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을 기념하는 우리들의 국경일 8.15는 해마다 그 감격과 의의가 희석돼 가는 반면, 히로시마 원폭의 기념행사는 해가 거듭될수록 열기가 높아가는 것 같고 분함과 보복의 칼을 가는 듯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하는데, 그러나 그보다 좀더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 일본의 피해의식이다. 왜 하필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졌는가, 그 원인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남경의 30만 양민 학살에 대해서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열심인 것은 원폭의 기념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고 그들 자신이 피해자임을 세계만방에 고하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21일 일본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참배에 대한 야당 정치인의 비판이 아니다. 지난 2008년 별세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남긴 글이다. 1926년생으로 20세의 나이에 해방을 맞은 선생은 생전에 "나는 철두철미한 반일 작가"라고 자칭했다. 선생은 자신의 대표작이자 한국 문학의 보물인 <토지>를 '소설로 쓴 일본론'으로 자평했다고 한다.
선생이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이 대작을 집필하던 중 틈틈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썼던 글들과, 이후 언론 기고나 강연 등을 통해 쓴 글은 선생 사후인 2013년 <일본산고>(마로니에북스)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달 초 <일본산고>는 출판사를 바꿔(다산북스) 재출간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3월 한일정상회담 이후, 정부·여당의 '한일관계 정상화' 기조와 민간의 반일 감정이 엇갈리고 있는 묘한 시점이다.
'일본산고'는 이 책 전체의 제목이자 선생의 유고를 간추린 책 1부의 제목이다. 책의 2부와 3부는 선생이 생전에 쓴 책 <생명의 아픔>,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에 실린 글들과 월간 <신동아> 기고 등을 추려 모은 것이다. 다만 이미 세상에 공개된 글들이라 해도, 현재의 시점에서도 독자들에게 주는 울림은 새삼스럽다. 기사 첫머리에 인용한 대목도 1995년 9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선생이 기고한 '진실의 상자 못 여는 일본' 제하 칼럼의 일부(책67쪽)다. 이 글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쟁 말기 청소년들을 자살비행으로 내몰던 가미카제를 나는 기억한다. 사이판 유황도 등 그들의 거점이 무너질 때마다 비전투원에게까지 옥쇄라는 것을 강요했고 차마 자결하지 못하는 모친을 아들이 목졸라 죽였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다. 그 무렵 일본은 본토 결전을 각오했으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서 옥쇄한다는 것이 흔들 수 없는 명제였다. 어쨌거나 핵폭탄의 투하는 일본인 전원 옥쇄 전에 전쟁을 끝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폭 세례의 원인을 만든 것은 일본이다. (책 68쪽)
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제의 가미카제를 '기억한다'고 한 서술도 눈길을 끈다. 해방 후 출생한 대다수 한국인들과 달리, 식민지 시대를 실제로 살아온 지식인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일본산고' 첫머리에서 "요즘 일본에 관하여 거론한다는 자체가 일부 참신한 지식인들 귀에는 사양의 만가쯤으로 들리는 모양이고 민족주의자의 촌스러운 몸짓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그것은 과거 강자의 논리가 아직 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책 15쪽)"고 혀를 찬다. 그는 "피상적 생각에 젖은 일부에서는 일본에 대한 우려를 한낱 노파심이라 하며 비웃을 수도 있고 지구촌으로 이행되는 추세, 세계주의를 바라보는 시야에서는 민족주의를 왜소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나 문제는 그러한 흐름에 편승하는 친일의 음흉함"이라며 "새로운 친일인사에게 민족주의의 극복, 세계주의 표방 같은 것은 빌려 입기에 그보다 지적이며 안성맞춤인 것이 달리 없을 것(책 15쪽)"이라고 경계한다.
그의 '반일'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이로서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정립의 현실적 필요성을 강조하는 외교와 통상의 논리는 "한일합방을 늑대 이빨에 찢기는 양의 비극으로 비유한다면 수많은 이 강산의 딸들이 일본 병사의 화장실 역할을 했던 일은 무엇으로 비유해야 하는지 침묵하는 이 땅 남성들에게 묻고 싶고, 만일 저 아우슈비츠의 참혹함보다는 낫다고 자위하는 리얼리스트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임을 사양할 밖에 도리가 없을 것(17쪽)"이라는 원색의 분노 앞에서 다소 머쓱해진다.
"국토가 유린당하고 민족이 살육당했던 제국주의 식민 시대 죽지 않기 위해 우리는 민족주의 반일 사상의 불꽃을 간직해야만 했다(책 61쪽)"라는 고백은 식민지 지식인의 처절함인 동시에 당당함을 드러낸다. 선생은 이어 "광복 후 과연 민족주의 반일 사상은 쓸모없이 되었는가? 그렇지가 않다(61쪽)"며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무관심을 나타내는 일부 지식층의 이상주의 혹은 지성을 나는 지적 허영으로 본다(62쪽)"고 주장한다. "일본의 팽창주의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그 해악도 다를 것이 없다(62쪽)"라는 이유다.
그러나 2023년 현재의 시점에서는 어떨까? 일본의 '팽창주의'와 우경화, 과거사에 대한 반성·사과 결여가 곧 한국의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인지는 해방 이후 세대인 우리의 관점에서는 다소 의문이 든다.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긍정적 역할을 해왔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그에 내재된 배제와 폭력의 속성은 현대 사회에서, 특히 선진국 문턱을 넘어 제법 부유한 나라가 된 한국의 상황에서는 염려되는 해악과 부작용이 너무나 다대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 정부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점은, 일제 치하를 직접 경험했거나 책·사료를 통해 당시의 참상에 분노하게 된 한국민들의 '반일 감정'은 이처럼 생각보다 깊고 거대하다는 것이다. 민족주의 NL 운동권 세력에 각을 세우며 한국사회 내에서 민족주의 담론에 대해 가장 비판과 경계의 목소리를 내온 진보진영 인사들조차 윤석열 정부 대일외교에 대해서는 대중이 반일 민족주의에 경도될 만하다고 여길 정도다.
선생은 "한국인의 반일이 (…일부는) 분풀이라는 본능적 감정인 것도 인정한다"면서도 '감정이 지나치다'는 지적에 "과거 일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감정이 좋을 리 없지요"라고 울분을 토한다. 그는 "징병과 징용, 위안부, 농토를 빼앗기고 거지가 되어 도시를 헤매던 군상, 남부여대 정든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 내 산천을 찾겠다고 만주벌판 눈보라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 죄없이 일본인 앞에서 떨어야 했던 어린 영혼들의 상처…. 이름도 우리말도 없애버린 그들, 반일의 피는 방방곡에서 들끓고, 꽃이며 심장이던 젊은 학도들은 결코 순종하지 아니하여 전쟁 말기에는 유치장이 미어졌습니다"라고 절절하게 증언한다. <토지>의 등장인물인 서희와 길상,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사망한 선생의 남편을 모두 한꺼번에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토지>가 '소설로 쓴 일본론'임을 절감케 한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일본에 대한 분노 앞에서 아무리 '한일관계 개선의 경제적 효과'를 내세운들 유권자들이 쉬이 설득될 리 만무하다는 것은 한국의 위정자들이 각별히 유의해야 할 지점일 것이다. "한 사람 책임지는 자 없고 벌받은 자 없는 그들에게 푼돈 얻어낸, 청풍당상의 그야말로 더렵혀지지 않았던 양반들, 차라리 그것은 희극이다. 혹자는 말하리라. 그 푼돈도 우리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그러나 자로는 잴 수 없고 저울로도 달 수 없는 가치도 있다. 그 가치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인 것(17쪽)"이라는 선언은 경제 논리로는 한일관계가 순탄히 풀리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로 갈 수 있는 걸까? 허구요 망상이다"(62쪽)라는 지적도 분명히 새겨 들어야 할 지점이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여전히 한일관계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대중의 반일 감정에 대해 "일본은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된다"는 지적도 당연하다. 선생의 말처럼 "그들은 한국인의 분을 풀어주지 않았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였지만 그들은 거의 보상하지 않았다.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욕을 안 먹겠다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63쪽)"이다.
여담이지만,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을 차용해 한일관계에서도 '선공후득(先供後得. 먼저 주고 나중에 받음)'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정작 남북관계에서는 엄격한 상호주의를 주장하면서!) 현 집권세력의 대일 외교전략에 대해서는 선생이 남긴 지적을 지극히 정책실무적, '실용적'인 관점에서도 검토해 볼 만하다.
나는 젊은 사람에게 더러 충고를 한다.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 아첨하는 약자로 오해받기 쉽고 그러면 밟아버리려 든다. 일본인에게는 곰배상(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 상)을 차리지 말라. 그들에게는 곰배상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힘을 상차림에서 저울질한다." (책 161쪽)
이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서 한쪽이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모든 처분을 맡기는 것이며, 일본은 한국에 오히려 더 요구할 것"이라는 지적(3월22일자 <한겨레> 정의길 칼럼 '오므라이스 한 그릇과 바꾼 윤석열의 도게자')과 일맥상통한다. '물잔의 반을 한국이 먼저 채우면 일본이 나머지를 채우며 적극 호응해올 것'이라는 기대는, 박경리 선생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턱없는 순진함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2023년 현재에도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일본, 아베 내각의 집권으로부터 이어진 일본의 우경화 경향에 대해 선생은 마치 눈으로 본 것과 같이 아래와 같은 경고를 남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선견지명이라 할 만하다.
날조된 역사 교과서는 여전히 피해받은 국가에서 논란의 대상이 돼있고 고래심줄 같은 몰염치는 그것을 시정하지 않은 채 뻗치고 있는 것이다. 가는 시냇물처럼 이어져 온 일본의 맑은 줄기, 선병질적이리만큼 맑은 양심의 인사, 학자들이 소리를 내어 보지만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 반대로 높아져 가고 있는 우익의 고함은 우리의 근심이며 공포다.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비극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 하고 분명한 것을 아니라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그 무서운 것이 차츰 부풀어 거대해질 때 우리가, 인류가, 누구보다 일본인 자신이 환란을 겪게 될 것이다. (26~27쪽)
한편 책에서는 지식인으로서의 박경리 선생의 풍모도 엿보인다. 1988년 일본 문예지 편집장과 문학평론가를 원주 집에서 맞이해 대화한 장면에서, 선생은 이들에게 일제의 난징대학살을 언급하며 비판하고 '겁이 많은 것이 일본인의 기질'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 "생각해보면 손님에게 너무 무례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그들은 지식인이라는 신뢰가 있었다. 지식인끼리는 옳고 그른 차원에서 얘기가 돼야 하는 것으로 믿었고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과 내가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58쪽)라고 했다.
목숨을 걸고 반일을 해야 했던 옛 식민지 지식인과 옛 제국의 후신국가 지식인 간의 지적 토론이 가능하리라 믿고 당당하게 이들을 대한 선생과, 그런 기대를 배신하지 않은 일본 문학가들의 모습은 민족은커녕 고작 정치적 진영 간의 대립을 이기지 못해 정상적 토론은 물론 대화조차 불가능하게 된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과 대조돼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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