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0시 02분
홈
오피니언
정치
경제
사회
세계
문화
Books
전국
스페셜
협동조합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4>
주변
대학 일학년 때 내가 좋아하던 몇 친구들이 있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조명형(趙明衡)이다. 회화과 괴물인데 비쩍마른 친구가 말도 잘 안하고 술만 마시곤 했다. 그 무렵 유행하던 박서보 등의 추상파를 비판하는 나의 새로운 리얼리슴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나와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3>
김윤수(金潤洙) 현상
나는 분명 미학교수가 되려고 미학과에 간 것이다.그런데 입학 초기부터 내 눈에 들어온 교수란 사람들의 태도나 인품에서 도무지 학자는커녕 평균적인 지식인조차 될 수 없음이 자꾸 들어나 실망의 연속이었다. 내가 학교에 적을 두었던 길고 긴 7년 반동안 내내 이런 실상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2>
데쌍
미학교수가 되려고 지망한 미학과지만 과가 미술대학 안에 있는 한 미술학 쪽에 경사된 컬리큘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데쌍과 사군자와 미술사 시간이 많은 분량을 차지했던 것이 도리어 내겐 반가웠다.석고데쌍 시간이었다.석고데쌍은 해본적이 없어서 섬세한 면작업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1>
시험날
그날,비가 내리고 있었다.대학입학 시험을 치르는 이화동 미술대학 강의실은 어두운 편이었다.수학이 제일 큰 문제였다.그러나 나는 아예 방정식 등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 대신에 조합(組合 : 컴비네이션)이나 수열(數列) 따위를 달달 외우고 있었는데 조합 문제가 여럿 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90>
그레이엄 그린
가끔 나는 동숭동 서울 문리대 교실에서 있었던 문학 교수들의 특강이나 연구 발표회에 참석하곤 했다.조금 건방진 짓이었다.그러나 수확은 없었다.지금 생각나는 것은 황찬호 선생이다.영문과 황선생의 ‘그레이엄 그린 연구’ 특강은 내 삶과 문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9>
삼총사
문예반에 고2 때부터 참가한 내게 단짝 친구 둘이 있었다. 아마 그 두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문학의 길을 포기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만큼 셋은 가까웠고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다.지금은 떠나고 없는 고 이래수(李來秀)형의 혼백에는 안녕의 기도를, 그리고 소식을 알 길없는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8>
연애편지
나는 청소년기에 연애같은 연애를 제대로 해본적이 없다.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막연한 연애감정과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는 내게 연애편지를 대필해 달라는 친구들의 부탁은 왜 그리 끊이질 않았던지!밤하늘의 별이 어떻고 비오는 날에는 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7>
원주에서
일요일엔 대개 원주에 내려갔다가 월요일 새벽쯤에 돌아오곤 했다.청량리 역에서 토요일 저녁 화물차를 타면 서울에 하숙하거나 통근하는 또래의 서울 유학생들을 만났다. 같은 칸에 함께 모여서 한참을 떠들고 나면 바로 원주였다.방학 때도 어디 여행하지 않고 원주에서만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6>
검은 텐트
중동학교에서 그 무렵 가장 뛰어난 공부벌레가 한 반의 김창규(金昌奎)였다. 속초친구로서 서울 친척집에 얹혀있었는데 공부를 잘하고 인간미도 있어서 친구가 많이 따랐다.나는 그의 집에도 자주 갔고 일요일엔 고궁에 함께 가 사진도 찍곤 했다. 시험 때엔 그의 집에 가 함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85>
최선생님
아버지는 내가 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한때 물으셨다. 내가 일반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전제 밑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점을 확인하시고는 안심을 하셨고, 한걸음 더 나가 내게 보다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권장하셨으며 아버지의 목포 옛 친구로서 그 무렵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