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의 실패: 큰 기대 속에 예측되지 않은 실패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좋은 일은 커녕 전혀 예기치 못했던 나쁜 일이 벌어진 대표적인 경우가 '참여정부의 실패'다.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희망'을 노래했고, 특권과 반칙이 없는 나라를 설파하였다. 탐욕과 독식이 아니라 공공성과 평등을 말하였다. 서민과 중산층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나라를 제시했다. 아픈 국민이 병원에 가지 못하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라고 웅변하여 보통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노동자도, 농민도, 청년학생도, 중산층도, 서민도 반겼다. 진보개혁 성향의 정책전문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시민사회 운동가들도 앞 다투어 지지를 선언하였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만 하면, 우리 사회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으로 기대하였다. 노무현 후보는 이러한 국민적 기대와 열망 덕분에 이회창 대세론을 꺾고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였다. 나도 대선 당시에 기대와 열망을 표출하며 열심히 뛰어다녔던 열성적인 지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노무현 후보 자문교수단'의 일원이었고, 보건의료분야의 대선 공약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당시 노무현 후보의 대선 공약은 진보성과 개혁적 진취성에서 나무랄 데 없었고, 매우 우수하였다. 2003년 2월 25일 참여정부가 임기를 시작하였을 때 많은 국민들은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였고, 실패는 예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성의 국정운영 보고서가 청와대에 제출되었고, 참여정부는 삼성과 손을 잡았다. 곧이어 참여정부는 성장주의를 표방하였고, 취약한 사회공공성을 확충하겠다는 공약을 내팽개치고, 대신에 영리병원 허용과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내용으로 하는 의료민영화를 추진하였다. 전국을 부동산 투기장으로 만들었고, 자산과 소득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 '투자자-국가 소송'과 같은 독소조항을 포함한 한미FTA를 밀어붙였고, 이에 반대하는 국민을 통상 국가를 저지하려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로 몰았다. 결국, 참여정부에서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골은 더 깊어졌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 별 기대 없는 예측된 실패와 정권심판 프레임
이번에는 이명박 정부의 실패를 살펴보자. 이는 '실패 또는 나쁜 일의 도래가 충분히 예측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명박 후보가 2008년 2월 25일 취임했을 때 이미 우리는 앞으로 5년 세월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 한숨 쉬며 걱정했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향후 5년의 세월을 견뎌낼 지 우려하고 걱정하였다. 정확하게도 이러한 우려와 걱정은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는 철저하게 실패하였다. 사회양극화와 민생불안은 갈수록 심해졌고, 저출산·고령화 시대의 복지수요는 충족되지 못하였다. 반면, 자산과 소득의 편중으로 대기업과 부자들은 더 강해졌고, 국가채무는 크게 늘어났다.
사회양극화와 민생불안의 고통이 극심하다. 그런데 참여정부의 실패와는 달리 '기대의 좌절에 따른 실망'은 별로 없다. 이명박 정권이 싫을 뿐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명박 정부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후보의 대선 공약은 처음부터 실패를 예고하고 있었다. 우파 신자유주의 노선에 따라 친재벌, 친시장, 친토건, 감세, 규제완화, 의료민영화 등을 공약하였고, 집권하자마자 그대로 밀어붙였다. 집권 초기에 촛불의 저항이 있었지만 정책 기조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2008년 세계적 경제위기의 여파에 대응하느라 재정지출을 확대한 것 정도가 집권 시나리오에 없던 것이었다.
당연히 '정권심판' 프레임이 형성되었다. 최근 20년 동안 대한민국 정치에서 매번 반복되었던 정치 프레임, 참여정부 후반기에 강력하게 작동하였던 바로 그 정치 프레임이다. 야당에게는 호기였고, 정치적 호시절이 도래하였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정권심판' 프레임은 가히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였고, 야권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러한 정치 프레임의 작동과 범야권의 정치적 기세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시기를 거쳐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승리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범야권에게 '정권심판' 프레임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요술방망이처럼 여겨졌다.
민주통합당의 총선 패배: 예측되지 않은 실패와 엄청난 충격
2012년 1월 민주통합당 지도부 경선과 전당대회가 열리면서 정당지지율이 여당을 10%나 앞섰다. 이는 정권심판 프레임에 컨벤션 효과가 더해진 결과였다.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자는 국민적 정서가 극대화된 시기였다. 이러한 정권심판 프레임은 한나라당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정책을 혁신하도록 강제하였다. 이는 여당이 정권심판 프레임에서 벗어나 4.11 총선에서 야당과 대등한 경쟁을 펼칠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새누리당은 이명박 정권과 차별화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결국 야당의 정권심판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통합민주당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정당 지지율은 여당보다 10% 포인트나 더 높았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4.11 총선 단독 과반도 가능하다는 결과가 연이어 발표되었다. 정부여당을 심판하려는 국민과 지지자들의 기대는 높아졌고, 총선 승리의 열망은 더욱 커졌다.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며, 실패할 수도 없는 선거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민주통합당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단독 과반은커녕 여당의 단독 과반을 허용했다. 총선 승리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열망을 더 키우고 확대 재생산해야 할 시기에 민주통합당은 '친노'세력인 당권파와 기득권 세력의 패권과 독식으로 개혁공천에 실패하였고, 유권자들은 오만한 정당을 외면하였다.
민주통합당의 전혀 '예측되지 않은 실패'는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끝장내고, 소위 '2013년 체제'로 불리는 평화복지국가를 건설하길 희망하는 국민적 기대와 열망이 무참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야권의 총선 패배로 인해 대선 승리의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었고,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함으로 인해 보수진영의 국회 지배를 허용한 입법부의 상황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개혁 드라이브에 상당한 부담과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민주통합당의 총선 패배를 평화복지국가의 꿈을 반신불수로 만들고 국민적 기대와 열망을 좌절시킨 역사적 대죄라고 규정하였다.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은 왜 실패하였는가? 한마디로 오만하고 무능했기 때문이다.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정권심판' 프레임 의존이라는 '새로운 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다. 자나 깨나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고 비리를 캐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여당은 비상대책위원회 활동을 통해 대담한 변신을 시도하였고, 연일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민주통합당은 가치와 노선을 놓고 비전과 정책 경쟁을 했어야 할 시간에 '정권심판' 프레임에 스스로 자신을 가두어 버렸다. 민주통합당은 총선 기간에도 내내 정권심판 프레임에만 의존하였고, 오히려 네거티브 전략을 공세적으로 이어갔다. 총선은 진흙탕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골수 지지자들을 제외한 보통의 국민들은 공천을 포함한 총선 과정에 실망하고 선거 정치를 멀리하게 되었다. '개념 없는 나눠먹기 공천'으로 총선 민심이 이반되고 있었음에도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이명박근혜"라는 희한한 조어를 동원하여 이명박 정권 심판의 칼날을 박근혜 위원장에게 겨누는 일이나 기획하였다. 유치함의 극치였다. 한명숙 전 대표도 수차례에 걸쳐 '조수석 논리'를 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실패의 운전자라면, 박근혜 위원장은 조수석에 앉아있던 사람이므로 실패의 공범이라는 논리다. 이는 논리적 정합성 여부를 떠나 그 유치함으로 인해 설득력이 약했다. 유권자들의 수준은 이 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대선이 남았다. 이제 '정권심판' 프레임이 정치 프레임으로서의 의미를 잃을 것이다. 첫째 이미 너무 많이 써먹어 약효가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대선은 회고적 투표가 아니라 비전을 보고 찍는 미래지향적 투표이기 때문이고, 셋째 여당의 유력한 대권후보인 박근혜 위원장도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를 통해 현 정권 심판자로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야권이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가치와 노선에 따라 '비전과 정책'을 내세우고 지속적으로 공론화하여 여당을 압도해야 한다. 지난 총선 때처럼 네거티브 전략으로 대선을 진흙탕 싸움판으로 만들어서는 승산이 없고, 설사 이기더라도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게 된다.
참여정부의 실패와 4.11 총선 패배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
참여정부가 출범하자 장차 좋은 일이 많을 것으로 기대했던 지지자들은 예기치 못했던 나쁜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지자 무척 당황하고 힘들어했다. 그들 중에는 일찌감치 지지를 철회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겠으나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심정으로 끝내 기대를 접지 않고 참여정부가 초심으로 회귀하여 개혁적 변화를 일으키길 바라며, 여전히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당시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건강보험연구원장으로 일하면서 참여정부의 의료민영화를 연구를 통해 정책적으로 비판하고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반대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때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의약부문의 개혁과제와 의료민영화 이슈가 한미FTA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반대와 논리적 비판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머물지 않고 대선 공약인 공공의료의 확충과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를 위해 투쟁했다.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적자 해소를 위해 건강보험료 인상을 추진하였고, 보장성 확대 준비를 서둘렀다. 마침내 참여정부 중반 무렵 <암부터 무상의료> 정책을 추진하였다.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이 정책을 공론화하고, 건강보험료를 더 내도록 국민을 설득하고 정부를 압박하였다.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의 수용으로 참여정부 출범 당시 약 55%였던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은 2007년에는 65%로 높아졌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2004년 말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을 개정하여 인천 송도 등 경제자유구역에서 외국인 영리병원의 한국인 진료를 허용했다. 또 2005년 보험업법을 개정하여 생명보험회사도 실손 의료보험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로써 과거에는 미국식의 실손 의료보험 사업에 진출할 수 없었던 생명보험회사들의 족쇄가 마침내 풀렸다. 이후 삼성생명 등 생명보험업계는 급속하게 시장을 확대하였고, 이건희 회장의 희망대로 10년 후 삼성의 먹고 살 걱정을 많이 덜어주었다. 지금 우리 국민의 80%는 민간의료보험 가입자이며, 서민가계의 부담은 크게 늘었다. 미국을 제외하면 이런 나라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골자는 '참여정부가 명백하게 실패했다'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지지자들에게 참여정부가 찬물을 끼얹는 수준의 실망감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실망감은 이미 예상되고 있던 실패가 그대로 현실화되는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러한 국민적 실망과 배신감은 참여정부 후반에 들어서면서 광범위한 민심이반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는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1,149만 표(48.7%)를 얻어 617만 표(26.1%)를 얻은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약 530만 표의 엄청난 차이로 대승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누구 탓인가? 답은 명백하다.
내가 나는 한, 참여정부는 선한 의지를 지닌 '온정주의' 정부였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한 의지와 온정적 심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진솔하고 소박했다. 잔꾀를 부리지도 않았고 직선적이었다. 나는 참여정부는 오만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무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심성과 정신은 선하고 온정적이었으나 참여정부의 노선과 정책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선별주의 복지정책의 결합체였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의 정책 입안과 집행을 경제 관료들에게 의존하였고, 정권에 참여한 개혁세력은 주변화 되었다. 너무 일찍 삼성과 손잡고 신자유주의 기존 질서에 투항하였던 것이다. 이게 다 '무능'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민주통합당의 총선 실패는 '무능+오만'의 소산이었다. 급하게 여기저기서 미사여구를 가져와 그럴듯한 강령과 정책은 만들었지만 민주통합당의 주요 구성원 대부분은 이게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총선에 임했으니, 이 정당은 가치와 정책에서 무능의 극치였다.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의 의미와 상호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또, 이 두 가지의 과제와 복지국가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국민을 설득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태에서는 집권을 해도 좋은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결국, 또 다시 실패한 정권이 반복될 것이다.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의 '오만'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진 그대로다. '친노' 핵심세력을 중심으로 당권파가 권력을 독점하고 나눠먹기 공천을 함으로써 국민적 기대를 저버렸다. 총선 패배 후 세상의 여론은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한명숙 전 대표가 물러났다. 그러나 '친노' 핵심세력의 '오만'은 계속되었다. 이른바 '당권 담합'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한 가운데 이해찬 상임고문과 문재인 상임고문이 위치해 있다. 앞으로 이런 상황을 혁신하지 못한다면 민주통합당은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다. 성찰과 반성, 지난한 공부, 그리고 국민과 함께 하려는 '비전과 정책의 공론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 서둘러야 한다.
복지국가를 위한 정치적 과제
우리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참여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이 가속화되고 있던 2006년 겨울부터 사회양극화와 민생불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복지와 경제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성찰하고 해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2007년 7월에 출범하였다. 우리는 양극화와 민생불안은 경제의 신자유주의와 복지의 선별주의 정책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으며, 결국 감세와 규제완화의 '작은 정부-큰 시장' 노선을 버리고 개입주의 경제민주화 조치를 통해 공정한 경제를 달성해야 하고, 선별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적 복지의 실질적 제도화를 통해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게 역동적 복지국가론이다.
내가 여기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출범 배경과 역동적 복지국가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지국가는 '참여정부의 실패'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참여정부의 '무능'을 지난 4.11 총선을 거치는 동안 민주통합당의 '무능'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민주통합당이 '오만'하기까지 하니, 이명박 정부의 실패로 인해 힘들어 하는 보통 사람들은 어디에 희망을 걸고 누구에게 기대야 하는가. 정당정치가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유능'하고 역동적이며, 희망을 주는, 국민과 함께 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복지국가 건설 정당, 새로운 민주통합당의 모습을 보고 싶다.
지난 10여 년 동안 계속 악화된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민생불안을 넘어설 비전과 구체적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과 함께 토론하고 내용을 공유해야 한다. 복지국가 비전과 정책 대장정에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민주통합당이 바뀌어야 한다. 대대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국회의원들과 당원들이 먼저 공부를 시작하고, 전국 각지에서 복지국가 비전과 정책 토론의 장을 열어야 한다. 비전은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 조치를 통한 보편주의 역동적 복지국가의 건설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주요 정책은 우리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지난 총선 시기에 이미 발표한 바 있다. '10+2' 정책공약이 그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0세에서 5세까지의 모든 아동들에게 월 10만원의 아동수당을 지급한다.
2) 아이들을 육아지원시설에 안심하고 맡길 수 있도록 한다.
3) 초, 중, 고등학교의 교사 수를 늘려 모든 학교를 혁신학교 수준으로 만들며, 학교 폭력과 왕따를 해결하고 사교육비 부담이 없도록 한다.
4) 생활비를 포함하여 대학등록금 '무이자 완전 후불제'를 실시하여 대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 기회의 실질적 평등을 보장한다.
5)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하도록 한다.
6) 주거의 제공을 국가의 기본 의무로 규정하여, 공공임대주택 확대와 월세 지원 등으로 국민들의 주거비 부담을 해소한다.
7) 모든 어르신들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지금의 두 배(매달 18만원)로 지급한다.
8) 비정규직 비율을 절반으로 감축하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철폐한다.
9) 최저임금을 전체 노동자 임금의 절반 수준으로 인상하고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실업부조를 도입하며, 고용보험의 사회안전망 기능을 대폭 강화한다.
10) 복지국가의 '공정한 경제' 실현을 위한 실질적 경제민주화 조치를 추진한다.
+1) 복지국가 공약 시행을 위한 소요 예산과 재원 대책을 마련한다.
+2)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100명 이상으로 늘리고,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마련하여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위의 '10+2' 정책공약 중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선정하여 전면에 내세우고, 새누리당과 전면적으로 각을 세우며,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나서자는 것이다. 역동적 복지국가로 가는 관제고지가 되어야 할 핵심 정책 세 가지는 5)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 9) 노동시장의 양극화 해소 정책, 그리고 +2)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다.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의 의미와 중요성
▲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는 건강보험비 1만1000원을 더 내고 모든 의료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하자는 모토를 걸고 있다. 사진은 건강보험 하나로 거리서명에 참여하는 시민. ⓒ프레시안(자료사진) |
이를 위해, 가입자인 국민, 사용자인 기업, 그리고 정부가 건강보험료를 기꺼이 더 부담하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요구된다. 이러한 합의는 사회운동과 정당정치가 함께 기울이는 노력을 통해 성립될 수 있는데, 이는 한국 의료의 선진화와 보편적 복지국가를 앞당길 시대적 과제다. 대선을 앞둔 지금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가 각별하게 중요한 이유다. 유럽 복지국가들에서는 국가의 공적의료보장으로 의료비의 대부분이 해결되므로 민간의료보험에 별도로 가입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가계의 이중부담과 소득계층 간 의료이용의 형평성 문제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상의 무상의료'를 시행하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을 실현하면, 소득계층 간에 의료이용의 형평성이 크게 높아진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상향평준화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만끽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의료불안으로부터 해방된 '건강하고 행복한' 국민, 즉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의 수준이 크게 높아지므로 경제 성장의 우월한 조건을 확보하게 된다. 건강한 국민이 유능하고 창의적인 노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모든 병원비를 건강보험 하나로'를 통해 '사실상의 무상의료'를 실현하게 되면, 우리도 유럽의 선진 복지국가들처럼 높은 형평성, 높은 거시적 효율성,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가진 공공성 높은 국가의료제도를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건강보험료를 30% 정도 더 내야 한다. 사용자(기업)와 정부도 30%를 더 부담한다. 이렇게 하면, 2012년 기준으로 연간 42.9조 원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57조 원으로 늘어날 것인데, 이 돈(14.1조 원)으로 ① 상급병실, 고가의 진단·치료, 선택진료, 환자간병, 노인틀니 등 비급여 항목을 건강보험 급여로 전환할 수 있고, ② 입원 중심 병원진료비의 90% 이상을 보장할 수 있고, ③ 환자의 연간 총 진료비가 100만 원을 넘지 않도록 '본인부담금 100만 원 상한제'를 실시할 수 있고, ④ 저소득층과 중소영세사업장의 건강보험료를 면제하거나 지원함으로써 의료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네 가계의 의료비 불안이 해소되고, '사실상의 무상의료'가 실현된다. 민생의 핵심 요소인 의료문제를 보편주의 원리에 따라 정치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은 단지 복지 확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성장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나는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을 통한 '사실상의 무상의료' 실현은 보편적 복지의 성공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정책 이슈가 될 것으로 본다. 범야권의 정당정치가 '무능과 오만'을 벗고 유능하고 겸손하게 국민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일대 혁신을 단행한다면,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은 보편적 복지국가의 문을 힘차게 여는 정치사회적 일대 사건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실상의 무상의료' 정책은 온 국민이 부담과 혜택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되며, 둘째 이 정책에 소요되는 공적 재원의 규모가 매우 크고, 셋째 의료민영화 추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의료공공성 정책의 정수이며, 넷째 민간의료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삼성생명 등 재벌에 속한 금융자본인 보험회사들의 영리추구와 정면으로 배치되며, 다섯째 국민 간의 사회연대성 제고와 사회통합의 좋은 선례가 되며, 여섯째 이를 통해 강화된 의료공공성 체계가 거시적으로 효율적이며 형평성뿐만 아니라 의료서비스의 질도 우수하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전반적 기대를 높여주며, 일곱째 의료공공성 강화를 통해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를 크게 늘려준다는 점 때문이다.
노동시장 양극화 해소 정책의 의미와 중요성
경제민주화 과제의 핵심은 노동시장의 양극화 해소다. 일자리가 10%의 좋은 일자리와 90%의 나쁜 일자리로 양극화 되면서 거대한 두 개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한번 나쁜 일자리 트랙으로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노동시장의 이동성이 매우 낮아졌다. 그래서 10%의 좋은 일자리를 놓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진다. 이것 때문에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왜곡된다. 좋은 일자리 쟁취에 유리하도록 대학이 서열화 되고, 입시교육이 심화되고, 적성과 특기와 무관하게 모두가 안정적인 일자리를 선호하는 직업 선택의 보수화 경향이 강화됨에 따라 기업가적 도전정신이 실종되고 있다.
평균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중심으로 노동시장이 단계적으로 수렴되도록 해서 일자리의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평균임금의 37%에 불과한 최저임금을 조속히 평균임금의 50%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이건 결코 간단한 과제가 아니다. 매우 어렵다. 하지만 반드시 성취해야 할 보편적 복지국가의 관제고지에 해당한다. 국제적으로 현저히 낮은 현재의 최저임금도 못 받는 임금소득자가 200만 명에 달한다. 최저임금을 획기적으로 인상하면 이러한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고, 법적 단속을 강화하면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많은 영세사업자들이 도산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경제 산업과 일자리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러한 개혁은 '자유 시장'에서 저절로 일어나지 않으므로 정부가 나서야 한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요구된다. 영세사업장의 도산이나 해고로 발생한 실업자들은 직업훈련을 통해 새로운 인력으로 재편하고, 취업을 알선해야 한다. 이들의 직업훈련과 기초생계 지원에 필요한 재원은 정부재정에서 조달해야 한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실업부조의 결합 모델이다.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정책이 요구된다. 중소기업 등 산업분야의 일자리 확충 노력과 함께 공공분야의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대폭 늘려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저소득 임금노동자의 처지가 크게 개선되면 결과적으로 경제 산업의 양극화도 함께 개선될 것이다. 또, 일자리 양극화 문제는 임금의 양극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별 복지의 격차가 일자리 양극화의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걸 해소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가 답이다. 4대 사회보험을 보편주의 원리에 따라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사각지대를 없애고 보장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능력이 모자라는 기업의 경우에는 정부가 사회보험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 보육과 교육 등의 사회서비스에 대한 실질적 접근성을 평등하게 보장해야 한다. 결국, 어느 회사에서 일하든 복지만큼은 보편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복지국가 운동 진영의 정치적 과제
보편주의 역동적 복지국가는 복지의 단순한 확대에 그치는 게 아니며, 우리나라가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민생불안을 넘어 장차 선진 복지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거대한 경제 성장 노선이자 국민행복 프로젝트다. 이는 우리사회의 운영원리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진 국민들이 급속하게 늘고 있다. 각자도생의 방식을 넘어 '함께' '더불어' 방식으로 우리네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복지와 성장을 하나의 묶음으로 간주하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서민들의 절박한 목소리는 이미 이러한 인식과 함께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묶이고 있다.
역동적 복지국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변화와 함께 국민부담의 증가가 수반된다. 세금을 더 내야 하고, 국민건강보험료와 고용보험료도 더 내야 한다. 빈곤층을 제외한 약 80%의 국민은 지금 보다 건강보험료를 30% 정도 더 내야 한다. 상위 20%의 국민은 세금을 지금보다 더 내야 하고, 특히 부자들은 더 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은 GDP의 19.3%, 국민부담률은 25.2%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은 각각 25.8%와 34.8%이다. 결국, 우리나라가 OECD 평균 수준의 복지국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으로 지금 보다 30% 정도를 더 부담해야 한다.
이러한 비전과 구체적인 정책으로 국민과 넓게 소통하고, 그 힘으로 이번 대선에서 새누리당과 정면 승부를 해야 한다. '정권심판' 프레임은 그대로 살려가되, 네거티브 전략의 진흙탕 싸움은 하지 말고, 철저하게 비전과 정책으로 승부를 봐야한다. 그래야 이길 수 있고, 국민적 에너지를 모아 복지국가 건설에 성공할 수 있다.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하나의 정파나 특정 정치세력만으로는 해내기 어렵다. 그래서 '복지국가 운동 진영'이 요구된다. 진영이 모두 나서야 한다. 복지국가 운동 진영에는 민주통합당 등의 범야 정치권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복지국가 운동세력, 복지국가를 향한 기대와 열망을 지닌 모든 국민이 포함된다.
이러한 에너지를 제대로 묶어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당을 혁신하고 복지국가 정당정치에 적합하도록 개혁하는 과제가 필요하다. 당장에는 이번 대선에서 이길 수 있도록 민주통합당과 진보정당, 그리고 시민사회에 흩어져있는 복지국가 역량을 최대한 결집하려는 정치사회적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이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정치제도 자체의 개편을 추진해야 한다. 지역구에 기반을 둔 현재의 '소선거구 다수대표제' 국회의원 선출제도로는 보편주의 복지국가에 부합하도록 정책을 장기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할 만한 인재들이 정치권에 안정적으로 참여하고, 합의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다양한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다수의 정당들이 원내에 진출하여 상시적으로 복지국가를 위한 정책 연합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정권의 향배와 상관없이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안정적 정책 추진이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 우선 이번 대선을 계기로 여야 정당과 주요 대선 후보들이 모두 비례대표를 기존의 54석에서 최소 50석 이상 더 늘리고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데 합의해야 한다. 민주통합당과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의 제 세력들 간에 이러한 복지국가 정당정치 개혁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면, 대선 승리의 기운은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는 이 모든 일을 공론화 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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