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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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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7>

삼청동

삼청동엔 그때 고검 검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외할머니의 동생 되시는 친척어른이 사셨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나는 그 집 사랑채에 묵으며 학교에 복학하였다.

하루에 꼭 서너 시간씩 잤을까?
학교공부 외에도 늘 혼자서 공부만 했다.
그것이 일단은 나의 정성이고 부모님께 대한 보은(報恩)이었지만, 사실은 깊은 슬픔이었던 것 같다. 성적은 대번에 상승했지만 자주 코피를 쏟았고 얼굴은 누우렇게 시들었다.

아마 그 무렵부터 시를 끄적이지 않았을까? 슬프고 괴팍하고 어두운 낱말들을 끄적거리지 않았을까?

가끔 일요일이면 원주에 내려가는 대신 책을 들고 삼청공원에 올라 소나무 전나무 숲속에 혼자서 가만히 앉아있곤 했으니까. 가만히 앉아 무얼했을까? 꿈을 꾸지 않았을까? 눈을 뜬채로 꾸는 백일몽?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불리는 그 공포에 가까운 슬픔과 눈부신 백일몽?

***명동**

서울은 폭격으로 인한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널려있었다. 그나마 큰 건물들이 남아 번화가의 모습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것이 명동이었다.

시집간 큰 이모네가 큰외삼촌과 함께 한약방을 차린 곳이 바로 명동이었고, 그 약방 건물 뒷채를 빌려 살림집을 차렸는데 나는 삼청동에서 그곳으로 옮겨 몇 달을 지낸 적이 있다.
밤낮으로 들리는 것은 경음악이고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다 들뜬 풍속뿐이었다.

열여섯 나이에 무엇을 알았겠는가마는 어림치라도 감촉된 것은 환락과 소비적인 유행과 절망과 깊은 부패였다.

그 무렵 학교 국어시간 숙제로 제출한 시 두 편이 선생님의 눈에 띈 것도 바로 그 시들이 열여섯 나이의 시 치고는 엉뚱하게도 명동의 그 들뜬 풍속과 그 화려한 외면 뒤의 깊은 부패의 냄새를 바탕에 짙게 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일은 방과 후 교무실로 와!’
국어선생님은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온 소설가 지망의 이인순 선생님이었다. 교무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부모님 직업과 함께 현재 살고있는 환경 등을 꼬치꼬치 물어보던 이선생님을 향하여 건너편 책상의 영어선생 김성모 선생님이 한마디 부조를 했다.

‘그 학생 우수한 학생입니다. 잘 좀 봐주시오.’
이선생님이 얼굴이 빨개지며 웃었다.
‘잘못이 있어서 부른게 아니에요. 하도 시가 괴상해서 환경을 알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어떻게 괴상해요? 괴상한 것은 요즈음 모더니슴 문학에선 흔한 거예요.’
‘글세 어린 나이에 모더니슴 경향이 나타나니 이상한 일이잖아요’
‘그래요. 모더니슴이…?’

이인순 선생님과 김성모 선생님은 그 때의 인연으로 내게 국문학과 영문학을 통해서 동양문학과 서양문학을 졸업할 때까지 거듭해 가르쳐주신 문학의 은사가 된 것이다.

이 선생님은 그때 자기 서가에 꽂혀있던 김성한(金成翰)의 ‘오분간(五分間)’이란 신간 단편집을, 그뒤엔 손창섭(孫昌涉)의 ‘인간상실’과 이상(李箱)과 김유정(金裕貞)의 단편집들을 빌려주셨고, 그리고 한두 달 뒤엔 한용운, 김소월, 김영랑과 서정주의 시집들을 차례로 빌려주셨으며 또 꼬박꼬박 독후감을 받으셨다. 그런가하면 영어의 김성모 선생님은 2학년이 되어서 나의 영어가 꽤 진척이 되었다 하시고 키이츠, 셸리, 바이런과 오든과 스티븐 스펜더를, 알렌 기스버그와 잭 케루악을, 그리고 엘리엍을 막 뒤섞어 빌려주셨다. 이것이 바야흐로 나의 본격적인 문학수업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이 선생님은 나를 방과 후 중국집에 데리고 가 맛있는 요리를 사주시며 집안형편을 자세히 묻고 웬만하면 명동을 떠나라고, 하숙이 힘들면 차라리 자취를 하라고 내내 권유하셨다.

그 뒤 나는 한동안 자취를 하다가 집안 경제형편이 조금 개선되면서부터는 내내 하숙을 하게 되었다.

명동을 떠나라는 것. 그것은 김소월 등의 한국적 서정을 애써 간직하라는 말씀이었고 명동을 떠나라는 것. 그것은 그 두 편의 시에서처럼 ‘김마담은 어젯밤 어디에 있었을까?’라고 겉만보고 힐난하지 말고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그 마담의 내면의 삶을 살필 수 있는 판단의 성숙과 관찰의 거리를 확보하라는 것으로 내겐 해석되었다.

그리고 김성모 선생님의 도움으로 나는 국문학과 민족문화 동양문화와 전통서정의 한계 안에 갇히지 않고 서양 및 현대에도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내가 동서양과 전통현대의 어느 한쪽에 국집하지 않고 양측의 융합의 입장을 가능한 한 항시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은 전혀 두 분 선생님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깊이 안도하며 버릇처럼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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