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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적 존재들의 생명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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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적 존재들의 생명 예찬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오성윤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

I. 근대의 "양계장", 혹은 "마당"에서 벗어나는 탈영토화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와는 달리 황동혁 감독의 영화 <도가니>를 보고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처럼 영화의 스크린은 문자가 지니는 문명의 언어와는 달리 생명의 언어이다. 물론, 문자가 만들어내는 것도 또한 생명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간접적인 생명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기독교 성서해석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근대의 문학비평을 비롯한 서구 근대 인문학 전반의 학문체계는 문자를 통한 이미지가 만드는 생명의 운동과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문자해석의 의미를 추구한다. 그래서 근대 문학비평과 근대 인문학은 서구적 근대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각각의 생명체들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인가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덫에 구속되어 있는 정의, 자유, 진보, 보수 등등의 이분법적 개념 속에 갇혀버린다. 그러나 영화의 스크린은 문자의 언어와는 달리 직접적인 생명의 이미지이다. 우리의 눈이 세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스크린에 등장하는 이미지의 운동과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운동과 변화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를 비롯한 "한류" 문화의 폭을 애니메이션의 영역까지 확장시킨 <마당을 나온 암탉>은 오늘날의 삶, 즉 근대적인 삶과 탈근대적인 삶의 유사성과 차이를 직접적인 생명의 이미지를 통하여 명료하게 보여준다.

근대의 이분법적 공간과는 달리 <마당을 나온 암탉>에는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성, 도시, 강호)이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성, 도시, 평원)처럼 세 개의 공간이 등장한다. 그 공간들은 "양계장"과 "마당"과 "자연"이다. <와호장룡>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성과 도시는 전쟁과 파괴의 감옥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성에서 생명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강호나 평원의 세계에서 생명의 구원을 받는다. 또한 공간적인 측면에서 강호나 평원의 세계가 도시를 에워싸고 있고, 도시가 성을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근대의 세계가 성과 평원, 그리고 도시와 자연의 이분법을 강요하여 근대인들은 성이나 도시는 안전한 곳이고 평원과 자연은 위험한 곳이라고 사유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이러한 근대적 이분법의 사유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 "잎싹(문소리 목소리 역)"이는 양계장에서 마당으로 탈영토화하는 꿈을 꾼다. 양계장은 근대의 대규모 농장이나 공장, 혹은 학교나 군대처럼 자본이나 권력을 가진 주인의 노예나 하인이 되어 "알 낳는 기계"가 되기를 강요한다. 다른 암탉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잎싹"이는 근대의 대규모 농장이나 공장, 혹은 학교나 군대처럼 양계장의 삶이 생명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삶이라는 것을 안다. 꿈꾸는 것이 앎이고, 앎이 곧 탈영토화이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잎싹"이가 양계장으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정착한 마당은 인간의 지배를 받는 동물원이다. 양계장의 암탉들이 먹고 살기 위하여 "알 낳는 기계"가 되는 공간이라면, 마당의 동물들은 인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또한 자신보다 약한 다른 동물들을 지배하는 인간이 되는 공간이다. 그들은 자신의 속성들을 잃어버리고 지배자 인간으로 산다. 마치 근대 일본의 식민지가 <마당을 나온 암탉>에 등장하는 양계장처럼 제국주의 국가의 권력과 자본을 위한 "알 낳는 기계"의 공간이라면, 일제 식민지로부터 탈영토화하여 만든 근대 대한민국의 공간은 미국을 대표로 하는 서구 백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또한 자신보다 약한 다른 대한민국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서구의 백인, 즉 미국인이 되는 공간이다. 근대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서구의 백인, 즉 미국인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속성들을 잃어버리고 아직도 서구의 백인, 즉 미국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잎싹"이는 자유를 꿈꾸었기 때문에 인간이 지배하는 마당이 생명의 속성을 빼앗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마당으로부터도 탈영토화한다. 또한 "잎싹"이의 탈영토화를 도와주는 존재는 양계장과 마당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도 아니고 또한 양계장과 마당에서 인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신의 자식이나 부모도 아니다.

II. 탈근대적 대자연의 삶

"잎싹"이의 탈영토화를 도와주는 존재는 그녀의 삶을 양육시키는 "나그네(최민식 목소리 분)"이다. "나그네"는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아니며, 인간이 만든 양계장이나 혹은 인간과 더불어 사는 마당에 있는 존재도 아니다. "나그네"는 지배와 피지배, 혹은 인간과 동물의 근대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즐기고 향유하는 존재이다. "잎싹"이는 "나그네"의 도움을 받아서 마침내 "나그네"의 삶처럼 수많은 각각의 삶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연의 나그네가 된다. 그 대자연의 공간에서 "잎싹"이는 "달수(박철민 목소리 역)"의 도움으로 자신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자유로운 삶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곳에도 위험은 존재한다. "애꾸눈(김상현 목소리 역)"이 호시탐탐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자신의 연인이거나 친구가 되어 대자연의 삶을 함께 살아가고 싶은 "나그네"에게는 이미 다른 짝이 있다. 그 외롭고 쓸쓸한 대자연의 공간에서 "잎싹"이는 마침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것은 아직 온전한 생명으로 잉태되지 않은 청둥오리의 알을 품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 새로운 생명이 온전하게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교육하는 것, 그리고 그 새로운 생명과 더불어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삶의 의미라는 것을 "잎싹"이는 발견하는 것이다.

"잎싹"이가 알을 품어서 태어난 "초록(유승호 목소리 역)"이는 닭이 아니라 청둥오리이다. "잎싹"이는 "나그네"가 죽으면서 가르쳐준 대로 "초록"이와 함께 다시 여행을 떠난다. 인간의 마당과 "애꾸눈"의 위험이 가까이에 있는 그곳은 죽음의 위험을 맞이하거나 혹은 집오리가 되어 "초록"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속성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록"이와 함께 하는 삶의 여행은 "잎싹"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차이를 발견하게 만든다. "초록"이에게는 양계장의 노예가 되는 경험도 없고, 또한 마당에서 인간의 하수인이 되는 경험도 없다. 그래서 "초록"이가 부닥치는 모든 자연의 삶은 "초록"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명의 속성들을 생성시키는 경험들이다. "초록"이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생성시킬 수 있는 모든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잎싹"이는 아니다. "잎싹"이는 양계장에서 "알 낳는 기계"로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혹은 마당에서 인간의 지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하늘 날 수 있는 능력과 물속을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겨버렸다. 근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일제 식민지의 경험과 해방 이후 60-70년대의 "조국 근대화" 경험으로 인하여 근대인들은 "잎싹"이와 마찬가지로 탈근대의 무한한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과 지구촌 세계의 다양한 물속을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겨버렸다.

"잎싹"이와 근대인들과의 차이는 근대인과 달리 "잎싹"이는 양계장이나 마당의 경험뿐만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영토화의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잎싹"이는 자신과 다른 차이를 억압하거나 파괴하고자 하는 근대인들의 삶이나 교육과는 달리 자신과 다른 "초록"이의 새로운 속성들을 발견하면서 그 속성들을 더욱 더 양육시킨다. "잎싹"이의 그러한 양육적 삶은 "초록"이의 새로운 경험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 상상은 "잎싹"이가 하늘을 날고 물속을 헤엄치는 상상이다. "잎싹"이처럼 우리도 양계장과 같은 식민지 경험이나 마당과 같은 근대화의 경험에서 벗어나 우리와 다른 "초록"이와 같은 21세기의 새로운 대한민국의 세대들이 날고 헤엄치는 무한한 하늘과 다양한 바다의 세계가 있는 그러한 탈근대의 세계를 상상해보자! 남과 북, 혹은 친미와 반미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초록"이처럼 남과 북의 하늘과 바다를 넘나들고 서로서로 어울려서 하나의 한반도와 하나의 동아시아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러한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여전히 근대인으로 남아있는 것은 "잎싹"이처럼 "초록"이의 다름을 더욱 더 양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차이를 억압하거나 파괴하고자 하는 식민지의 교육과 삶, 근대인들의 삶과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잎싹"이의 새로운 삶은 양계장이나 마당의 삶이 생명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양계장에서 그녀는 알을 낳기 위하여 산다. 그러나 그 알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하여 양계장과 마당에서 탈영토화 한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회사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무엇인가를 생산하기 위하여 산다. 그러나 우리가 생산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위한 것인가? 근대적 삶 속에서 우리는 자본과 권력의 노예는 아닌가? "잎싹"이처럼 우리도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탈영토화 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것은 근대의 철학적 논리나 과학적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 저항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잎싹"이의 삶은 그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잎싹"이는 죽음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죽음으로 저항한다. 그녀의 죽음의 저항이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잎싹"이의 실제적인 죽음 또한 새로운 삶을 잉태시키는 죽음이다. "잎싹"이가 대자연 속에서 "초록"이의 새로운 삶을 양육시키는 삶도 아름답거니와 또한 "애꾸눈"의 귀여운 자식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죽음도 아름답다. "잎싹"이의 삶과 죽음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감동은 철학적인 선과 악 혹은 과학적인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윤리이다.

III. 탈근대적 생명의 미학

"잎싹"이의 죽음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근대적인 삶과 죽음의 이분법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생명을 구성하는 두 요소들이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잎싹"이는 양계장에서 죽는다. 그래서 대자연의 삶을 얻는다. "초록"이가 다른 청둥오리들과 함께 기나긴 여행을 떠난 후에 "잎싹"이는 "애꾸눈"의 자식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자 결심한다. 그녀는 다시 죽음을 통하여 "애꾸눈"의 아름다운 자식들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잎싹"이의 삶은 마침내 영생하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탤런트 장자연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죽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 아닌가? 물론, 이러한 것은 철학적인 논리나 과학적인 판단이 아니다. "잎싹"이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그리고 그녀의 삶과 죽음의 아름다움은 탈근대적 생명의 미학이다. 근대의 철학적인 논리는 양계장과 마당을 비교할 수 있지만, 혹은 근대적인 과학적 판단은 양계장과 마당의 삶을 관찰할 수 있지만, 탈근대적 생명의 미학처럼 대자연의 삶을 구성하지 못한다. 그래서 철학이나 과학은 항상 새로운 예술 텍스트들을 통하여 새로운 논리와 판단을 만든다. 문제는 근대의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판단이 예술적 삶의 생성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탈근대의 세계에서 철학과 과학은 근대적 지식으로부터 탈영토화하여 탈근대적 세계로 재영토화해야만 한다. 철학은 지배자가 만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토대를 두는 죽음의 논리에서 벗어나 생명의 논리를 구성해야만 하고, 과학은 오직 인간의 시선으로만 보는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이 만드는 자연에 대한 파괴적 판단에서 벗어나 대자연의 생명들을 모델로 하는 생태적 배치의 세계를 고민해야만 한다. 영화 <도가니>와 <마당을 나온 암탉> 등등을 포함한 새로운 "한류" 문화는 그러한 생명의 논리와 생태적 배치를 위한 탈근대적 텍스트들이다. 탈근대적 생명의 미학을 토대로 한 아름다움의 삶을 사유하고 판단하는 차원에서 우리는 어린이와 여성을 비롯한 근대적 소수자들과 자연적 삶을 영위하는 아름다운 동물들보다도 못하다. 그들은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라는 근대적 철학과 과학의 학문적 이분법에 길들여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이분법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구성하는 생명의 논리를 느끼고 향유한다. 그러한 생명의 느낌과 향유는 철학적 논리나 과학적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잎싹"이처럼 삶의 관계를 통한 어린이 되기, 여성되기 그리고 동물 되기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본 관객들에게 "잎싹"이는 영원히 살아서 새로운 삶의 모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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