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30일 13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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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대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니가 뭔데 사람을 패!"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④
기포병단 '기차 전복' 작전 1951년 9월 병단의 규모가 컸던 기포병단은 전남도당의 요청으로 영광 불갑산 지원 작전을 폈다. 전남도당 인민유격대 불갑지구사령부는 이곳에 본거지를 두고 전남 서북권을 관할해왔다. 하지만 1951년 2월20일(음력 1월15일) 이른바 '불갑산 대보름작전'이 전개되면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이뤄졌고, 군경토벌대는 이 지역을 완전히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
소설 <남부군>, 실제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③
덕유산 '송치골 회의', 그리고 빨치산 재편 빨치산 병력은 수시로 재편됐다. 그만큼 전선의 변화가 극심했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녹음이 짙푸르던 1951년 8월의 일이다. 남부지구(회문산 일대) 역시 군경에 의한 대공세가 이뤄지자 병단을 사단제로 개편한다. 기포병단은 407연대, 카츄사병단은 408연대로 바뀌었고, 두 연대가 합쳐져 46사단을 이뤘다
"성냥 대가리 총탄, 빨치산의 처절한 항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②
北 의용군 임방규, '성수산 빨치산'이 되다 1950년 9월 20일경, 낙동강 전투에 참여한 북한 의용군 임방규(당시 19살). 그는 거제와 마주하고 있는 통영 광도면 횡리(고성과 통영사이)에 주둔했다. 한·미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사천 방어 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낙동강 전투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의 화력은 막강했고, 전선은
"어린 놈 머리통에 빨갱이 물이 들면…사형!"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①
"임방규 이하 29명 사형!" 재판장의 사형 언도와 함께 법정 안 양옆으로 늘어선 헌병들이 '찰카닥' 장탄을 했다. 행여 있을지 모를 난동에 대비한 실탄 장착이었다. 이어 기세등등한 군인들이 '빨갱이 사형수'를 서둘러 재판장에서 끌어냈다. 재판은 하루 만에 끝났다. 취조 뒤 검사가 몇 장의 서류를 넘기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상을 읊어내자, 소령 계급장을
경찰이 쏴죽인 시신, 신안 앞바다에 버렸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함평 ⑥
'보도연맹' 노기현 씨 총탄 맞고 살아나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 전 좌익에 가담한 이들에 대한 검속과 즉결 처분을 통해 좌익을 뿌리째 뽑고자 했다. 특히 전쟁 중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죄 없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이것이 바로 보도연맹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최대 30만 명에서 최소 10만 명의 맹원이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함평 신광면 계천
국군이 쏴 죽인 아이의 고무신…시신만 100여 구!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함평 ⑤
마지막 살육전, 불갑산 '대보름 작전' 불갑산은 당시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 산하 불갑지구 사령부(사령관 박정현)가 들어서 있었다. 불갑산 남서부줄기에 해당하는 모악산 용천사에 불갑지구당(위원장 김용우) 본부가 설치됐고, 무장 투쟁을 위한 훈련장도 마련됐다. 또 1951년 2월까지 불갑산 빨치산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할 만큼 세도 강했다. 이들은 함평, 영광,
"군인이 시어머니, 며느리, 딸을 동시에 성폭행"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함평 ④
공포의 5중대, 그리고 권준옥 대위 해보면 소재지에 중대본부를 꾸린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는 불갑산 토벌 작전을 위해 함평 지역 소개 작전을 진행했다. 명령 계통은 최덕신 준장(11사단장), 박기병 대령(20연대장), 유갑열 소령(2대대장), 권준옥 대위(5중대장)였다. 특히, 권 대위는 함평 지역 민간인 집단 총살 사건을 직접 명령한 장본
국군 '인간사냥' "살 꼬실라지는 소리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함평 ③
불타는 장작더미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 "그날 엄청 눈이 많이 왔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졌은게…" 취재진의 물음에 백발이 성한 노인은 몸서리치는 그때의 악몽을 더듬었다. 1951년 1월12일(음력 12월5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여기에 하얀 눈까지 더해지면서 어린애들은 마냥 신나했다.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윤경중(79세) 씨도 별반 다르
15-45세 무조건 총살! 겨우 살아난 소년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함평 ②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남산뫼 학살이 이뤄진 그 시각 정 씨 가족은 면소재지로 향했다. 그런데 불을 지르고 뒤늦게 마을을 빠져나온 진상 씨 친구 이귀범이 "진상아, 느그 형 총 맞고 아버지만 찾드라"며 형의 소식을 일러줬다. 군인들이 마을을 빠져나간 뒤 남산뫼 현장을 몰래 찾은 그가 진덕 씨를 봤던 것이다. 연당 방죽에 있는 줄만 알았던 형이 남산
기관총 난사한 국군, "살려준다"며 또 확인 사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함평 ①
종일 비가 내렸다. 3월말 거친 비바람은 제법 쌀쌀했고, 낮인데도 날은 어둑했다. 잔뜩 낀 먹구름 사이로 연초록 새악시가 옥토를 뚫고 방실댔지만, 가라앉은 마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정유년(丁酉年) 지아비를 잃은 '팔열부(八烈婦)'가 안쓰럽게 남산뫼를 가리켰다. 지변 마을 건너 외롭게 떠있는 남산뫼는 핏빛 같은 속살을 드러낸 채 을씨년스럽게 마을을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