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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야근은 바람직한 출판인의 자세?"

[인터뷰] 출판노동자협의회 안명희 대표

책이 좋아서 책을 만들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이 일이라면 오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출판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5년 뒤 그는 회사를 떠났다.

출판노동자협의회 대표 안명희 씨(36)다. 안 씨의 꿈은 '좋은 책'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출판 산업의 구조가 좋은 책을 만들 수 없게 만든다"고 말한다. 무엇이 그를 떠나게 만들었을까.

"'출판의 위기' 떠들면서, 출판 노동자 현실에는 왜 침묵하나"

먼저 대형 유통자본과 영세 업체 간의 힘의 불균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일부 오픈 마켓과 인터넷 서점이 경쟁적으로 반값 도서 할인을 하면서 영세 서점과 출판사는 고사 위기에 처했다. 인터넷 서점이 들어서기 전에는 오프라인 대형 서점이 위탁판매 형식으로 팔리지 않는 책값을 출판사에 떠넘기기가 부지기수였다. 안 씨는 "힘의 관계는 전산업적으로 생산업체에서 유통업체로 역전됐다"며 "출판업도 예외는 아니지만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고 말했다.

'출판의 위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출판사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가려지는 현실이 있다. 출판노동자들은 "'출판의 위기' 담론이 내부에서는 노동자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인다"고 지적한다. 출판·유통업계의 양극화가 '쥐어짜는' 대상은 동네 서점과 출판사만이 아니다. 대형 자본이 만들어낸 위계질서 가장 밑바닥에는 "책 만드는 기계가 돼 간다"는 노동자들이 있다.

▲ 인터넷 서점이 들어서기 전에는 오프라인 대형 서점은 위탁판매 형식으로 팔리지 않는 책값을 출판사에 떠넘기기가 부지기수였다. 예를 들어 대형 서점이 출판사에서 책 100권을 들인 후 50권만 팔리면 50권어치 대금만 어음으로 결제하는 식이다. 사진은 한 소비자가 대형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모습(기사 내용과 무관). ⓒ뉴시스
"외주 시스템에서 좋은 책은 나올 수 없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규모가 작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출판연구소가 2000년에 펴낸 <한국 출판산업 실태 조사>를 보면 4인 이하 사업장은 56%로 전체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이는 10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5~9인 사업자도 21%에 달한다.

도서 시장이 불황을 거듭하면서 출판사는 발행부수를 줄이는 대신 출간 종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여러 종류를 내야 그만큼 회수할 수 있는 돈도 많아지고 그 중 하나라도 성공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주화다. 추가 고용 없이 책을 여러 권 만들기 위해 출판사가 작업을 외주화하는 일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디자인이나 인쇄와 같은 일부 작업만 예외적으로 아웃소싱을 했어요. 그런데 3~4년 전부터 전체 책 작업 과정이 밖으로 넘어갔습니다. 저도 외주노동자로 근무한 적이 있어요. 원고를 기획하고 저자를 만나고 나중에는 디자이너 섭외까지 제가 맡았습니다. 외주편집자가 외주디자이너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진 거죠. 판권에는 제 이름이 '책임편집자'라고 나갑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제가 그 회사 사람인 줄 알아요."

외주노동자는 회사에 불려가 직접 업무 지시를 받는다. 하지만 정규직과 똑같은 일정으로 똑같은 일을 해도 이들은 정규직보다 임금이 낮고 해고가 자유롭다. 게다가 이들은 1인 사업자로 간주돼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된다. 법적으로 노동자 지위가 인정되지 않아 부당해고를 당해도 노동청에서 구제받을 수 없다.

외주화 경향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쳤다. 출판사는 외주노동자를 관리할 최소 인원만 남겨두고 구조조정을 했다. 남아 있는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업무가 줄지도 않는다. 외주 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업무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돌아왔다. 안 씨는 "외주화를 하면 비용이 절감될 것 같지만, 중간 관리 비용이 추가로 들어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외주화가 생산 과정 관리를 어렵게 하고 책의 질도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많은 출판사는 편집자, 영업자 등 노동자를 교육하고 이들에게 투자한다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지 않습니다. 책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죠. 저자를 발굴하고 책의 완성도도 고민해야 하는데, 불안정한 상태도 직장을 옮겨 다니는 편집자들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거든요."

야근은 바람직한 출판인의 자세?

정규직도 고용 조건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야근·연차·월차수당 등 각종 수당과 퇴직금 미지급 사례는 부지기수다. 2007년 <한국출판산업 경영의 유연전문화 실태 연구>라는 논문을 보면 출판사 120곳 중 84.2%가 초과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야근은 '바람직한 출판인의 자세'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그 결과, 팔목·어깨 결림, 두통, 위염 등의 직업병은 출판노동자가 감내해야할 필수 조건이 됐다.

해고도 흔하다. 상당수 출판사가 근로계약서를 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 씨는 "정규직으로 채용돼도 수습 기간이 끝나면 해고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2~3년 마다 회사를 옮기는 노동자도 흔하다.

"구조조정 통보를 받아도 노동자들이 알아서 미리 나오는 편이죠. 이 직업이 워낙 이직률이 잦고 근속년수가 짧으니까요. 구조조정이라고 해봤자 '언제까지 일하라'고 통보하는 게 끝이지만요. 출판노동자들은 회사를 옮길 때마다 정규직과 외주를 넘나듭니다."

출판업은 고학력 여성에게 좋은 일자리, 과연?

여성이 저임금 일자리를 떠맡는 사례는 출판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출판 노동자의 거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안 씨는 "출판계에 여성에 많은 건 출판 노동이 여성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출판 노동은 "고용 조건은 열악하지만 고학력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문직"이라는 것이다.

"우리끼리는 그래봤자 장(長)급은 다 남자라고 말해요. 사람들은 출판직이 '프리랜서로 자유롭게 활동하는 전문직'이라고 여성에게 권하지만 사실은 전혀 자유롭지 않거든요. 여자들은 여전히 밑바닥 노동을 맡죠."

이들에게 출산은 곧 퇴사다. 그래서 임신한 여성은 스스로 관두는 일이 많다. 안 씨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다가) 심지어 아이를 유산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성희롱과 언어폭력 문제도 심각하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출판계에 집약됐다고 생각해요. 사장이 미팅에서 어깨에 손 올리는 건 애교죠. 손을 잡아도 거절할 수 없고, 야한 농담을 던지는 등 언어폭력도 심합니다.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비좁은 출판계, 얽히고 설킨 인맥과 '블랙리스트'

출판업계에서 재직자 해고 문제와 외주노동자 작업비 체불 문제는 만연한 상태다. 하지만 부당한 일을 당해도 출판노동자들은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영세 사업장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출판사 간에 인맥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해고노동자가 '부당 해고'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이 바닥이 좁다 보니, 저항하면 다음에 구직할 때 블랙리스트에 들어요. 어떤 사람이 부당해고와 퇴직금 문제로 소송을 걸자 1년 동안 취업이 안 된 적도 있었어요. 알고 보니 사장이 다른 출판사에 '그 사람 채용하지 말라'고 전화를 돌렸더군요."

한두 사람이 용기를 내 폭로를 시도해도 명예훼손이나 업무방해죄로 고발되는 경우도 있다. 출판사 채용 공고 게시물에 '임금 체불과 성희롱 문제를 고발하는 댓글을 달았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작년 2월 안 씨는 몇몇 출판노동자와 함께 '출판노동자협의회'를 꾸렸다. 출판노동자협의회는 특수고용직에 포함된 외주노동자를 비롯해 디자이너와 인쇄노동자까지 포괄하는 단체다.

"커피와 축구공에서 아동노동을 떠올린다면, 책도 마찬가지죠"

안 씨는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내 이야기를 하고 내 가치를 발현시키고 싶었는데 현실은 달랐다"며 "스스로 노동자로 인식하고 출판 공공성에 대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는 출범 이유를 밝혔다. 출판노협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갔다던 그는 "책을 살 때 그것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커피나 축구공을 살 때 제 3세계 어린이의 노동 착취 문제를 이야기하잖아요.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책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그 책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적인 책을 만들면서도 밤샘 작업을 하고 해고의 위협 앞에 놓인 사람들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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