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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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4>
선생님들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여러 선생님들을 잊을 수 없다.고문(古文)의 김영배 선생님.나의 이름도 얼굴도 비슷하다고 애들이 ‘너희 형’ 어쩌구 했던 분인데 어느날 나를 교단으로 나오라고 해놓고 당시 유행이던 ‘실존주의’에 대해 말하라고 했다.뭘 말했는지 알 수 없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3>
박선생
1958년이었으니까 자유당 이승만 시대의 말기였다.고 3때였다.사회시간에 첫 번 들어선 자그마한 체구에 단단한 몸집, 흰 이마에 안경너머 날카로운 눈빛을 한 육군 대령제대의 박영호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영향은 아주 큰 것이었다.‘파루크라는 썩어빠진 놈이 왕으로 앉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2>
빨치산
이 사건의 기억은 또 하나의 사건을 바로 잇달아 기억나게 한다.어느 날 학교로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날더러 대뜸 목포의 로선생을 아느냐고 묻는다. 안다고 했더니 그 분이 지금 중앙청 앞 중학동에 계시는데 날 보고 싶어 하니 지금 곧 가지는 것이었다.놀라운 일이었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1>
하숙집들
그 밖에도 몇 군데의 하숙집들이 떠오른다.서대문에 있을 때다.학교에서 돌아와 석양 무렵이 되면 저녁을 일찍 먹고 폭격에서 살아남은 옛 주택가의 오래된 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붉은 벽돌집에 기어오르는 푸른 덩굴나무의 기이한 빛깔을 보고 그 집들로부터 울려나오는 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0>
공부
내가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한 것은 2학년 때부터다.코피를 흘리며 잠을 쫓으려고 허벅지를 쥐어뜯는 세월이 얼마만큼 지나자 공부에도 길이 열리고 습관이 붙고 재미가 나기 시작했다.그러나 다른 과목은 다 놓은 성적이고 기하까지도 우수했으나 대수만큼은 겨우 빵점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9>
문학의 밤
백일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3때까지 한 해에 한 차례씩, 세 번을 7대 사립고등학교 문학의 밤에 참가하여 시낭독을 했었다.세가지 장면이 떠오른다.하나는 덕수궁 근처의 폭격으로 무너진 한 건물터를 지나 내가 낙방한 배재 학교의 그 오래된 미국식 교실에서 행사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8>
백일장
내가 원주에서 돌아와 복학하고 이선생님을 만난지 얼마 안 된 가을에 서울시내 고등학생 백일장이 삼청공원에서 있었다.나는 김아무개라는 다른 친구 한사람과 함께 참가해서 시를 썼으나 입상도 못했고 시편 전체도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여기는 ‘무풍지대(無風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7>
삼청동
삼청동엔 그때 고검 검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외할머니의 동생 되시는 친척어른이 사셨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나는 그 집 사랑채에 묵으며 학교에 복학하였다. 하루에 꼭 서너 시간씩 잤을까?학교공부 외에도 늘 혼자서 공부만 했다.그것이 일단은 나의 정성이고 부모님께 대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6>
어쭈
고3 학생들은 으시대고 폼은 잡아도 좀 점잔을 빼는데 고2학생들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뻔질나게 고1 교실을 드나들며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잔소리를 하거나 때도 시도 없이 기합을 넣곤 했다. 그런데 그날도 고2의 한 간부학생이 하교시간인데도 두세 시간씩이나 교실에 붙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5>
미군
원주주변은 미군부대 천지였다.그리고 양공주들 천지였다.또 미군물품들의 천지였다.내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물질과 생각의 대부분은 무엇일까?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우리의 몸과 마음의 99%가 양키들의 물건과 생각일거라는 것이다. 맞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