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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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4>
귀향
학교는 문을 닫았다.그리고 캠퍼스에 군대가 진주하였다. 민통 간부들과 집권 민주당, 그리고 혁신계 정치인들은 모두 구속되었고 자유당계 부정선거 책임자들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다.민족일보가 폐간되었고 언론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살벌한 시절이었다.사람만이 아니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3>
판문점
'민통'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961년의 그 봄, 그때의 구호는 유명한 것이었다.'가자, 북으로!오라, 남으로!만나자, 판문점에서!''민통'은 남북통일을 위한 남북 대학생 간의 판문점회담을 제안하고 있었다.한국 전체가 흔들흔들했다.심한 동요였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2>
방랑
떠났다.서울을 떠나 나는 부모님이 계신 원주로 갔다. 내 집이었지만 나는 그 한때를 방랑으로 기억한다.내 집으로의 방랑!그러매 내 넋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일에 비추어 볼 때 내 집은 타향이고 부모님은 객지였다.한편으로 민통에 가입하지 않고 친구들이 추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1>
민통
통일과 혁명에 대한 젊은 군중적 정열의 참모부요, 대중적 민중행동의 '다이나모'는 서울대학교 중심으로 전국 대학에서 조직된 '민족통일연맹', 소위 '민통'이었다.'민통'의 격발로 한국사회에서 6·25 이후 죽어버렸던 정치적 정열이 되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00>
연극 2
그해 겨울 나는 세번째 연극에 들어갔다. 중앙 중·고등학교가 주관하고 당시의 집권당이었던 윤보선·장면 정권과 동아일보가 지원하는 '인촌 김성수'가 그것이다. 역시 중앙고 출신의 김기팔씨가 각본을 쓰고 KBS 사장을 지낸 적이 있는 최창봉 선생이 연출을 맡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9>
연극 1
미술학교의 데모는 성공했다. 문제교수 몇사람을 사퇴시켰고, 미학과를 문리대로 옮겼으며 학생과 업무와 커리큘럼 개혁을 시도한다는 내용이었으나 장발 학장은 그대로 유임했고, 아! 그래 우리는 바보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정권이 장발 학장의 형인 장면의 정권이었으니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8>
농성
'농성'이란 어두운 느낌의 어휘다. 그러나 미술학교의 그 농성은 꽃밭이었다. 수많은 여학생들, 가지각색 옷들로 자기 무늬를 개성적으로 드러내는 여학생들의 군중행동은 그 농성을 꽃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미술학교는 공업연구소의 우중충한 시멘트 실험실을 강의
'참 부처의 길에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7 ㆍ제2부 시작>
오늘은 단기 4335년, 서기 2002년, 양력으로 6월11일, 음력으로는 5월1일 경술(庚戌). 단오(端午)와 하지(夏至)가 멀지 않은 날이고 월드컵 대회중 한국미국전이 1대 1 동점(同點)으로 비긴 바로 그 이튿날이다. 이번 제2부부터 회고록이 끝나는 제3부까지 온라인에서는 인터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6 ㆍ제1부 끝>
4.19
그해 겨울. 내가 처음으로 참가한 연극작품은 프랑스의 띠에리 모니에 작 ‘암야의 집’이었다. 수준높은 반공 작품이었는데 나는 이 연극에서 주인공 하겐을 잡으러 가는 보안관 요셉 람메르라는 작은 단역이었다.주인공의 친구로써 강력한 공산주의자 청년을 짝사랑하는 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5>
전곡
미술학교에 있던 1학년 일년동안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회화과의 조풍삼이다.풍삼은 사람도 크고 듬직하고 어질디어진 사람이었지만 그림도 박력있고 깊이있는 그야말로 타고난 예술가였다. 그의 그림은 죠르쥬 루오의 자취가 있었으나 이미 그것을 넘어서는, 도리어 우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