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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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4>
신호
산정리 시커먼 뒷산에 붉고 푸른 분점이 무수히 지나가며 ‘쓰쓰또또-쓰쓰또또-’ 무선음을 다시금 내기 시작하고 연동 다리뚝밑 시커먼 뻘밭에 붉은 관을 등에 진 웬 사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꺼꾸러졌다 일어섰다하며 허우적거리는 영상이 다시금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
김지하 시인
'카오스모스'를 찾아서
첫 난초전 갖는 김 시인의 소회
‘오적’,‘금관의 예수’등으로 유명한 시인 김지하씨가 12월11일부터 16일까지 ‘미의 여정 김지하의 묵란’이라는 이름으로 인사동 학고재 화랑에서 묵란 전시회를 연다.김씨가 난을 그리게 된 계기는 1980년대 초 옥고로 지친 몸을 추스르던 중 무위당 장일순선생에게 마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3>
대공습
그날.그날 공습은 그야말로 대공습이었다.그 저녁녘 상리에서 본 목포하늘은 시뻘건 불바다였다. 불바다! 아니 불바다 이상이었다. 한자의 ‘황(荒)’이라는 단어의 지옥의 이미지로 밖에는 그날의 불바다를 묘사할 재간이 없다. 그 불바다 속에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아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2>
휘파람
강은 어머니.강가에 마을과 숲과 시뻘건 황토언덕들이 이어진 것을 보면 어머니 젖을 빨고 무릎에 앉고 또 손을 잡고있는 아이들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그 모든 아이들을 보살핀다.강은 말없이 그 모든 마을과 숲과 황토와 사람들을 보살핀다. 그래서 강가에 있거나 먼곳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1>
뱀과 개구리
큰 뱀이 큰 개구리를 삼켰다.개구리는 발만 안들어가고 온 몸이 뱀에게 삼켜졌다. 삼켜진 채로 독을 뿜는가보다. 뱀이, 그 큰 뱀이 동시에 죽어간다. 몇 시간, 아니 하루종일 걸리는 것 같다.우리가 피난한 집의 큰 집마당 한 귀퉁이에서 뱀과 개구리가 그러고 있다. 그것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50>
부줏머리
요즈음은 라디오가 식은 밥이다.그러나 그 무렵의 라디오는 신기(神器)였다.어느날 저녁 무렵 소리없이 돌아온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그날부터 라디오 청취에만 몰두하셨다.단파라디오.미국에서 발신하는 한국의 소리 방송이나 기타 한국어 방송 등을 통해 미국과 동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9>
서만열
동네 아이들 총대장 서만열.그는 그 무렵 중학교 이학년이었다.여위고 가냘픈 몸매에 눈초리만 날카로웠다. 저보다 어린 애들은 물론 동갑쟁이나 손위의 큰애들도 졸졸졸 따르는 그야말로 타고난 ‘보쓰’였다.소년단에서 데려가기엔 너무 컸고 민청에서 불러가기엔 너무 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8>
영채형
나를 사랑했고 내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사람 영채형.나는 영채형의 흰 이미와 꿈꾸는 듯한 검고 깊은 눈동자, 그리고 그 그늘져 서글한 목소리와 미소를 사랑했다. 바로 윗집 사는 승철이 외삼촌인데 목수다.나에게 나무결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깨우쳐준 것도, 나무 중에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7>
소년단
자주 끼지는 않았다.그러나 나는 아버지 덕택에 명목상으로는 소년단 간부였다. 공습이 있어 등화관제로 캄캄했던 어느날 밤 나는 소년단 사무실에 아이들 여럿이 함께 있었다.연동에서 가장 미남이고 로맨티스트로 소문나있던 영진 형이 한 간난장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캄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46>
유희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솔개재 오동나무거리 교화소는 반동분자로 가득찼다. 연동 뻘바탕 가난뱅이 동네에서는 잡혀간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내 주변엔 그러나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문태 숙부가 반동부화분자(反動浮化分子) 즉 인민을 괴롭히는 깡패로 몰려 잡혀가 오동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