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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민주화, 벌써 흘러간 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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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민주화, 벌써 흘러간 물인가?

[데스크 칼럼] 새누리당 실력이 <조선> 베끼는 수준이라니

'데스크 칼럼' 란이 올해 초 신설됐다. '뭘 쓸지'를 정하는 회의가 매주 금요일마다 열린다. 그 주의 현안이 주로 거론된다. 이번 주라면, '불법 사찰' 논란이 최대 현안이다. 관련 기록을 연일 깨뜨리며 진행되는 언론 파업도 후보 물망에 올랐다.

<조선> 기사 베낀 새누리당 정책 브리핑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무상의료' 공약을 둘러싼 논란이 발단이었다. 새누리당은 지난달 28일 정책위 브리핑을 통해 야당의 보건복지 공약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주통합당은 무상의료를 시행했을 나타나는 의료이용 증가를 완전히 배제해 혼란을 가져온 2006년 '6세 이하 어린이에 무상입원비' 정책의 교훈을 잊는 우를 범하고 있음. 2006년 6세 미만 소아 입원 시 본인부담 면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들의 입원비가 39% 급증함에 따라 본인부담율(10%)을 다시 도입한 바 있음"이라는 내용이다.

정책 공약의 현실성을 따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전제로 삼은 사례가 오류이기 때문이다. 2006년, 6세미만 소아의 입원 진료비가 39%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무상의료정책 때문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신생아 진료비용이 산모 진료비용에 합산됐다. 그런데 하필 2006년부터 산모와 신생아의 진료비가 따로 계산됐다. 그래서 2006년 6세미만 소아의 입원 진료비가 크게 뛰어오른 듯 보이는 것이다.

야당의 복지공약이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허술한 대목이 많다. 다만 새누리당이 콕 짚어서 거론한 사례가 오류일 따름이다. 다른 적절한 사례를 골랐더라면, 무상의료 논쟁은 보다 생산적으로 진행됐을 게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어쩌다 저런 엉뚱한 사례를 골라서 망신을 당했을까. 답은 지난해 1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있다. "[복지 논쟁] 盧정부때 시도한 무상의료, 2년도 못 버티고 폐기됐다"라는 기사다. 새누리당이 거론한 사례는 이 기사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실상 <조선일보> 기사를 베껴서 만든 정책 자료인 셈이다. 이 기사는 <조선일보>에 실린 직후에도 사실관계가 왜곡됐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조선일보> 기사를 베꼈던 새누리당 정책 담당자가 당시 제기됐던 비판까지 챙기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경제 민주화, 벌써 '흘러간 물'인가?

이 사건이 유난히 씁쓸했던 이유는, 보다 깊은 데 있다. 정치권 전체가 '좌클릭'했다는 평가가 나온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여당과 야당이 모두 재벌 개혁 목소리를 냈던 이들을 영입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양극화 해소, 복지 강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주장을 한데 아우르는 구호가 '경제 민주화'였다.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의 정강에 '경제 민주화'가 포함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총선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금, 당시 흔적은 찾기 힘들다. 재벌 개혁에 적극적인 이들은 대부분 공천을 받지 못했다. 복지 공약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다. <조선일보> 기사를 베껴서 만든 정책 자료는 한 사례일 뿐이다. 복지 정책을 다루는 집권 여당의 '실력'이 그 정도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허술한 면모에 대해 다들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경제 민주화' 구호로 묶였던 재벌개혁, 복지 강화, 양극화 해소 등의 의제는 이미 '흘러간 물'이 된 모양이다.

물론, 정치는 사회운동과 다르다. 그날그날의 여론 동향에 흔들리지 않고, 중요한 의제를 꾸준히 밀어붙이는 게 사회운동이다. 반면, 정치는 주식시장 시세와 닮았다. 매 순간, 국민 여론을 그대로 반영한다. 따라서 재벌개혁, 복지 강화, 양극화 해소 등의 의제가 국민 사이에서도 '흘러간 물'이 됐다면 여, 야 정치권의 현 상황을 꼭 비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중의 지식 수요에 가장 민감한 업종이 출판업이다. 그런데 최근 3년 사이 출판 동향을 보면, 재벌개혁, 복지 강화, 양극화 해소 등을 다룬 책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시장의 반응이 좋으니 그런 것이다. 재테크 서적이 출판시장의 주류였던 시절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다. 대중, 적어도 독서를 하는 대중의 관심 방향은 '경제 민주화'를 향하고 있다. '경제 민주화'는 '흘러간 물'이 아니다.

아주 최근 사례만 봐도, "보편적 복지가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의 대담집이 나왔다. 또 '삼성 저격수'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의 책도 나왔다. 김 소장의 저술 가운데 공동저술 방식이 아니면서 대중을 상대로 한 것으로는 처음 나온 책이다. 그뿐인가. '삼성 불매운동'을 주도했던 김상봉 전남대 교수의 책도 나왔다. 이들 책은 주장의 방향이 모두 제각각이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거대담론'을 다룬다는 점이다. 재벌 개혁, 복지 강화 등 진보적인 문제의식으로 경제 전체를 꿰는 내용이다. 출판 시장에선 경제 민주화 담론이 풍성하게 무르익었다.

보수도 요구하는 재벌 개혁, 하지만 총선에선…

그런데 정치권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고(故) 김대중 전(前) 대통령은 "국민보다 반걸음 앞서 가는 게 정치"라는 말을 종종 했다. 옳은 말이다. 대중보다 너무 앞서가는 정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경제 민주화' 담론만 놓고 보면, 지금의 정치권은 국민보다 한참 뒤쳐져 있다.

굳이 '출판 수요'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경제 민주화'가 시대적 대세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여당과 야당, 그리고 정부의 행보, 언론의 최근 보도 동향 등이 모두 '경제 민주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재벌 개혁. 대기업이 떡볶이, 문방구 사업까지 진출한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해서 대기업 사업 분야 규제 움직임의 불을 지핀 게 <조선일보>였다. 당선 직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찾아서 재벌 총수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과시했던 이명박 대통령 역시 임기 중반부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외쳤다. 딱히 진보, 개혁 성향이라고 할 수 없는 정운찬 전 총리 역시 동반성장위원장을 지내면서 대기업의 중소기업 쥐어짜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연한 일이다. 동네 상점만 돌아다녀도, 재벌의 횡포를 실감하게 된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대형 마트가 동네 상권을 망가뜨렸다는 성토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재벌 개혁은 이제 진보‧개혁 진영에서만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다. 이른바 낙수 효과(트리클 다운 효과, 대기업 및 부유층의 투자·소비 증가가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로까지 이어져 국가 전체의 경기부양효과로 나타나는 현상)를 믿는 이들은 이제 보수 진영에서도 찾기 힘들다. 대신, '시장의 포식자'인 재벌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공감을 산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대선 후보 급으로 격상된 이유 중 하나도 '삼성 동물원' 발언 때문이었다. 재벌 개혁은 정치적인 인기까지 따르는 의제다. 그런데 정작 총선이 다가오자, 재벌 개혁 의제가 사라졌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교육 양극화' 외면할 거면, 이준석은 왜 영입했나?

그리고 양극화 해소. 새누리당은 이른바 '공부의 신'으로 불리는 강성태 씨를 한때 비례대표 후보로 검토했다고 한다. 또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무료과외 활동을 했던 이준석 씨를 비상대책위원으로 뽑았다. 모두 '교육 양극화' 해소와 맞물려 있다. 물론, 개인 차원에서 하는 '무료과외'가 '교육 양극화'를 얼마나 완화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조차 '교육 양극화'를 포함한 사회, 경제적 양극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새누리당이 갑자기 진보적으로 바뀌었다기보다는 대중의 요구가 워낙 절박한 탓이라고 보는 게 옳다.

'가난한 수재'가 혼자 힘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입신출세한 이야기는 이제 드라마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시청자들이 현실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에 입학한 학생들의 부모 가운데 부유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꾸준히 늘어났다. 각종 고시 합격자 및 법관‧의사‧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부잣집 자식이 좋은 직업, 높은 학력과 학벌을 얻고 가난한 집 자식은 정반대가 되는 구조가 굳어졌다. 재산뿐 아니라 직업‧학력‧학벌 등까지 대물림하는 시대가 됐다.

여기엔 공부하는 데 드는 비용 자체가 늘어난 상황도 한 몫 한다. 방과 후 교실이나 도서관, 독서실, 가정 등에서 혼자 공부하는 우등생은 점점 줄어든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사교육이 필수로 여겨진다. 학생들의 사교육 의존이 거의 중독 수준으로 심각한 탓이다. 이런 구조에선 사교육비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부잣집 자식들이 더욱 유리하다. 새누리당이 이준석 씨 등 '무료과외'를 하는 명문대 졸업생에게 관심을 둔 것은 이런 진단에 따른 처방으로 보인다. 대중의 요구를 파악하는 더듬이는 살아있었던 게다. 그러나 진짜 대책은 없다. 소수의 '무료과외' 봉사활동이 '교육 양극화' 해소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게다가 이런 수준의 담론마저 총선이 다가오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청년 후보 영입하며, 청년의 불안에는 무대책

복지 강화도 마찬가지다. '무상급식'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언제 이야기인가 싶다. 어느 순간, 관심이 말라붙었다. 저자들의 의도와 달리, <88만원 세대>가 보수 진영에서도 화제가 됐던 데는 이유가 있다. 요즘 청년들이 옛날과 다르다는 데는 누구나 공감하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를 직간접으로 겪은 젊은이들은 국가권력의 야만성에 몸서리를 쳤다. 그래서 역사와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에 시달렸다. 반면, '1997년 외환위기'를 직간접으로 겪은 젊은이들은 패자부활전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 공포를 느꼈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면 끝인데, 낭떠러지 위의 땅은 점점 좁아진다. 그들은 늘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당연히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꺼리게 된다. 아이를 갓 출산한 젊은 부모가 흔히 하는 말이 "이 아이가 대학 졸업하고 취업할 때까지 돈 벌 수 있을까"라고 한다. 여기에 열악한 보육 인프라까지 겹치면서 '저출산'은 구조적 문제가 됐다.

'민주화 운동' 세대는 요즘 젊은이들을 가리켜 공동체성, 연대의식 등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당연한 결과다. 취업도 하기 전에 '고용불안'을 느낀 세대다. 과거와 다른 감수성을 갖는 게 당연하다. 청년 세대의 불안, 절망은 뿌리가 깊고, 이는 '1997년 체제'에 맞닿아 있다. 여, 야 정당이 한때 경쟁적으로 청년 후보에 관심을 뒀던 것은, 1997년 이후에 사회의식을 가진 세대에 정치적 뿌리를 내리기 위한 몸짓이기도 했다. 역시 여, 야 정당이 정치적 더듬이만큼은 살아 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청년 세대의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는 사회안전망, 복지에 대한 이야기는 선거 국면에서 듣기 힘들다.

다시 '총체성'의 시대, '경제 민주화' 향한 큰 그림 그릴 때

재벌 개혁, 양극화 해소, 복지 강화 등 '경제 민주화' 구호와 함께 묶인 의제들이 모두 표류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대중보다 반걸음쯤 앞서나가며 준비한 의제라기보다, 대중의 요구에 떠밀려 내놓은 것들이었다. 그러니 부실하고, 대중 앞에 내놓기엔 자신감이 없다. 새로운 이슈가 떠오르면 자연스레 뒤로 밀려날 수밖에. 총선이 끝난 뒤에라도, '경제 민주화' 관련 의제는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대중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허술한 정책, 그리고 서로 앞뒤가 안 맞는 정책은 새로 정비해야 한다. 그게 재벌의 횡포에 분노하는 서민, 미래가 불안해서 결혼도 못하겠다는 젊은이들, 초등학교 시절부터 '양극화'를 경험하며 상처 받는 아이들에 대한 정치인의 책임이다.

지식인 사회에선 준비가 돼 간다. 김상조, 장하준 등 쟁쟁한 경제학자들이 경제 민주화를 향한 나름의 체계를 만들어간다. 김상봉 등 인문학자들까지 가세했다. 경제학자들이 정책 각론이 아닌 총론을 내놓는 일, 인문학자가 사회과학 논쟁에 적극 참가하는 일, 모두 오랜만이다. 1980년대엔 흔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탈근대 담론 유행 이후엔 드문 현상이 됐다.

지식인들이 다시 '총체성'을 이야기하는 현상은, 그래서 상징성이 크다. 기존의 체제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그리고 새로운 체제를 모색할 때라는 방증이다. 지식인들의 반응이 오히려 때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잣거리의 보통 사람들은 이미 '1997년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박정희 모델'을 넘어서는 큰 기획이 필요하다는 걸 이미 몸으로 안다.

열흘 뒤면, 19대 국회를 구성할 국회의원들이 새로 탄생한다. 시민들은 국회의원들에게 세부적인 정책 각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건 상당 부분 테크노크라트의 몫이다. 시민이 국회의원에게 요구하는 건 시대 변화를 읽는 눈, 그에 걸맞은 방향 제시다. 지식인들이 다시 '총체성'을 이야기하는 시대는, 이런 면에서 '큰 정치'를 꿈꾸는 정치신인들에게 멋진 무대가 될 수 있다. 19대 국회 입성을 준비하는 정치인들이 '경제 민주화'를 향한 큰 그림을 가슴에 담고 있기를 기대한다.
▲ 무상급식 논쟁을 계기로 달아올랐던 '보편적 복지'를 향한 관심이 총선 국면에선 식어버렸다. ⓒ프레시안(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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