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3>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73>

무실리

그러나 원주에서의 나의 소년기가 이런 어둡고 음침한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투명하고 화창한 아리따운 시절이 있었으니 나는 그 시절의 영상의 이름을 ‘무실리의 날들’이라고 부르겠다.

‘무실리’는 원주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이고 그 무실리에는 ‘배부른 산’이라는 우스운 이름의 둥근산이 있고,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엔 히말라야 소나무가 밀집한 큰 숲이 있는 것이다. 무실리에는 옻나무 밭이 여기저기 많이 있다. 또 흰 양떼들도 많이 놓아 기른다.

중학 2학년인지 3학년인지 가을 소풍을 무실리로 간 적이 있다. 날씨는 화창하였고 눈이 시릴만큼 록색은 강렬하였다. 그 무렵 흔했던 미군의 통조림 B1이니 B2니 하는 깡통박스를 점심밥으로 가져간 것이 생각난다.

밥을 먹고 보물찾기를 하고 또 무슨무슨 즐거운 게임들이 많았으나 그것보다 내 뇌리에 깊이 새겨진 것은 투명한 시냇물가에 노닐던 흰 양떼들과 옻밭의 록색이다. 푸른 하늘, 흰 구름, 울창한 히말라야 소나무 숲.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더 깊이 내 기억에 새겨진 것은 히말라야 소나무 껍질을 벗겼을 때의 그 짙고 싱그러운 향기다. 이 향기의 기억이 이끄는 대로 내 소년기에로의 여행을 떠나곤 하는 것이 내가 흔히 불행할 때 내면에서 보상하는 한 행위였다.

이 무실리에 지금은 교도소가 들어서있다. 그리고 그 아름답던 ‘무실리의 날들’은 이제 없다. 어두운 궤짝 집들만 가득차있다.

***도벽**

내 삶에 도벽이 붙은 한 사건이 그때 있었다.
아버지에게 누군가가 선물한 다이아몬드 축음기 바늘이 있었다. 내가 이것을 슬쩍 들고나가 학교친구들에게 자랑하다 잃어버렸다. 며칠 뒤 아버지가 사방세간을 들쳐대며 이 바늘을 찾았다.

‘너 못봤냐?’
자꾸만 묻는데도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흘러갔을 때 나는 드디어 울음을 터트리며 고백해 버렸다. 조용히 앉아계시던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에 제일 나쁜 것이 물건 훔치는 것이고 그보다 더 나쁜 것이 그 짓하고도 숨기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나는 또다시 훔쳤다.

대학을 졸업하고 방황할 때 그림 그리는 한 여자친구의 집에서 죠르쥬 루오의 귀한 화첩을 슬쩍 훔친 것이다. 그리고도 별 후회를 안했다. 그 이유인 즉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옛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 도둑 역시 명백한 도둑이다.
이제는 그 여자친구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고백 할 수도 없고 그저 허공을 쳐다보며 웃을 뿐이다. 그나마 내가 도벽이 상습으로 붙은 건 아니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얼마나 다행이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