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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구매 카페 운영하듯 국가를 만들면…

[복지국가SOCIETY] 경쟁의 사회에서 연대의 사회로

대학에 왔는데 할 게 없었다. 찾으면 있기야 했겠지만 굳이 힘들여 찾을 의욕이 없었다. 매일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니들 하고 싶은 거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어. 조금만 참아"라고 뻥 치는 소리와 새내기만 듣는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제 진짜 시작입니다, 여러분" 따위의 겁을 주는 건지 희망을 주는 건지 모를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솔직히 진짜로 대학에 오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지만, 사기 비슷한 걸 당했음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나온 시간을 반추할수록, 도대체 그 안에 내 선택은 몇 번이나 들어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지금까지 어른들 말을 너무 잘 들었다는 생각, 그리고 내 인생은 누가 위에서 굴리면 굴리는 대로 굴러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A라는 사회가 나를 길렀다면 나는 a같은 인간이 됐을 거고, B라는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b같은 인간으로 자랐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데는 내가 끼친 영향보다 '나'를 둘러싼 사회의 영향력이 더 크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나는 '우연한 존재'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내가 한낱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은 원래 가지고 있던 무기력증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므로 당연하게도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우연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인식의 세계를 '나'와 '나'의 여집합으로 나눈다고 가정했을 때, 첫째는 '나'가 '나'의 여집합인 사회로부터 분리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둘째는 '나'가 '나'의 여집합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먼저 선택한 것은 전자였다. 내가 표류하게 된 진짜 원인은 '나'의 여집합에 있었지만, 사회니 세상이니 하는 것보다는 '나'의 문제에 골몰하기가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과열 경쟁에 지친 대학생들의 퍼포먼스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에 관한 조언은 세상에 무수히 많았다. 생각해보기 전에는 몰랐는데, '나'의 여집합 따위보다는 '나' 자신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게 신상에 이롭다고 말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자기계발이니 힐링이니 꿈이니 하는 단어들과 관련된 명사들의 강연에 한동안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또래 전부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세계 위에 발을 딛고 선 개개의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를 밟고 서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다. 작가 신경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길을 걸을 때 자기 심장만 들여다보고 걷는 꼴이었다.

세태는 쉽게 변한다지만, 정말 이기적이고 인정없는 트렌드였다. 세상이 어떻게 되건 말건 나는 성공하고 싶다는 개인의 욕망, 당신이 패배자인 건 당신이 열등해서 그렇다는 관습적 편견, 성공하고 싶으면 너의 쓸모를 증명할 것을 권하는 사회에 품위나 배려 같은 것은 없었다. 게다가 모든 개인들이 모래 알갱이처럼 원자화된 상황에서 옆을 돌아보지 않고 나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했다가는 또 '우연한 존재'로 전락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내가 내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게 된 것은 우연히도 그 시대의 트렌드가 '자기 발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대'의 능력을 잃어버린 대한민국 청년 세대

나의 관심은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갔다. '나'가 '나'의 여집합을 압도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단수의 '나'로 부족하다면 복수의 '나' 집합이 집단으로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나는 그동안 젊은이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노교수들로부터 '연대'(連帶)에 관해서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중 제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신 교수님은 동기(同期)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해에 입학해 같은 학문적 지향을 할 동기들이니 서로 데면데면히 굴지 말고 두루 친하게 지내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교수님의 말 한마디에 '소 닭 보듯' 하던 동기들과 절친해지진 않았다. 그냥 '연대'라는 좋은 단어가 있었지, 하고 한 번 떠올려봤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대에 대한 나의 감상은 '듣기엔 좋은데,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것이었다. 아마 대다수의 내 또래들도 나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대를 어떻게 하는지 본 적도 없었고, 배운 적도 없었고, 더군다나 경험한 적은 더더욱 없으니까.

하지만 사실 우리는 연대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연대라는 단어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 비슷한 말로 협력이나 협동을 생각해보면 된다. 위에서 우리는 연대를 배운 적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교육 현장에서 협동이라는 말은 꽤 자주 쓰인다. 예를 들면, 수업 방식 중에 '협동 학습'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학생 여럿이 힘을 모아 목표한 내용을 익히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는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학생이 혼자서 공부하지만, 협동 학습을 할 때는 개인플레이를 고집하면 안 된다.

보통 조를 이루어서 발표하거나 작품을 만들거나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여러 명이 해야 할 분량을 조원들의 협력 없이 잘 해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느 한 명이 특출 나서 좋은 결과를 냈다 하더라도 '협동심'이라는 평가 항목 때문에 점수가 깎이기에 십상이다. 이런 협동 학습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조원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안을 만들어내는 협력의 기술이 차츰 생겨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협동 학습이 초등학교 때는 자주, 중학교 때는 이따금 이루어지다가 고등학교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생들은 협동을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협동이 불필요한 경쟁 상태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는 시점에서 학생들은 이미 연대 의식이나 협동심은 모두 잊어버리고 철저한 무한 경쟁의 마인드로 무장한 상태가 된다.

나와 내 또래들이 연대, 협력, 동기와 같은 단어에 별 감흥을 받지 못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대학 수업에서 협동 수업은 이름을 '조별 과제'로 바뀌어 다시 등장하지만 이미 경쟁과 개인플레이가 체화된 학생들에게 강제로 협동심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은 성가신 짐일 뿐이다. 초등·중학교에서와 달리 대학에서 조별 과제는 더 이상 학생들이 협력과 연대를 학습할 수 있는 장치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이미 연대의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다.

복지국가는 국가를 하나의 공동 구매 카페로 만들자는 아이디어 같은 것

내가 연대를 다시 떠올린 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산하의 '복지국가 청년네트워크'에서 기자단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기자단 앞에 '복지국가'란 단어를 달고 있었기 때문에 속성으로 복지국가에 관한 수업을 들었는데, 연대를 제도적으로 구체화한 걸 모으면 복지국가가 되겠구나 싶었다. 거창하게 말해 연대의 제도화이지, 복지국가는 사실 공동 구매 시스템을 사회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연대나 협력을 낯설어하는 대학생일지라도 공동 구매는 꽤 익숙할 것이다. 요즘엔 공동 구매 카페를 통해 옷, 신발, 화장품, 책, 심지어 휴대전화까지도 살 수 있다.

공동 구매 카페 운영자는 판매자와 소비자를 중개하는 역할을 하며, 공동 구매로 시중의 판매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런데 공동 구매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일정 인원 이상의 신청인이 모여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면 공동 구매가 이루어지지만, 신청인이 미달할 경우 공동 구매는 불발한다. 따라서 공동 구매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거꾸로 말하면, 공동 구매는 개인들의 협력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이다. 개별 행동에 익숙한 민간 영역에서조차도 개인들은 필요하다면 기꺼이 협력하고 있다.

복지국가는 국가를 하나의 공동 구매 카페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다. 국가라는 공동 구매 카페에서 카페 운영자는 정부이며, 소비자는 국민이 된다. 이 카페에서 취급하는 품목은 다양하다. 통칭 '복지'라고 불리는데, 보육, 교육, 의료, 노후, 주거 등 개인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들이다. 이미 현대인들은 위에서 열거한 상품들을 시장에서 구매하고 있다. 다만,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일부를 구입하느냐, 전부를 구입하느냐, 아니면 고급을 구입하느냐, 싸구려를 구입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복지국가 담론에서는 시장이 공급하는 상품 중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필요한 공공성이 큰 영역에 대해서는 시장과 국민 사이에 정부가 중개자로 나서자고 주장한다. 정부가 국민에 대한 직접 공급자로 나설 경우 민간이 하는 경우보다 몇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공급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품질이 균등하게 좋아지므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영역이 줄어든다. 둘째, 국가 조직을 통해 공급하므로 전문적이고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으며, 대량 생산과 대량 공급을 통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높은 품질의 상품을 공급할 수 있다. 셋째, 복지 서비스는 국내에서 생산하므로 내수 경기가 진작된다. 넷째, 잘 만들어진 복지 제도라면 개인은 평생 복지 서비스를 받으며 살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에 대한 애착심이 높아지고, 인적 자본의 축적에도 유리하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세금으로 나타나는 개인들의 연대와 협력을 전제로 한다.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

'나'들이 '나'의 여집합에 의해 멋대로 휘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복수의 '나' 집합들의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며, 그것이 제도적으로 구체화된 것이 복지국가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했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수십 년간 북유럽에서 이미 검증을 받아왔고, 성공 사례가 한두 개가 아니며, 무엇보다 그 제도 속에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좋았다. 연대라는 개념을 국가적으로 이용하다니, 생각할수록 기발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 한다는 무책임한 속담보다 훨씬 나았다.

연대 사회에서는 개인이 '우연한 존재'로 길러질 가능성이 낮다. 실패해도 옆에서 받쳐주는 이들이 있으니까 개인의 실질적인 자기 결정권이 보장된다. 사회는 더는 우연적인 조건에서 우연한 개인들을 양산하지 않는다. 연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억압-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평등하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들이 연대해서 이룬 사회는 개인과 적대하지 않는다. 따라서 연대하는 사회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와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는 대립적인 질문이 될 수 없다. 바라던 사람이 된 내가 바라던 사회를 만들며 살 것이므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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