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4일, 강원도 홍천의 하이트진로 공장 앞에서는 하청 화물기사 130여 명이 농성을 벌였다. 이 화물기사들은 하이트진로의 자회사(수양물류)가 다시 위탁계약을 맺은 2차 하청업체들 소속이었다. 이들은 15년째 그대로인 운송료 인상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노조를 결성해 집단행동에 나서자 사측은 (개인소유 차량을 등록하고 일감에 따라 보수를 받는) 지입 계약을 해지함으로써 이들 모두를 집단 해고했다.
아홉 살과 다섯 살의 두 자녀를 둔 11년차의 한 화물기사는 기름값과 도로통행료 등을 제하고 나면 한 달에 100~150만 원, 많이 버는 달은 200만 원쯤 가져간다고 했다. 올해, 4인 빈곤 가구가 정부로부터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준선은 월 소득 154만 원 이하다. 하지만 일을 하고 있는 이 화물기사들이 생계급여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1990년대 말, 혹독한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나라 언론 매체들에 '신빈곤(新貧困)'이란 단어가 잠깐 등장한 적이 있다. 산업화에 성공해서 웬만큼 살게 된 나라에 갑작스레 찾아온 가난이란 의미였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가난이 굶주림과 남루한 행색으로 나타났던 데 비해, 오늘날의 가난은 겉으로 쉽게 판별할 수 없는 새로운 모습을 띤다는 뜻이기도 했다. 빈곤의 덫을 진작 벗어났다고 모두가 믿고 있던 시절이니, 대량실업 사태와 함께 찾아온 사회적 궁핍을 뭔가 비상한 현상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뜬금없다던 이 빈곤은 지난 20여 년 동안 물러가기는커녕 점점 더 깊이 똬리를 틀고 확산돼 왔다. 전체 인구 중 가난한 사람의 비율을 나타내는 빈곤율은 외환위기가 터지자 12%대까지 치솟았다가 그 후 잠시 내려오는 듯하더니 2016년부터는 아예 15%대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100집 중 15집 이상이 빈곤 가구라는 뜻이지만 최소한의 통계일 뿐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다. 앞에서 말한 화물기사들은 빈곤율 통계치에 제대로 포함되지도 않는다.
한국의 빈곤율은 OECD 국가 중에서 네 번째로 높다. 가장 살기 힘들었다는 'IMF 시절'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심각한 상태가 일상으로 고착되었다. 이제 빈곤이란 단어 앞에 굳이 '새롭다(新)'는 관형어를 붙일 필요가 없어졌다.
빈곤이 극도의 결핍이 주는 고통을 의미한다면, 불평등은 정반대 쪽의 과도한 풍요와 빈곤 사이의 격차가 빚어낸 불공정함이다. 그래서 빈곤과 불평등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룬다. 빈곤이 만연한 사회일수록 빈부격차, 불평등의 정도가 심한 경향이 있다.
반면, 한 나라 경제 수준의 지표라고 믿는 1인당 국민소득은 불평등 문제에 관한 한 전혀 무의미한 정보다.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가 넘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가장 평등한 국가군에, 그리고 영국, 미국, 일본 등은 가장 불평등한 그룹에 속한다. 1인당 평균소득과 빈부격차가 동시에 세계 최고를 달릴 수 있다는 얘기다. 오히려 3만 달러가 넘는다는 허울 좋은 수치는 우리에게 '이만하면 괜찮다'는 식의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작년 연말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세계불평등연구소(World Inequality Lab)가 '2022 세계불평등보고서'를 냈다. 이 연구소는 8년 전 <21세기 자본>을 써서 유명해진 토마 피케티도 참여하고 있는, 불평등문제 연구자들의 국제 네트워크이다. 우선 한국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세계적 추세처럼 우리나라도 지난 30년 동안 개인 간의 불평등 정도가 계속 증가해왔다. 이 보고서는 그 원인을 '1990년까지 경제성장을 이룩한 후에, 사회보장제도가 빈약한 가운데 자유화(liberalization)와 규제 완화(deregulation)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빈곤과 불평등 문제는 시대적 화두다. 국가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 긴급히 방역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 질병이다. 행여 '예로부터 가난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했다'느니, '개인이 근면 성실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라는 식의 시대착오적 둘러대기는 입에 올리지 말자. 이를 개인의 문제로 몰고 가면 '외환위기 직후 빈곤율과 실업률이 급상승한 건 불성실하고 나태한 사람들이 갑자기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해괴한 논리에 빠질 뿐이다.
위의 불평등보고서 역시, 전 지구적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나라 간의 정책 결과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평등은 언제나 정치적 선택(political choice)의 문제라고 명토 박고 있다. 그러면서 21세기에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은 불평등을 완화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임을 강조하면서, 정부가 누진적 조세제도(소득세 및 재산세)를 실시해서 재분배 정책의 재원으로 사용할 것을 강력히 조언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를 잘살게 하겠다고 공언했고, 당선된 현 대통령 역시 취임 후 국정 비전으로 "함께 잘사는 국민의 나라"를 제시했다. 표현이 다소 흐릿하고 벙벙하긴 하지만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갓 태어난 정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구호의 내용인즉, 기왕의 부자를 더욱 잘살게 하겠다는 뜻은 아닐 테니, 못사는 서민들의 삶을 끌어올려 빈부격차를 줄이겠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아, 마침내 불평등의 완화를 제일의 정책 목표로 삼는 따뜻한 정부가 탄생한 것인가?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후로 발표된 구체적 정책들은 예의 불평등보고서의 조언과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누진세제의 강화가 아니라 오히려 감세와 규제 완화를 골간으로 하는 정책들이다. 여기에는 정부 소유의 토지와 건물 16조 원 이상을 매각하는 국유재산 민영화 조치도 포함돼 있었다.
국민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 정책은 무릇 경험 과학에 근거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실증 자료의 논리적 분석 결과에 입각해야 하고, 그로 인해 효과에 대한 과학적 예측력이 높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에 시행했던 정책의 결과,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까지 부자 감세와 규제 완화, 민영화 등으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대부분 공허한 약속으로 끝이 났다. 부자(기업)들의 세금을 깎아주면 그만큼 투자가 확대되고 생산력이 높아져서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고 성장률이 높아질 거라는 예측은 역사상 번번이 틀렸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줄기차게 실험해 왔지만 일자리가 늘어나기는커녕 빈곤이 확산되고 불평등이 심해질 뿐이었다. 그러니 이번 법인세 인하가 투자의 증가를 가져올 거라는 윤석열 정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경제학의 기본도 모르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란 비판이 빗발친다.
이쯤 되면 신자유주의 정책 세트는 과학이라기보다 미신, 혹은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과거 정책의 발자취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하고, 오직 '시장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고색창연한 주문(呪文)만을 되뇐다. 세계불평등연구소의 보고서가 재분배 정책을 강조하는 것은, 1945년부터 약 30년간 서구의 자본주의가 비교적 평등했고 또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이 누진세제를 통한 보건과 교육, 그리고 만인을 위한 기회의 신장에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지난번 폭우로 인한 반지하 셋방에서의 죽음을 전하면서 '이번 폭우가 서울의 심각한 불평등을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온갖 문제들은 이처럼 불평등과 연결되고 불평등을 통해서 증폭된다. 이를 비껴갈 도리가 없다. 그리고 불평등 문제의 정공법은 국가가 거둬들이고 다시 나누는 재분배 정책이다. 근거 없는 장밋빛 허언(虛言)들은 우리의 상처를 더 깊게 할 뿐이다.
여기서 사족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른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사회적 경제를 육성하는 정책 역시 불평등 문제에 대한 정공법이 아님을 명확히 하자. 사회적 경제 지원 정책이 잘못됐다거나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적 경제 조직은 그 나름의 가치와 효용이 있고 따라서 번성,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재분배 효과가 미미한 사회적 경제 조직을 빈곤과 실업, 불평등의 해결 대안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것만큼 위험하고 해롭다. 재분배 정책의 강화 필요성을 한사코 부인하려는 자들이 자칫 온갖 짐을 애꿎은 사회적 경제에게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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