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근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막말을 쏟아내고 하루가 멀다 하고 단거리 발사체를 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북한이 '하노이 노딜'의 대한 분풀이를 문재인 정부에게 쏟아내는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2월 27-28일 베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를 꺼내들었다. 영변 핵시설을 미국 전문가들의 참여 하에 완전히 폐기할 테니 대북 제재를 완화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크게 당황하고 실망한 김정은은 오랜 기간 그 후유증에 시달려왔다.
그런데 영변 핵시설 폐기는 작년 9월 남북정상회담 결과로 나온 평양공동선언에 담긴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국내의 일부 언론과 북한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을 설득한 결과로 여겨왔다. 영변 핵시설이 북한 핵능력의 70% 정도 차지하는 만큼, 이를 폐기하기로 한다면 대북 제재 완화 등 미국의 상응조치도 받아낼 수 있다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은 '노딜'로 끝나고 말았다. 북한으로서는 문재인 정부에 불만을 품을 법한 상황이었다. 필자 역시 이 부분에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억측과 북한의 공식 발표 사이
경로 의존성이 생긴 탓일까? 일부 언론과 북한 전문가들은 여전히 북한의 최근 막말과 단거리 발사체 발사를 두고 '하노이 분풀이'로 해석한다. 이러한 진단은 추가적인 분석과 전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을 설득하는 데에 더 큰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 북한의 막말에 담긴 메시지라는 것이다. 또한 한미군사훈련이 끝나고 북미대화가 재개되면 남북대화도 자연스럽게 복원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분석과 전망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노이 노딜을 두고 김정은은 이미 문재인 정부의 중재론에 실망감을 피력한 바 있다. 4월 중순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정부를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나 '촉진자' 행세를 하지 말고 제정신을 갖고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북한이 최근 나오는 것과 같은 막말을 쏟아내진 않았다. 이전에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최근에는 "아예 빠지라"거나 "다시 마주앉을 생각도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이 6개월 가까이 지난 하노이 노딜에 대한 분풀이를 아직까지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최근 북한이 밝혀온 공식적인 이유는 한미군사훈련과 남한의 대규모 전력증강이다. 그래서 1차적으로 이게 그럴 만한 사유가 되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이게 그럴듯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여겨지면 그때 가서 다른 이유를 생각해봐도 늦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이 밝힌 이유에는 눈감고 '하노이 분풀이' 같이 다른 데에서 이유를 찾으려 한다.
'북한 점령'을 의미하는 '수복지역 안정화 작전'이 한미군사훈련에 여전히 포함되고, 문재인 정부가 역대급 군비증강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은 북한을 자극할 소지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관련 기사 : 韓美 '북한점령 훈련'까지...北 강경파 득세하게 할 건가)
거듭 국방비 동결을 호소한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미군사훈련과 남한의 대규모 군비증강이 작년 4월에 "새로운 전략 노선"을 선포한 김정은 정권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전략 노선"의 핵심은 "경제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북미정상회담을 통한 제재 완화 및 해제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은 노딜로 끝났고 미국의 태도 변화도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이다. 그래서 북한은 또다시 "자력갱생"을 들고 나왔다. 북한이 자력갱생을 통해 악화되는 경제 사정에 숨통을 틔우려면 군비 부담을 줄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단계적 군축"을 추진키로 합의한 문재인 정부는 역대급 군비증강에 나서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남한이 "새로운 전략 노선"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고 있다고 여길 법한 것이다. 남한의 "한반도 신경제지도"와 북한의 "경제건설 총집중" 노선 사이에 화학작용을 일으켜 평화경제를 실현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화법을 '언행불일치'로 간주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북한의 최근 행태를 '하노이 분풀이'에서 찾는 것은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는 데에도, 문제를 푸는 데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잘못 나오는 법이다. '내 탓'은 없었는지,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바는 무엇인지 알아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일단 한미군사훈련은 8월 20일로 끝난다. 이게 또다시 남북관계에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연합훈련 중단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북한 점령'과 같은 공격적 성격을 빼고 '방어 충분성', 혹은 '억제 충분성'에 입각한 국방정책의 수립 및 군사훈련의 조정도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국방비 동결이 시급하다. 앞으로 3년간 국방비를 동결하더라도 약 140조 원의 국방비를 확보할 수 있다. 국방비를 동결해도 상당한 수준의 군비증강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주변국 위협 운운하지만,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남북한의 군비경쟁 종식과 불가역적인 관계 발전에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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