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메이는 이름 '쌍치'…'돌고개' 전투
전북 순창군 쌍치면. 누군가에게 '쌍치'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메이는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과 군경이 번갈아가며 장악했고, '해방구(解放區)'란 이유만으로 수많은 이들이 학살됐다. 좌우 이념대립의 정점에서 애먼 주민들만 통곡의 피를 흘린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양민 학살이 그러했듯 이곳 역시 군경에 의한 학살이 피해를 키웠다.
1960년 4대 국회에서 현지 조사한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 보고서가 2001년 6월 발견돼 처음 공개된 바 있다. 국회 의안과 지하 문서고에 방치된 채 40년 간 묵혀왔던 '불편한 진실'은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당시 공개된 보고서에 따르면 거창군(719명)과 함양군(593명)을 제외한 일개 면(面)으로는 쌍치면이 가장 많은 536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순창군(1028명) 전체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산과 협곡으로 둘러싸인 쌍치는 비교적 높은 지대에 속한 천혜 요새다. 모두 6개 고지로 이뤄진 이곳은 예부터 삼방(三防)으로 유명하다. 삼방은 세 군데 통행인을 검문하는 관방(關防)이 설치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정읍 산내면으로 통하는 오봉리(일방), 내장산은 물론 장성과 담양의 접경지인 둔전리(이방), 순창 복흥면과 연결된 낙덕정(樂德亭)의 협곡(삼방)만 사수하면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다. 우리나라에서 삼방이 설치된 곳은 함경도 안변, 강원도 인제, 그리고 이곳 쌍치가 유일하다.
쌍치를 본거지로 활용한 도당은 이곳을 '해방구' 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 만큼 격전지일 수밖에 없었다. 군경과 빨치산 간 쌍치 전투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1·2차는 군경이, 3차는 빨치산이 승리했다. '민간인 사냥'의 전리품은 승리한 쪽의 것이었다.
실제 쌍치에서 만난 서길동(옥산리 시산마을·74세) 씨의 아버지는 군인에 의해 사망했고,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부대를 이탈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매형은 빨치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던 상황에서 서 씨는 1년여 동안(1951~52년까지) 옥산리 산실 굴밭등에 있는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니었다.
한국전쟁 초 쌍치는 좌익이 지배했다. 하지만 전세가 밀리면서 군경에 의한 토벌이 이뤄졌고, 일부 지역이 수복됐다. 도당은 몇 차례 탈환 작전을 폈지만, 모두 실패하고 3번 만에 성공을 거둔다. 기차전복 작전이 이뤄진 직후다. 노획한 무기와 포탄 등의 화력을 앞세워 쌍치 탈환에 성공한 것이다.
쌍치에서의 전투는 남으로 '돌고개', 북으로 '일방'에서 주를 이뤘다. 돌고개는 담양과 연결되는 쌍치의 초입으로, 이곳을 내주면 쌍치 전체가 위험하다하여 양측은 돌고개에서 엄청난 혈전(일명 '돌고개 전투')을 벌였다.
쌍치의 젖줄 추령천(섬진강의 지류)은 담양에서 흘러나와 쌍치를 거쳐 정읍시 산내면으로 빠져나간다. 특히 정읍의 경계를 목전에 두고 추령천은 '느러지'마냥 쌍치의 끝을 확 돌아 굽이친다. 일명 '일방'이라 불리는 곳이다. 일방을 내려 보는 계룡산(해발 402m)에는 '배고리'라는 재가 있다. 이곳의 보를 막으면 쌍치가 물에 잠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차전복 작전으로 무기를 갖춘 도당은 대대적인 돌고개 탈환을 계획한다. 빨치산 전원이 가입된 민주주의청년동맹(맹 또는 민청으로 불림)의 대규모 궐기대회가 열리면서 사기 또한 충천됐다.
'돌고개 탈환작전'은 407연대(기포병단)뿐만 아니라 담양 추월산 가마골에 본거지를 둔 노령지구유격대(전남도당 소속)도 합류했다. 아울러 408연대(카츄사병단)를 비롯해 이 지역 유격대가 총동원된 대규모 작전이었다.
임방규가 소속된 407연대는 주공격(돌격대)을 담당했고, 노령지구유격대는 광주·담양과 이어진 기동로에, 408연대와 정읍지역 유격대는 일방(정읍과 통하는 길)이 내려다보이는 배고리에 매복했다. 또 순창과 임실지역 유격대는 쌍치로 들어오는 요소요소에 배치돼 군경의 지원부대가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했다. 결국, 전북도당은 이날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쌍치 탈환에 성공한다.
'해방구' 쌍치, 그리고 '의용군 지도원' 김창근
1950년 6월 27일 한강을 처음 도하해 김포에 당도한 인민군 6사단(일명 방호산 부대)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며 7월 5일 오산, 7월 7일 천안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리고 호남 지방으로 방향을 틀어 7월 중순 변산과 전주를 거쳐 순창에 다다랐다. 6사단은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진주와 하동으로 이동한다.
북한 인민군은 무서운 속도로 남하했다. 전쟁 초기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전 지역은 북한 점령의 합법지구였다. 급박하게 돌아간 낙동강 전선과 달리 남한 곳곳이 인민 해방지구로 분류돼 치안 작업과 우익인사 처벌 등이 이뤄졌다. 쌍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방 좌익이 지역을 관할하며 통제했고, 인민위원장 하에 현물세도 적잖이 걷혔다.
1950년 8월, 전북 야영훈련소(의용군 훈련소) 소속 지도원이던 김창근(당시 21세)은 후방지원을 위한 인민군 양성을 담당했다. 훈련소가 순창으로 옮긴 뒤에는 인계면, 팔덕면(옛 팔등면), 금과면 등 순창 지역 4개 면(面)을 관리하며 이들의 훈련이나 교육 등을 감찰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그때 쌍치에서만 100여 명의 의용군을 차출해 훈련소에 인계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다.
전북 야영훈련소는 당초 남원에 있었다. 1950년 8월 공비 토벌 목적으로 창설된 11사단의 사단본부가 남원에 꾸려지면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벌어졌고, 이후 훈련소가 폭격을 맞으면서 이곳 순창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질지 만무했다. 교구는 형편없었고, 막대기 등으로 사격 및 제식훈련이 이뤄졌다. 그나마 몇몇 간부만이 소총을 지녔다.
당시 의용군은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배고픔이 싫어 의용군이 됐지만, 이곳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고, 하나둘 이탈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허나 들어오는 것은 쉬워도, 나가는 것은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감찰 차 훈련소를 찾은 어느 날, 쌍치에서 일면식이 있던 한 청년이 집에 보내달라고 울며 통사정했다. 모른 척 김창근은 훈련소 관계자에게 "이 사람은 누구요"라고 물었다. "설사와 고열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눈이 퀭한 게 몹시도 지쳐보였다.
김창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훈련도 못 받는 환자를 여기 두면 어떡하나, 식량만 축나게….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시오!"
갑작스런 호령에 관계자는 놀란 듯 허둥댔다. 청년은 곧장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그 눈빛이 아직도 선하지만 누군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쌍치에서 계속 살아남았다면 훗날 다시 만났으련만, 이후 마주치지 못한 것이 혹 변고가 생긴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만큼 비명횡사가 비일비재했고, 사람 죽는 게 일상이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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