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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복지 효율은 모든 이의 안전한 삶을 보장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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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복지 효율은 모든 이의 안전한 삶을 보장하는 것

[인권의 바람] 복지정책의 실제를 넘어, 사회를 바꾸는 복지를 위하여

최근 수원지역에서 일가족 세 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누군가는 한국의 빈곤한 삶이 어디까지 내몰리는지를 생각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내몰린 삶 그 자체의 숨 막힘을 떠올릴 것이다. 삶의 현실에서 '질병', '주거문제', '생활고'는 구분해 명명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개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 존엄마저 앗아가는 현실이다.

이러한 죽음이 반복될 때마다 빈곤을 책임져야 했을 제도의 개선 목소리가 커진다. 국가의 빈곤에 대한 책임은 이제 꽤나 오래된, 자연스러운 담론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하면서, 빈곤과 사회적 배제가 개인의 탓이 아닌 사회적 구조의 문제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회구조로 인한 위험은 사회적 대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를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자 하는 역할이 국가에 주어진 것이다. 국가는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 소외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들을 정립하고 이를 행할 책임이 있다. 그 누구도 최저 선 이하의 삶을 살지 않도록 하는 책임이 국가에 부여되는 것, 이것이 복지국가가 가진 이념이다.

이상적인 복지국가는 사회적 재분배를 적극적으로 행하고, 개인이 어떠한 이유로든 사회적으로 배제되거나, 차별받는 경험을 최소화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일가족 세 명의 사망 외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보도되는 빈곤 가족의 존비속 살해와 자살 사건이나, 탈 시설 장애인이나 홈리스 고독사에 관한 기사를 쫓아가다보면 우리의 복지제도에 단순히 허점이 있음을 넘어, 과연 제도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복지제도와 복지국가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삶과 사회적 죽음에 근거하여서만 나아지는가 싶은 마음까지도 든다. 짧게나마 제도들을 둘러싼 현상들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모든 사람에게 신청의 자유는 동등하게 오지 않는다

상당수 복지제도는 신청주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신청주의 원칙은 제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신청해야만 정책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신청은 매우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이 자체로 정책적 수혜 대상을 축소하고, 이로써 공공자원을 아끼는 방안으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정책들이 있음에도 신청조차 하지 못해 발생하는 비극적 사례가 많다. 자신에게 맞는 제도가 있음을 알고, 자신이 그 제도의 수혜 대상이며, 그 제도적 내용이 자신에게 도움이 됨을 알려주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배제된 사람들이 경험하는 어려움 중 공통적인 것으로 사회적 네트워크가 훼손되는 문제가 있다. 특히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경우, 그 당사자는 원래 알고 지내던 집단과 빠르게 멀어지지만 새로운 집단과는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 신청주의 제도를 이용하기 위하여 제도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고, 이용하기가 어려운 조건에 처하는 것이다. 또한 저소득층일수록 노동시간이 길고, 맞벌이 등으로 인해 공공서비스 정보를 직접 알아보기도 어렵다. 언어적으로 정보 습득 자체에 어려움을 경험하는 집단도 있을 수 있다. 결국 어떤 제도가 있다고 해서 신청할 자유가 모두에게 동등한 것은 아니다.

또 하나 신청주의 정책의 한계는 '신청' 행위가 신청서 접수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복지 신청을 위해서는 신청자가 제도가 요구하는 다양한 조건을 충족해야 하고, 이를 증명해야 한다. 최근에는 온라인 신청이 많아지면서 관련 기술 접근성이 떨어지는 집단의 배제 또한 심각한 문제다. 신청 과정의 어려움은 사람들이 제도 수혜를 포기하고 복지정책을 불신하게끔 하는 요인이 된다.

조사, 심사, 대상화된 삶의 위기

선별주의 원리를 가진 다수의 정책들은 조사와 심사과정을 거친다. 개별 정책마다 이 과정의 무게가 다르다. 어떤 제도의 심사 절차는 단순 ‘확인’ 정도에 그치지만 어떠한 제도의 관련 절차는 이용자에게 큰 고통을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공정책을 통해 자원 이전을 기대해야만 하는 집단은 시장이나 가족 등 개인 차원에서 자원 확보가 어려운 집단이기 쉽다. 결국 제도적 지원이 더 간절한 이들이 심사과정이 주는 거절이나 의심으로부터 더 큰 고통을 받는다.

현 복지제도의 조사나 심사는 이 제도를 이용하고자 하는 이가 진짜 '도와줄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확인한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을 용기 내어 찾아갔을 때, 내가 정말 도움 받을 만한 존재인지 의심하는 눈초리를 경험해본 적 있는가. 그 눈초리는 그저 시선이 아니다.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고, 낙인으로 인한 고통을 주는 무기다. 복지제도는 제도 수혜자에게 제공하는 현물급여나 현금급여 만큼이나, 사회적 자원으로서 존엄하게 살 권리를 주어야 하지만 선별정책들은 수혜 과정에서 이러한 권리의 박탈을 촉진하기도 한다.

이는 언어를 조금 수정하거나 과정을 조금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조사나 심사 과정 자체가 정책/제도 이용자를 대상화하는 문제다. 무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대상화된 이들은 이 과정에서 위협받은 존엄을 이야기한다. 장애등급제 폐지 과정에서 많은 장애인들이 증언하였던 것처럼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이야기하는 선별의 과정은 그 자체로 처참하다. 부양의무제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자원의 한계를 들어 선별적인 정책 혹은 신청주의적 제도 설계는 선호되고 있다. 어쩌면 폐지되지 않은 것은 공공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용납된다는 (심지어 그것이 누군가의 존엄을 죽이는 일이라도) 사회적인 합의일 테다.

▲암·희귀병 투병과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복지서비스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수원 세모녀'의 발인이 지난달 26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원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연합뉴스

자원이 없는 사람들의 덫이 된 제도들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득 하위 70%의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연금 제도가 시행된 지 올해로 8년째다. 기초연금이 도입되면서 상당수의 노인 빈곤 문제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허나 8년의 시간 동안 '줬다 뺏는 기초연금' 운동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권자이던 노인들은 기초연금을 받아도 월 총 소득에 변화가 없다. 이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원리 상 개인의 소득이 생기면 이를 개인이 자율적으로 기반을 확충한 것으로 이해하여 기초연금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액보다 우선한 소득으로 보고, 소득액을 삭감하는 '보충성의 원리'가 이 기초연금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빈곤한 노인집단은 기초연금이 도입된 이후 기초연금으로 인한 빈곤 완화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집단이 되었다.

보충성 원리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개인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하고, 수급권으로 인해 자율성이 침해되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사실상 시장주의적 성격을 띠고, 빈곤으로부터 시민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보충성 원리의 위험한 점은, 수급권을 기준으로 하는 급여나 서비스 조건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자원이 없는 이들에게, 수급권이 박탈되는 것은 너무나 큰 삶의 질 저하를 낳는다. 결국 빈곤한 삶을 사는 이들이 어렵게 얻은 사적 자원을 제도가 다시 흡수하여, 공공이 허락하는 수준 이상의 삶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개인이 아닌, 사회를 바꾸는 복지국가

복지국가의 이념과 달리, 현실의 복지제도는 신청주의의 형태로 정작 제도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와 닿지 않으면서 생기는 위협이다. 선별의 과정에서 존엄이 훼손당하는 경험을 무릅쓰고 개인이 손에 쥐는 적은 자원까지도 환수해간다면 개인의 삶은 어려워질 뿐이다. 이는 자선적 시각에서 개인과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사회복지가 실행되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담론이기도 하다. 취약 계층을 재활하여 시장주의적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잔여적인 접근이 복지의 존재 이유라고 바라보는 것이다. 여전히 효율성과 복지 성과를 측정하는 다양한 수치들에는 이러한 재활담론과 개인을 갱생하려는 시혜적 시각이 드러난다.

허나, 복지국가다운 복지정책은 개인의 재활보다 사회적 위험에 주목하는 것일 테다.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망을 형성하거나, 사회적 불평등을 직시하고 재분배를 통해 이를 해소하기란, 현재와 같이 개인을 괴롭히는 방식의 복지를 조금씩 고쳐 쓰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복지는 개인을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 이전에, '정상의 몸'이라 불리는 비장애인, 남성, (우리 사회에서는 '선주민'에 해당하는) 백인, 서울 사람의 몸과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이 삶이 보편적이 되는 것이 복지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기초생활보장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장애인과가난한이들의3대적폐폐지공동행동은 지난 8월 24일 발표한 공동성명을 통하여 "빈민이 아니라 빈곤과 싸우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개인에게 따져 묻는 방식의 복지제도를 고쳐가기 위해서, 복지국가는 이러한 본질적인 고민을 필요로 한다. 제도의 질문이 누구를 향해 있고, 무엇을 바꾸려 하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결국, 개인이 아닌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타인의 삶에 공감하고, 이를 인정하는 감수성일 수 있겠다. 다른 몸을 가진 이들이 살아가게끔 지원하는 제도들에 대한 기준이 제도가 얼마나 돈을 아끼는지를 통해 공공 자원의 효율성을 평가하기보다, 개인의 몸과 삶이 얼마나 자유로워지는가에 있을 수는 없을까. 이를 통해서 사회에서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이들이 보다 다양한 삶을 안전히 살아갈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사회적으로 비용을 아끼는 길이다. 그 이전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사회가 된다는 자체가 모두에게 이익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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