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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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4>
미학
원주에서도 간혹 그림은 그렸다. 그러나 내 스스로 그림은 포기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그림 그리면 배고프다는 일념이 나를 마음속에서 변경시킨 것이다. 그러나 미술시간엔 역시 신이 났고 내 그림이 미술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아서 강원도 중학생 미술전에 출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3>
무실리
그러나 원주에서의 나의 소년기가 이런 어둡고 음침한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투명하고 화창한 아리따운 시절이 있었으니 나는 그 시절의 영상의 이름을 ‘무실리의 날들’이라고 부르겠다.‘무실리’는 원주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이고 그 무실리에는 ‘배부른 산’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2>
친구들
김재수가 생각난다.부모가 다 안계신 아이다. 누님 집에 얹혀있었는데 우리집 바로 옆집이었고 원주중학교의 동급생이었다.늘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맺혀있었다. 그런 것을 가끔 내게 내비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도 조금 우스운 것은 그 김재수의 슬픔을 내가 소설로 쓴 적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1>
극장
원주시절의 내 정신은 학교보다는 극장에 더 매달려 있었다.원주 전진극장은 판자집이었다. 판잣집 치고는 큰 판잣집이었지만.인근엔 군부대가 지천이어서 그 군인들이 주요 관객이었다. 주로 영화를 상영하였고 중간중간에 육군 군예대 소속의 악극단이나 창극단이 와 공연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0>
치악산
원주중학교 뒤편은 미군용 비행장이 있는 허허벌판이었고 그 벌판너머엔 눈쌓인 치악산이 있었다.은혜를 갚으려고 쇠북에 머리를 짖쪼아 죽는 꿩과 뱀의 전설이 있는 산 태백산중의 영검스런 봉우리들을 간직한 채 영월군과 원성군 중간에 불쑥 솟은 치악산.양길과 궁예가 웅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9>
밤
원주로 떠나기 며칠전 밤이었을게다. 언덕위의 우리집으로 가던 길인지, 아니면 우리집에서 외가로 가던 길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12시가 넘은 캄캄 밤중에 나는 검은 골목길에 홀로 서 있었다.바람은 불고 하늘에 달이 떠 있었는데 새카만 집들이 울렁울렁 숨을 쉬고 있었다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8>
연극
한동안 내겐 지독한 연극열이 붙어다녔다. 차차 말하게 되겠지만 그 씨앗이 이 무렵에 싹트지 않았나 싶다.‘만열네’의 연극이었는데 내 작은 외삼촌인 정일성이 대본을 쓰고 만열이가 연출하고 공수라는 키 큰 형이 임금을 하고 내가 간신배로 출연하는 사극이었다. 외가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7>
미술
그때중학 1학년 무렵.예술이라기보다 예술의 예감, 예술의 조짐 같은 것이 있었다.유년기에 그림에의 한(恨)같은 것이 있었는데 중학에 가면서 모르는 새 억압이 되었다. 그래 별로 심하게 그림에 기울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끔 그리기는 그렸다. 우선 미술선생이셨던 양수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6>
대전
전쟁은 끝이났고 휴전으로 남북은 항구적 분단 상태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 무렵 강원도 원주에 정착하셨다. 육군 군예대에서 직영하는 원주 군인극장에서였다. 아버지를 보러 원주로 가는 길에 꼭 하룻밤 묵어가야 했던 대전의 한 허름한 역전 여인숙이 생각난다. 다른 것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65>
천승세(千勝世)
여기까지 이르니 기억의 한 모퉁이에서 중학생 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고 우리 살던 연동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또 번개처럼 사라지곤 하던 한 소년이 떠오른다.천승세.소설가 천승세씨다.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 중학생으로 내 작은 외삼촌 정일성의 동급생이었다. 말투가 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