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의 사전적 의미는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를 포함한 개인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중국이나 미국 등 다문화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들 나라와 한국을 비교해 볼 기회가 있었다. 나의 경험으로는 다른 나라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우리'라는 개념이 한국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우리'란 단어에는 사전적 정의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우리' 속에 담긴 강한 공동체 의식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인들은 흔히 '우리 가족',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나라' 등의 표현을 쓰곤 한다. 이런 표현들에는 '나'와 '우리'의 사이를 별개의 것으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 사이의 교집합적인 공간이 존재한다는 잠재적인 의식이 함의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를 단순히 여러 명의 '나'들을 모아놓은 하나의 집합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나 목표를 위해 더불어 살아가는 개인들의 공동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라는 공동체 안의 '나'들은 집단의 목표와 안녕, 그리고 구성원들의 총체적 행복을 위해 어느 정도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나라 등 '우리'라는 공동체의 이익과 행복도 함께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이런 표현들은 단순히 단어들의 조합이 아니다. 언어와 인간 의식 간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이 표현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경험으로는 국제적으로도 우리나라 정도의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공동체를 묘사할 때도 '우리'보다는 '나'가 더 앞서기 때문이다.
영어의 'we'라는 단어의 개념이 한글로 표현하는 '우리'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은 현지에서 조금만 지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양 문화권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와 가까운 중화 문화권에서조차도 '우리나라'라는 표현은 없다. 대신에 아국(我國)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우리 집' 대신에 아가(我家)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이웃 나라 문화권과 비교하더라도 대한민국은 전통적으로 공동체주의가 발달한 나라였다. 구성원들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개인의 기본권만 보장되면 공동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 자신의 희생은 감수하는 것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였다.
신자유주의 경쟁에 내몰린 한국 사람들
하지만 이런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국민의 의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예전만큼 '우리'란 단어가 내포하는 '공동체적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는 것 같다. 시골 인심이란 말은 이제 옛말이 됐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젊은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더는 과학자나 공익에 헌신하는 대통령 등이 아니다. 일확천금을 얻는 수단으로서 연예인이나, 성공의 상징인 부자로 바뀌었다.
이러한 세태는 가족 관계마저 변화시켰다. 비혼 가정이나 동거 가정을 양산하고 이혼율이 급증하며,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이 붕괴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 이익과 영달을 중요시하는 세태 앞에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해온 공동체의 가치들이 붕괴하고 있다.
왜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왜 한국인들은 '우리'보다 '나'를 우선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사회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한 경쟁"을 미덕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사회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 체제 내에서는 사회의 모든 면에 걸쳐 경쟁을 통한 효율의 극대화와 함께 승자독식의 사회, 즉 "다윈주의적 정글"이 펼쳐진다. 패자가 무참하게 도태되는 것이 당연한 이 양극화 구조 속에서 개인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생존"하기 위해 철저히 자신의 이익만 챙길 것을 강요받는다.
▲ 서울 중구 서울고용센터 1층에 붙어 있는 '취업 희망 메시지들'. 취업을 바라는 젊은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과 사회 전체를 위한 공익적 행위는 신자유주의의 사회경제적 기제에 의해 제약을 받고, 개인들은 본능적으로 '나'와 '나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한 경쟁의 쳇바퀴 위를 쓰러질 때까지 달리게 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언젠가부터 '나'보다 '우리'를 우선시하는 행위를 '미련한 바보짓'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사회 공동체의 가치보다는 돈과 개인적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개인의 영달만을 중요시하는 의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가 생겨났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사교육, '스펙' 쌓기, 학자금 대출, 월세 등의 일상적인 부담과 불안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는 사회와 공동체의 문제보다는 우선 자신들의 생존을 고민할 수밖에 없고, 또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이런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생존 방식이 낳은 물질만능주의는 심지어 자신의 물질적 풍요와 안정을 위해서는 도덕적 가치는 어느 정도 무시해도 되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사고방식을 우리 사회 내에 자리 잡게 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세태조차도 구조적으로 이기적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공동체적·윤리적 가치들을 외면하면서 생기는 내적 갈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심리적 자기방어 기제(self-defense mechanism)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미래 대한민국의 주체인 우리 청년들은 무한 경쟁으로 쓰러질 때까지 달리기만을 강요당하면서 눈가에 씌운 '가림막'으로 인해 옆을 돌아볼 수 없는 경주마가 되고 있다.
"복지국가"가 양대 유력 후보의 공통 공약이 된 이유
신자유주의 체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왜곡된 가치관을 강요하고 있다. 상품화된 '나'들은 좋은 일자리가 한정된 노동 시장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높은 가치에 판매하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제 살을 깎아 먹는 경쟁을 하고 있다. 또한 당사자인 젊은 세대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이러한 가치관을 당연시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이기주의가 개체를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인간 본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자신의 생존이 불안해진 상황에서 '우리'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우리'가 존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나'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개인의 자유의지(自由意志)이다. 나는 인간이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제도 혹은 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모든 행위와 사고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당하는 피동적인 존재는 아니라고 믿는다. 사회경제적 제도가 우리의 행위와 사고를 행복 추구와 반하는 방향으로 제약하고 있다면, 인간은 그 조건에서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고, 그 구조를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역량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현재 신자유주의에 의해 고립화된 개인들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무한 경쟁이 일상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체제의 문제점들은 양극화, 이기적 개인주의, 인간의 상품화, 물질만능주의 등 여러 가지가 있고, 이 때문에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매우 힘들고 더 이상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러한 극도의 긴장과 갈등을 상시로 필요로 하는 체제는 '국가 시스템'의 측면에서 볼 때 별로 효율적이지도 않고, 실제로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는 데 있다.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수출은 계속 증가하는데 고용은 늘어나지 않고, 국가 GDP가 계속 증가하는데도 우리 국민의 삶 다수는 점점 어려워지기만 하는 현실이 자각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자각이 2010년 지방 선거에서 보편적 무상 급식 논쟁을 통해 드러난 '보편적 복지'를 중심 이슈로 부각시켰고, 서울시장을 바꾸는 힘으로 나타났으며, 지난해 국회의원 총선과 대선에서는 토목 건설 공약을 거의 사라지게 하고, 경제 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정책들의 집합체인 "복지국가"를 양대 유력 후보의 공통 공약으로 내세우도록 압박하였다.
나는 현 대한민국의 상황을 개선하는 방안의 하나로 '우리'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재평가하고 강조해야 한다고 본다. 즉 우리 사회의 체제와 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전통과 가치관을 복원하는 것도 추구해야 하겠지만, 역으로 우리의 전통과 가치관을 기초로 해서 우리 사회의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 대전에서 첫 무상 급식이 시작된 2011년 6월 1일 한 초등학교 점심시간. ⓒ뉴시스 |
사회적 연대란 대한민국의 '나'들이 외면한 '우리'의 가치
이렇게 다수 국민의 삶이 각박하고 어려워진 상황에서는 '우리'란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공동체적 가치들은 아주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립된 개인의 생존과 자신만의 성공에 집착하면서 다수가 패자가 되고 불행해지는 구조를 심화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의식에 기초한 연대를 통해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관념적인 유희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방식의 실천 운동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에 대한 '나'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누진적 조세를 통해 양극화를 해소한다. 내가 갖춘 능력만큼 조금씩 세금을 더 내면, 고소득자들은 상당히 많은 세금을 내야만 하고 '우리' 사회는 나눌 수 있는 가용 자원이 커질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마련된 재원으로 의료, 교육, 주거 등의 기본적인 삶의 권리를 보편적으로 보장하여 누구나 인간으로서 '나'의 기본적인 존엄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소득이나 가정 형편에 상관없이 보편적인 보육과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면 누구나 동일선상에서 출발하는 기회의 균등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저소득 취약 계층에 대한 기초 생활 보장을 넘어 의료, 주거, 일자리, 노후 소득을 일정 정도 보장해야 한다. 그래야 직장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전쟁터가 아니고, 동료들과 어울려서 일하는 행복한 공동의 작업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이 보장된다면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여 창업도 하고 발명도 하는 실질적인 "창조 경제"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아온 북부 유럽과 중부 유럽의 나라들은 그러한 사회경제적 작동 원리를 사회에 적용시켜 지속적인 번영과 성장을 하고 있었다. 국민들 누구나 노력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는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 간의 '연대'를 통해 병들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방법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란 개념을 '국가'로 확산하여 구체화한다면, 결국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발전 방향은 "복지국가"라는 결론이 나온다. 복지국가란 '사회적 연대'를 통해 시민들의 행복 추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란 결국 대한민국의 '나'들이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가치이다. '나' 자신의 이익과 행복도 중요하지만 내가 속한 '우리'의 이익과 행복도 중요하다는 인식, 또 '우리'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 그리고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끔 하는 '우리'에 대한 책임 등이 사회적 연대의 핵심 요소들이다.
나는 이런 가치들에 기반을 두고, 더는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 방식을 고수할 필요 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그리하여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제도가 바로 복지국가라고 생각한다.
복지국가는 "제도적으로 국민들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주는 나라"
언어의 공시성(共時性)과 통시성(通時性)이 있다. 언어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 의식을 반영하며, 동시에 역사적인 변화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변화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말에는 아직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의 의식을 반영하는 말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나라'나 '우리 가족' 대신에 '내 나라' '내 집'이라는 표현을 쓰는 날이 올 것이다.
물론 현실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특히, 군사 독재와 달리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성상 투쟁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변화를 힘들게 하는 큰 요인이다. 여기에 현 상황을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더해지면 복지국가의 꿈은 더 요원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정말 감명 깊게 읽었던 글 중에 '불확실성에 대한 낙관'(The Optimism of Uncertainty)이라는 에세이가 있는데, 여기에서 미국의 역사학자 고 하워드 진 교수는 아무리 현실이 암울하더라도 우리는 포기하거나 냉소적으로 변하지 말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을 굳게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희망을 잃지 않으면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2013년 대한민국에 따듯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오랜 시간 외국에서 지내며 국내 뉴스를 간간이 인터넷으로 보면서 항상 하는 생각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는 참 '역동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항상 빨리 변하고, 현실이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아도, 어느 순간에 혁명적인 변화들이 벌어지는 것은 진 교수가 말하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언제나 열려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OECD 국가 중 전 연령대별 자살률 1위라는 가슴 아픈 통계가 우리 국민들의 불안과 이 사회의 지속 불가능성을 잘 말해주듯이,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친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열망은 우리가 지금 새로운 시대 정신으로 나가는 변곡점에 서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신호하고 있다.
복지국가는 "제도적으로 국민들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주는 나라"이다. 나는 이제 우리나라가 복지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지금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는 대한민국의 '나'들에게 복지국가에 대한 희망을 보여줄 수 있다면,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는 '우리'들의 나라도 머지않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