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30일 13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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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대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좌-우익 분풀이가 불러온 '광분의 집단학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영암 <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다시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
"왜 나는 전향서 대신 33년 감옥을 선택했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⑫
1970년대 초 '떡봉이'를 아시나요? 1973년 8월 2일 법무부 예규 108조 '좌익 수형수 전향 공작 전담반 운영 지침' 시달과 함께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전향 공작을 직접 통제, 관리하기 시작했다. 또 중정과 법무부 등이 합동 전담반을 꾸려 대대적인 공작을 전개하기도 했다. '떡봉이'가 생긴 것도 이즈음이다. 국가는 폭력배 출신의 강력범들로 하여
"'떡봉이'를 아시나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⑪
임방규와 김창근, 병사(病舍)에서 만나다 대부분의 사상범이 그렇듯 정치적 상황에 따라 좌익수들의 생활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주요 정치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살기를 띠었고, 사상 전향 공작은 한층 간교해졌다. 장면 정부와 박정희 군사 정권에서 행해진 사상범에 대한 처우와 공안 탄압이 대표적인 예다.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1
"바늘로 온몸 찌르고, 걸핏하면 몽둥이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⑩
'무기수' 임방규, 푸른 죄수복을 입다 임방규를 포함해 무기수로 감형된 7명의 사형수들이 오후 늦게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사복을 벗고 푸른 죄수복으로 바꿔 입은 임방규는 그제야 '사형을 면했구나'라며 안도했다. 무기수 이하만 죄수복이 지급됐고, 곧 처형될 사형수는 사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임방규가 있는 동안 대전교도소에서는 총살 집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노학자 "한국 우경화, '친일파' 박정희가 뿌리"
[인터뷰 기고] 사토 쇼진 "위안부 한일협정에 분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회담을 보면서 아주아주 분했다. 아베는 사죄하지 않았고, 일본은 알량한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굉장히 절망스럽고 화가 났다" 일본인 역사학자 사토 쇼진(佐藤 正人·74세) 씨는 2일 인터뷰에서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한국의 자화상을 지난해 12월 합의된 '최종적, 불가역적’ 한일회담
명당 집 자손이라서? "나는 결국 총살을 피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⑨
총살 집행 현장과 美고문의 확인 사살 빨치산 사형수들에게는 수정(手錠)을 채웠다. 대부분 앞 수정을 찬 것과 달리 일부는 뒤 수정을 찬 채 꽤나 불편하게 움직였다. 아마도 감방 내에서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임방규는 뒤늦게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터라 수정이 부족해 손목을 채우지 않았다. 사형수들은 취침 시에도 수정을 찬 채 잠을 잤다. 이 때문에 조
"영양실조에 쥐 잡아먹었더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⑧
포로수용소 내 변절자, 그리고 탈출 사건 하루는 미군이 먹던 통조림을 포로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 그런 날은 필시 상부의 검열이 있거나, 기념일 또는 광주 지역 유지들이 수용소를 찾은 날이다. 하지만 방문객이 가고나면 통조림은 모두 회수됐다. 천막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로 길게 잠자리가 들어서 있고, 막사 한가운데에는 흙을 고른 뒤 난로가 설치됐다. 하지만
"쥐까지 잡아먹었지만, 결국 굶어 죽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⑦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고통 조선대학교 정문 건너 편(광주 동구 서석동)에서부터 전남대학교병원(광주 동구 학동)까지 길게 늘어선 광주 포로수용소(남광주 수용소)에는 빨치산 패잔병으로 넘쳐났다. 나무 널빤지와 천막을 올려 엉성하게 늘어뜨린 막사에는 김창근을 비롯해 수많은 포로들이 곧 있을 죽음을 기다렸다. 차가운 맨바닥을 고른 뒤 그 위에 짚을
"빨치산에게 굶주림보다 무서운 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⑥
한국전쟁의 애환이 묻어있는 '한정당' 김창근이 좌익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종형님의 영향이 컸다. 그의 사촌형인 김택근(전쟁 전 사망)은 왜정 때부터 공산당 조직원이었고, 김영근(당시 22세)은 전쟁 전부터 좌익 활동을 했다. 김영근은 전쟁 중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뒤 본인의 뜻에 따라 북송된 이후 소식이 끊겼다. 방호산 부대(인민군 6사단)가 순창에 내
인민군에 징집된 그 청년, 살아남았을까?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⑤
가슴 메이는 이름 '쌍치'…'돌고개' 전투 전북 순창군 쌍치면. 누군가에게 '쌍치'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메이는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과 군경이 번갈아가며 장악했고, '해방구(解放區)'란 이유만으로 수많은 이들이 학살됐다. 좌우 이념대립의 정점에서 애먼 주민들만 통곡의 피를 흘린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양민 학살이 그러했듯 이곳 역시 군경에 의한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