연에서 오는 것이라면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며, 압박조건이 사회경제적인 것에서 온다면 당연히 이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진전해야 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인간의 존재양식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유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시간과 공간은 수동적이고 실존적으로 던져진 것이라면 자유와의 관계는 인간의 실천주제로 다가온다. 당연히 자유는 타자(그것은 자신 존재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와의 관계 속에서 확대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로크와 밀, 칸트 및 현대적 입장을 종합하면, 자유는 주어진 상황 및 조건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양식으로서 사고, 표현, 가치와 존엄 그리고 활동의 해방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장에서 자유의 문제를 경제적 영역으로 돌려 사적소유와 시장의 문제로 들어가 보면 내용은 확연히 달라진다. 잠깐 언급했듯이, 존 로크가 사유재산권을 천부적 권리라고 이야기했을 당시는 새롭게 성장하는 신흥 시민계급과 구체제의 지배계급 간의 치열한 갈등과 투쟁 속에 있었다. 구체제의 이해와 속박으로부터 생산력의 해방과 발전을 위해 사적 재산권의 획득은 자유의 진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핵심적 사항일 수밖에 없었다. 아담 스미스 이후 경제학이 윤리학에서 분리되고 시장경제의 기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서, 이후 수세기 동안 시장과 사유제의 결합을 통한 경제활동으로 인류사회는 과거 어떤 시대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류를 물질적 제약에서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적 소유와 이익 실현의 욕구가 지나쳐 시장을 매개로 자연과 노동 그리고 매개체인 화폐 자신조차 오로지 상품화하는 물신과 소외의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을 속박하고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는 탐욕으로 변질되어 간다, 이로 인해 존 로크가 그토록 외쳤던 천부적 인간존엄과 가치가 오히려 핍박을 받으며, 개별적 인간 존재는 오로지 노동력으로 대상화되어 천부적 자연과 함께 상품시장의 메커니즘 속에서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는 상황에 이른다. 시장은 탐욕과 결합함으로써 지난 수세기 동안 보였던 해방의 역할에서 이제는 억압과 구속의 기제로 작동한다.
현재 목도하듯이, 자유라는 이름을 도용하고 이로 포장하고 은폐하여, 자유라는 이름을 오염시키는 일방적 수탈구조를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만능의 메커니즘을 묵인하는 것은 자유의 수호라는 입장에서도 결코 용납할 수 지경에 이르렀다. 왜냐고? 되풀이 하지만 자유의 핵심내용은 존 로크가 지적했듯이 인간이면 모두가 지녀야 할 천부적 권리와 존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과 사유제는 개개인을 위한 경제적 상황이 개선되고 개개인의 자유영역이 확대되는 범위에서만 유효하다. 따라서 이제부터 경제의 영역은 수탈을 일반화시킨 시장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수세기 전에 분리되었던 윤리의 영역과 재결합해야만 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합의(강제)를 통해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만능주의가 가진 탐욕적 요소, 즉 반자유(존엄)적이며 반인권적인 내용을 고발하고 억압해야 하며, 시장의 역할을 사탄적 탐욕과 분리시켜 본래적인 탁월한 재화 창출의 순기능으로 되돌려야 하며, 사적 소유가 가져다주는 개별적 열정과 노력을 인류 모두의 가치를 보다 높이는 방향으로 재정립하여야 한다. 최근의 세계적 금융위기와 경제위기는 이를 명백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존 롤스는 정치적 영역의 핵심가치를 자유로 삼는 반면에 사회경제적 주요가치로 정의를 내세운다. 연이여 사회경제적 정언명령으로 기회의 공정성과 사회경제적 성과를 최소수혜자에게 최대한 배려하는 최대-최소의 수혜원칙을 주창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준차적 서열의 문제다. 준차적 서열이라 함은 강조점과 우선순위가 뒤섞여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준차적 서열은 정치적 자유가 우선하고 기회의 공정성과 최대-최소수혜의 원칙이 뒤따르는 순이다. 복지국가는 당연히 자유로서의 존엄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와 연대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
- 덧붙여
우리사회 일부에서 복지국가는 한국의 현실적 조건에서 아직 설익은 개념이며 정의가 우선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그룹이 있다. 이는 잘못된 인식이거나 복지국가 운동을 의도적으로 훼방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자유, 정의 그리고 연대는 복지국가의 철학적 기초이자 자양분이고, 복지국가는 그러한 영양분 위에 피어나는 꽃, 즉 실천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정의는 복지국가의 개념에서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지의 주요한 내용적 기초를 이룬다. 더 나가가, 정의는 자유와 연대와 함께 복지국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듯이 말이다. 복지는 어느 시대에도 요구되는 과정적 당위이며, 다만 범위와 수준은 시대적 한계로 규정될 뿐이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다중적 위기와 불안으로 인해 폭발 직전에 이른 상황이며, 따라서 복지국가 또는 보편적 사회제도에 대한 전면적 도입을 긴급하고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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