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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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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24>

6ㆍ3으로 가는 길

5월25일이던가 28일이던가, 일요일이어서 등교한 학생들도 별로 없었는데 20여명이 먼저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검은 작업복이나 교복 차림으로 가마니 위에 모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통해 방송반이 모든 의사표시를 하고 있었다.

정문 밖과 안으로 쌍방향 확성기를 설치한 방송반은 선언문, 결의문, 성토문과 감각적인 선동 문건들을 계속 읽어대고, 매일 밤낮으로 풍자니 화형이니 성토니 하며 한 두 가지씩의 이벤트를 반드시 마련했다. 촌극(寸劇)도 하고 징과 장구·꽹과리 등의 풍물(風物)도 등장했다.

누군가 말했다.
"예술제로군!"

훗날 우리가 듣건대 독일의 신좌익(新左翼) '원외운동'(院外運動)의 루디·두츠케그룹이 신문을 통해 우리의 농성 뉴스를 내내 듣고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모방을 했다고 한다.

이미 5·20때 조형은 '원귀(怨鬼) 마당쇠'라는 마당굿을 시도하였고 그것은 단식반의 '박산군'(朴山君)을 거쳐 훗날 '호질'(虎叱)과 '이놈 놀부야!' 등의 탈춤이나 마당굿으로 발전하며, 그 이후 풍물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의 꽃다운 남상(濫觴)이 되었다.

밤낮으로 외쳐대는 선전 방송이 끔찍하고 애처로웠다고 한다. 숫자는 20~30명 정도에 불과한데 일본제국주의의 그 숱한 만행의 기억과 반(反)민족, 반(反)민중적인 군부 파쇼의 매판성을 비판 성토하는 목쉰 소리 소리가 도서관으로, 강의실로, 잔디밭과 벤치로 흩어져 마음이 편치 않았고 내내 고민하게 만들어 결국 스스로 단식반의 가마니 위에 참여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숫자는 매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우리의 주장의 강도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러나 끝끝내 타도(打倒)나 혁명(革命)과 같은 급진적인 표현은 절대적으로 삼가고 있었다.

그때 가마니 위에서 정치과의 여러 친구들과 내가 의논, 합의한 것도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처럼 군사력(軍事力)으로 주왕(紂王)을 방벌(放伐)할것이 아니라 문왕(文王)처럼 박해와 영어 속에서도 끝끝내 기다려 민심(民心)이 따르도록 참고 견디며 사리(事理)를 밝히고 그 잘못된 것을 성토(聲討)해야 한다는 그런 요지의 이야기였다.

그때 우리가 합의한 것이 바로 주역(周易)의 수괘(隨卦)의 의미였음을 뒷날에야 알고 참 감개무량했던 적이 있다. 6월2일에는 문리대생의 거의 3분의 1과 다른 대학들 법대·의대·상대·사대 등과 함께 고려대·이화여대·숙명여대 등이 가담해 숫자는 거의 몇천명, 1만여명이 되고 서울과 지방의 각 대학 앞 거리거리는 시위대로 가득가득 넘쳤다.

나는 그때 민요조의 선전가요를 하나 지었으니 그 뒤로 데모 때면 학생들이 항상 불렀던 '최루탄가'(催淚彈歌)가 그것이다.

'탄아 탄아 최루탄아
8군으로 돌아가라
우리 눈에 눈물지면
朴家粉이 지워질라

꾸라 꾸라 사꾸라야
日本으로 돌아가라
네가 피어 붉어지면
샤미셍(三味線)이 들려올라'

거기에 손정박이 3절을 추가했다.

'법아 법아 반공법아
빨갱이로 몰지 마라
데모하면 빨갱이냐
폭력정치 더 나쁘다.'

이 무렵 어떤 신문에 김수영(金洙暎) 시인이 기고문에서 학생들 시위현장에서 나온 최루탄 노래 같은 것이 민중의 시가 될 수 있다고 써 그의 예전의 반(反)민요적 태도를 수정하는 듯했다.

미남의 철학도 최창한(崔昌漢) 형이 가마니에 누워 평소의 작사, 작곡 실력을 발휘한 때도 이때다. 그의 '민주학생의 노래'는 동아방송 등을 통해 전국으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내 목은 완전히 쉬어 곁에서 친구들이 방송을 하지 말라고 말리고 또 걱정했으나 피를 뱉으면서도 쉰 목청이 도리어 선전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등 지금 생각해도 내가 퍽 독했던 것 같다.

많은 여대생들이 방송반에 참가했다.
여성들의 부드러우면서도 동시에 날카로운 고성(高聲)은 나라와 민족의 위기를 내용이 아니라 그 목청 자체로 이미 드러내 알리고 있었다. 몸을 숨겼던 김중태·김도현·현승일 형 등이 나타나 제각기 명연설을 남기고 의도적으로 자수(自首)했다. 그것은 우리 운동을 순식간에 합법적(合法的)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학생회의 김덕룡 형도 가담하여 지도부에서 움직였다.

방송반을 보위하고 전체의 조직적 활동을 보장한 뛰어난 공로자들은 후배인 박삼옥(朴三玉)·김헌출(金憲出)·안택수(安澤秀) 형 등 3인조와 최성진·심재주 형 등이었다. '5·20' 이후 몸을 드러내지 않던 박재일(朴才一)·최혜성(崔惠成)·송철원 형 등이 차츰 나타났고 최동전(崔同田)·하일민( 河一民) 형 등이 자주 들러 격려해 주었다.

김중태 형이 나타난 6월2일 밤과 그가 공개연설을 한 6월3일 오전에 수천명, 아니 1만여명에 가까운 학생들의 그 정신적 지향이 완전히 일치되고 한덩어리로 단결되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우발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배후에 그 전후(前後)한 시기의 '민비'(民比) 즉 '민족주의비교연구회'(民族主義比較硏究會)나 경북고 출신 등의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음을 뚜렷이 드러냈다.

나는 그러나 혼자였다.
수많은 동료들의 지지와 호위가 있었지만 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각오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조직 밖의 활동가임을.

생각난다.
그때 전혀 예상 밖의 한 인물이 참가해 왔던 것을.

시인(詩人) 김화영(金華榮)이 그다.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목이 쉰 채 외쳐대는 내 목소리가 하도 애처롭고 끔찍해 할 수 없이 왔다고 하며 벌쭉 웃었다. 웃으며 방송문 한 장을 내밀었다. 내 쉰 목청에 맞을 거라고 했다.

명문(名文)이었다. 나는 목이 쉰 성음을 낮게 깔면서 신음하듯 나직나직이 마이크 앞에서 그 명문(名文)을 읽어 나갔다.

"엉겅퀴 가시나무 돌무더기가 있는 황량한 지평에 우리는 섰다.
아, 우리는 골목골목 헤매다가 거리거리 외치다가….
아아 우리는 저 보릿고개의 가난을 대변한다. 아아 우리는 저 도시의 뒷골목 골목 몸을 팔아야만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고향의 벗을, 그 가슴속 깊은 슬픔을 대변한다. 아아 우리는 억울하게 짓밟힌 삼십육년의 길고 긴 저 식민지의 아픔을 대변한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번 밝히지만 명문(名文)이었고 김화영 형은 참으로 진정한 시인이었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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