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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 수탈했던 '외곡귀'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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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 수탈했던 '외곡귀'의 정체는?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7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IV. 197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5. 1970년대 미술과 미국

미술 분야에서 민족주의는 1970년대 중반 다시 고양되었다. 미술평론가 원동석은 1975년 다른 나라들과 평등한 관계를 실현함으로써 민족의 자주권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민족 문화의 독립을 강조했다.

1979년엔 젊은 미술인들이 두 개의 진보적 미술 단체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1969년 김지하의 지도로 젊은 미술가들이 <현실동인>을 만든 지 10년 만이었다. 하나는 서울에서 조직된 <현실과 발언>이라는 단체고, 다른 하나는 광주에서 조직된 <광주 자유 미술인협의회>였다. 후자는 1980년 5월 광주항쟁 과정에서 폭넓은 선전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 진보적 미술가들이 유신체제의 마지막 해인 1979년 반미적 작품 활동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이 1980년대에 그러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 발표했기에 1979년 단체를 결성한 뒤부터 반외세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미술 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6. 1970년대 음악 속의 미국

1970년대 말 대학생들과 공장 노동자들은 수많은 개사곡을 만들어 불렀다. 가락이 쉽거나 잘 알려진 기존 노래의 말을 바꾸어 항의 시위용 노래로 고친 것이다. 이러한 개사곡들은 대체로 억압적 정치 현실이나 불공정한 경제 상황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예를 들어, 1979년 8월 와이에이치 (YH) 무역회사의 여성 노동자 약 200명은 공장 폐업조치에 맞서 연좌 파업을 벌이는 동안 개사곡을 수십 개 만들어 불렀다. 이 가운데 <뺑소니 기업주>는 그 무렵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던 <조개껍질 묶어>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바꾼 것이었다.

장용호 회장님은 탈법으로 돈 빼내어
미국에다 공장 짓고 백화점도 차렸다네 .....
뼈 빠지게 돈벌어주니 미국으로 가져가고
노동자는 나 몰라라 팽개치고 오지 않네 .....

회사 창립자가 미국으로 자본을 빼돌리고 공장을 폐쇄하려 한다는 내용인데,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피땀으로 축적된 자본의 도피처가 미국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은근한 반감도 드러낸 것이다.

참고로, YH무역회사는 1970년대 초 한국 최대의 가발제조 및 수출업체였는데, 창업주가 1970년대 중반부터 외화를 빼돌리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경영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공장 이전이나 위장 휴업 등의 형태를 취하면서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9년 8월 일방적으로 회사 폐업을 공고했다. 이에 약 200명의 여공들이 야당인 신민당 사무실로 찾아가 농성 시위를 벌였는데, 적어도 1000여 명의 경찰이 당사에 난입해 진압하고 연행하는 과정에서 여공 1명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

노동자들을 지원하던 신민당 당원 20여 명도 강제 연행되고 김영삼 총재는 집으로 끌려가 연금되었다. 목사, 교수, 시인 등 8명이 여공들의 농성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신민당원들이 무기한 농성을 벌이고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면서 부산-마산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나고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는 '10.26 사건'으로 이어졌으니, 그 무렵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천대받던 이른바 '공순이'들의 저항이 박정희의 죽음과 유신체제의 종말을 불러온 셈이랄까.

7. 1970년대 연극 속의 미국

1960년대 대학생들이 시작했던 탈춤 부흥운동이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탈춤이나 민속극 동아리가 전국에 걸쳐 거의 모든 대학에 생겨났다. 이는 마당극의 발전을 불러왔다. 마당이라는 열린 무대에서 청중과 함께 공연하는 새로운 형태의 연극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탈춤이나 마당극은 본질적으로 저항정신을 지니고 있기에 공연이 금지되기 일쑤였지만, 그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 대학축제의 꽃이 되었다.

1973년 서울대학교의 탈춤과 민속극 동아리가 <청산별곡>이라고도 불리는 <진오귀 굿>을 공연했다. 김지하가 농민들을 계몽하기 위해 쓴 것으로, 아마 대학가의 첫 번째 마당극이었을 것이다. 이 연극에서 농민들을 수탈하고 괴롭히는 세 가지 사회요소 가운데 하나가 '외곡귀'였다. '외국 곡식 귀신'이라는 뜻인데, 미국 상표를 단 밀가루 포대로 이를 형상화했다. 이 '사악한 귀신'은 농민들의 단합된 힘에 의해 진압되고 쫓겨 간다. 학생들은 이 마당극을 1970년대 후반 몇 년 동안 전국의 농촌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1974년 3월 서울에서 <소리굿 아구>가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외세의 정치 경제적 침투와 한국의 사회 문화적 종속을 폭로하기 위한 음악극 형태의 마당극이었다. 이 연극에서 악담의 주요 대상은 일본 자본이었지만, 미국 역시 부분적으로 비난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한국인들을 착취해왔다며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1970년대 말에는 공장 노동자들과 농민들도 탈춤과 마당극을 공연하기 시작했다. 문화운동의 핵심 요소였다. 대학생들과 기독교 활동가들이 노동조합과 연계된 탈춤반을 노동자들이 만들 수 있도록 이끌었다. 대학생들은 방학에 농촌 봉사활동 (농활)을 통해 농민들이 문화운동을 펼치도록 이끌기도 했다. 기독교 활동가들은 가톨릭농민회 (가농)나 기독교농민회 (기농)와 같은 조직을 통해 농민 문화운동을 이끌었다.

1978년 11월 전남대학교의 민속 문화와 연극 동아리들이 광주에서 <함평 고구마>라는 마당극을 공연했다. 1978년 전남 함평군 농민들이 농협과 정부를 상대로 전개한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인 이른바 '함평 고구마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이 연극은 정부의 잘못된 농업정책을 비판하는 게 주된 목표였지만, 미국 역시 부분적으로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8. 1970년대 영화와 미국

한국 정부는 1970년대 통치 정책을 국민에게 주입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영화를 동원했다. 1973년 2월 수정된 영화법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검열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영화제작자들은 유신체제를 미화하고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며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하는 등의 주제로 '우수 영화'를 만들도록 지침을 받았다.

또한 영화제작자들은 그 영화법에 따라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폭로하거나 미국을 비롯한 자유 동맹국의 우월성을 묘사함으로써 반공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외국 영화를 수입하도록 요구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외국 영화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1년에 두 편 이상의 '우수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그 무렵엔 외국 영화를 통해 큰 수익을 남길 수 있었기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외국 영화를 들여와야 했고, 외국 영화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우수 영화'를 만들어야 했으며, '우수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유신체제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박정희의 유신독재 아래서는 미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도 없었고 수입될 수도 없었으며 상영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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