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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부의 재분배'가 전부는 아니다"

[복지국가SOCIETY] 빈곤, 사회적 지위 그리고 복지국가

1970년대 초 미국의 경제 인류학자 마샬 살린스(Mashall Sahlins)는 <석기 시대, 풍요의 시대>라는 책을 통해 미국 사회를 풍자하면서 오히려 석기 시대 사랆들이 더욱 더 풍요롭게 살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빈곤은 문명의 산물이라고 전제하고, 전세계 인구의 약 4%에 해당하는 수렵과 채집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오히려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석기시대에는 생존을 위해 하루에 단지 3시간만 일하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사람들의 행복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부의 규모가 아니라 한 공동체가 그 부를 구성원들 간에 어떻게 골고루 나누는 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인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행복이란 물질적 만족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과거 사회에서 빈곤이라는 것은 물질적 소유물보다도 사회적 관계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되었다.

물질적 수치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빈곤

빈곤에 대한 기존의 개념 규정은 주로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흔히 물질적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빈곤을 물질적 결핍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경향이 컸다. 대표적인 학자가 영국의 사회학자 라운트리(B.S.Rowntree)이다.

그는 <빈곤-도시생활의 한 연구>에서 "전체 소득이 신체적 효율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저 수준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를 빈곤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빈곤 개념에 의하면, 그 최저 수준은 생계비 또는 영양에 의해 측정되며 학자들은 이를 통상적으로 '절대적인 빈곤'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육체적 능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생활수준을 빈곤선(poverty line)이라고 규정하며 빈곤선 이하를 1차적 빈곤(Primary poverty), 빈곤선을 약간 상회하는 빈곤을 2차적 빈곤(Secondary poverty)으로 규별했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빈곤의 개념을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소득, 교육, 권력, 기회 등이 박탈되어 있는 상태"로 보고 이를 '상대적 빈곤'으로 규정했다. 타운센트(P.Townsend)는 상대적 빈곤은 사람들이 열망하는 속성, 예컨대, 소득, 고용조건 및 권력을 다른 사람보다 덜 가지게 된 상황이라고 하면서 이는 자원의 불균등한 배분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셜리반(T.Sullivan)은 이러한 상대적 빈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심성을 소외, 무력, 절망으로 구분하여 빈곤을 물질적 측면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확장시켰다.

빈곤을 착취의 형태로 보는 경우는 마르크스(K.Marx)의 빈곤론에서 볼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잉여노동 착취 그리고 기계의 자동화에 따른 노동소외의 결과로 노동자의 궁핍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사회과학적인 접근은 빈곤의 다양한 양태를 살펴보고자 시도하고 있지만, 그것이 빈민 문제의 복합적인 의미를 다 담아내는 데는 한계를 드러내는 듯하다.

빈곤이란 당시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심성의 복합적인 관점이 함께 맞물리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의 충체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홉스봄(E.J.Hobsbawm)은 "빈곤에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여러가지 의미들이 항상 내포되어 있으며, 빈곤은 언제나 그것이 발생되는 사회의 관습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 ⓒ프레시안(최형락)

사회적 지위의 부재-빈민

사회과학자들의 접근과 비교해 볼 때,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변화하는 사회 내에서 빈민들이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이들은 빈민을 단순히 가난한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그로 인해 가난하게 된 사람, 즉 주변인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폴란드의 역사가 브로니슬라프 게레맥(Bronislaw Geremek)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변인은 타의 혹은 자의에 의해서 도시 생활의 주변에 놓여 있었고, 생산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신분·명예·존경을 기반으로 하는 계층조직에서 무시되는 존재였기 때문에 신분 사회에 속하지 못했다. 그들은 경제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서 항구적인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차르노브스키(S.Czarnowski) 역시 같은 맥락에서 주변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사회의 주변인은 어떤 결정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물질적 정신적·생산의 관점에서 '여분'인 것으로 생각되는 개인의 총체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사회적 지위'의 부재를 그 특징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강조하는 핵심은 결국 '사회적 지위의 부재'로 요약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빈민들은 단순히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에 통합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가장 미천하고 경멸받는 주변인(les marginaux)들을 살펴봄으로써 오히려 사회 문제의 중심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걸인 문제로부터 오늘날의 실업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로베르 카스텔(Robert Castel)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회 문제는 명백하게 사회적 삶 속에서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가장자리에서 벌어진 행위들이 바로 사회 전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사회 형성 과정에서 주변으로 전락한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는 바로 그 사회의 중심으로 회귀하는 부메랑과 같다. 사회 내에서 밖으로 내몰리는 현상은 바로 그 사회의 내부 상태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사회의 핵심적인 모순을 보려면 사회로부터 내몰린 주변인들의 존재를 통해서 그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이다."

소유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빈곤한가?

인간은 무엇을 항상 더 많이 소유하려는 이기적 동물인가? 이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잘못된 사고방식일 수 있다. 빈곤에 대한 태도가 다양하듯이 소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 역시 그만큼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부시맨족의 일파인 나마 부시맨족(Nama Bushman)의 생활 습관은 소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일례로 한 부족민이 아름다운 칼을 만들어 다른 부족민들에게 보여주면 다른 부족민들은 그의 실력에 찬사를 보낸다. 이후 그는 잠시 칼을 소유(keep)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증여(give)한다. 부시맨족은 아름다운 물건을 소유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질투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물건은 오랫동안 소유되지 않고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빨리 빨리 증여된다. 부시맨 족에서 소유권은 바로 증여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 산업 사회의 사람들은 소유권을 자기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재산처분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인간을 더욱 더 긴장하게 만들며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줄 것이다. 허스코비츠(M.J.Herskovits) 역시 에스키모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들에게 사적 소유권이란 재산사용권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스키모인들의 소유권이란 '소유물은 사용되어지는 물건이다'라는 규칙이다. 놀고 있는 여우 덫은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소유된다. 그린랜드에서는 텐트나 큰 보트를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상속받지 않는다. 왜냐햐면 에스키모인들에게 텐트나 봍 같은 소유물은 하나 이상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유하지 않은 것을 빈곤으로 보는 태도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많은 문제점을 제기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물건의 사용 가능성만을 놓고 본다면 선풍기 200대와 냉장고 100대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이든지 소유하고자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하고 빈민이 나타난다는 주장이 가지는 오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배고픔보다 무서운 공동체 파괴

원시시대의 경제 공동체는 그 자체가 붕괴하지 않는 한 결코 그 구성원들인 개인을 굶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모든 개인들이 한 사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경제적 이익이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지 않았던 것도 주요 이유이다. 경제 인류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공동체는 재난에 의해 그 자체가 붕괴되지 않는 한, 그 구성원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같은 재난이 있을 때라도 경제적 이익은 개별적으로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위협받는다. 한편 사회적 유대의 유지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첫째, 명예라든가 관용에 관한 통념을 무시하는 사람은 사회 공동체로부터 쫓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모든 사회적 의무가 결국은 호혜적이고, 그 의무 수행이야말로 주고받는 데서 오는 이익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상황은 개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잊어버리도록 계혹적으로 압력을 가하며, 대개의 경우 자신 행동의 바닥에 깔린 이기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는 공동으로 구한 식량을 같이 나누어 먹거나, 어렵고 위험한 원정의 결과를 공유하는 것과 같은 공동행위를 자주 함으로써 강화된다."

이는 유럽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호메로스는 그의 서사시에서 "식량에 대한 절박한 필요가 나타나는 것은 공동사회의 외곽에서 뿐이다. 그것은 떠돌이나 도시 밖의 걸인 또는 정처 없는 나그네들의 신변에 닥치는 불상사인 것이다.…소속하는 것은 사물의 자연적 운행 속에서 자신의 식량을 얻는 것이며 소속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식량문제를 깊이 걱정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사회 내에서 기아의 문제는 결국 오직 사회의 간극에서 나타나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전체 사회의 붕괴 속에서 모든 공동체 성원들을 위협한다. 이것은 풍요롭지만 공동체가 붕괴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빈곤이 존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해주는 열쇠이다.

개인들에게 경제 행위를 조직해주고, 특히 노동의 동기를 사회적으로 부여해 줄 사회와 공동체 문화가 파괴될 경우에는 굶주림이라는 동기마저도 인간을 노동하게는 하지 못한다.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ed)는 "아프리카에 들어간 서양인들이 토착민들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우, 토착민들은 노동을 할 모든 유인을 빼앗긴 채 물고기가 득실거리는 냇가에서 고통조차 없이 죽어갈 때까지 방치된다"고 말한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는 가족과 동료의 죽음으로 그들은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고. 그것이 그들을 죽인 것이다. 가족과 사회적 관계의 파괴가 그들의 죽음 원인인 것이다. 굶주린 자들에게 물자를 제공하고서는 자신들이 한 일을 어김없이 자랑하는 구호기관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런 일이 수반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기준으로 다른 사회를 파악하려는 태도는 또 하나의 커다란 오만인 것이다.

복지국가의 근본 목표

여기까지의 사례로부터 사회적 관계들이 빈곤 혹은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 요인임을 알 수 있다. 더욱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세르주 라투슈(Serge Latouche)는 그의 저작 <다른 아프리카>에서 우리에게 빈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근대화된 빈곤관에 빠져 있는지를 잘 풍자하고 있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엄밀하게 경제학적인 의미에서 아프리카의 언어에는 빈민을 지치칭하는 단어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있다. 서구의 학자들이 종종 빈민이라고 번역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프리카의 단어는 사실상 아프리카인들이 생각하는 빈민이 아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빈민이라는 것은 고아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빈곤이라는 것은 자연의 재앙으로 인한 부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빈곤이라는 것은 사회적 관계의 결핍을 의미한다."

라투슈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고아가 된다는 것은 아마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열악한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속담에 따르면, 인간 그것은 혈연관계이다. 이러한 상황은 말리의 밤바라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들은 빈곤을 주변으로 밀려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관계는 가족이다. 라투슈는 빈곤에 대해 (현대인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은 경제적 발전이 필연적으로 낳은 '개인주의적 사회' 안에서만 이해 가능한 개념임을 지적하고 있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우선은 물질적 부의 재분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도래 이후 생산력의 급상승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빈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안에 빈곤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은 1960년대 초 미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자신있게 했던 주장이다. 제임스 모건(James N. Morgan)은 "빈곤을 없애는 일은 이제 정부의 손에 달려 있다. 모든 미국인을 빈곤선 위로 올려놓는 데 드는 비용은 1년에 약 110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전체 국민 총생산의 2%도 안되며, 세입의 10% 이하이고, 국방비의 5분의 1정도 되는 금액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갤브레이스(John K. Galbraith) 역시 그의 저서 <풍요의 사회>를 통해 "이제 빈곤의 문제는 우리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전이 물질적 빈곤은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고, 이는 우리의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 따라서 부의 재분배는 현재 우리의 주요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는 복지국가의 목표를 물질적 부의 재분배만으로 한정짓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복지국가가 가진 더 큰 의미는 이 체제가 인간에게 적절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해줌으로써 우리에게 함께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는 데에 있다. 福祉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라. 그것은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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