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4일 21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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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진 천황이 곤지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31> 한 줄기, 두 연꽃 ③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열도와 반도의 부여계의 관련성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더 의문의 고리는 커져갑니다. 도대체 오우진 천황(應神天皇)으로 잘못 분석되고 있는 곤지왕(昆支王)은 어떤 분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김운회 동양대 교수
무령왕과 닌도쿠 천황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30> 한 줄기, 두 연꽃 ②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닌도쿠 천황릉에서 나온 동경(銅鏡)이 반도지역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과 그 크기가 일치하고 마치 복사판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중앙의 반구체(半球体)는 물론이고 주변의 9개의 돌기도 완전히 같은 모양입니다. 이들 동경에는 왕을 사방에
새롭게 열리는 일본의 역사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9> 한 줄기, 두 연꽃 ①
부여계의 일본 열도에로의 대대적인 이동은 4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4세기에는 근초고왕 계열이 한반도 남부의 왜(가야) 세력과 연합하여 열도로 이동하여 야마도 왕조를 수립한 것으로 추정이 되며 5세기에서는 백제의 멸망으로 열도(일본)에서는
범부여 연합국가의 성립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8> 부여의 나라, 일본 ③
이상의 논의들을 토대로 본다면 일본은 바로 반도부여를 이은 부여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백제와 일본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부여(扶餘)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political ideology)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가 있
고마와 담로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7> 부여의 나라, 일본 ②
그래서 원부여가 멸망하더라도 담로제도를 바탕으로 새로운 거점이 형성되어 새로운 부여를 만들 수가 있겠지요. 그러면 원부여가 멸망하더라도 이들은 왕족들이기 때문에 정통성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를 부여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죠. 대체로 보면 원부여가 완전히 멸
부여와 곰고을의 사람들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6> 부여의 나라, 일본 ①
퉁구스라는 말은 수천 년간 내려온 동북아시아 민족에 대한 수많은 사료나 기록에 대해 한 줌의 지식도 없는 유럽인들 특히 시베리아에 진출한 러시아인들에 의해서 자의적(恣意的)으로 급조(急造)된 용어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수천 년간 내려오는 동아시아 민족에 대한 한
야마토 왕조의 시조, 근초고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5> 근초고왕, 야마토 왕조를 열다 ②
저는 근초고왕이 부여계의 3차 남하의 주체세력이자 일본 야마도 왕조의 시조라고 보고 있습니다. 가장 미스테리한 일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는 근초고왕의 업적이 2년 기록이 나오다가 바로 21년 기록이 나와서 거의 20여년이 도망가고 없는데 이 근초고왕이 『일
진구황후, 고구려·신라를 정벌하다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4> 근초고왕, 야마토 왕조를 열다 ①
열도(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입니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열도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열도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3>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③
부여계가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한국의 사학계는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부여계의 남하에 대한 연구는 열도(일본)에서는 상당히 진행되었고 거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 가운데 신라의 경우 내물왕(35
험난한 부여의 여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2> 압록강을 건너 한강으로 ②
반도부여는 근초고왕대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뒤, 동진에 사신을 파견(372)하여 진동장군(鎭東將軍) 령낙랑태수(領樂浪太守)를 책봉받고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박사 고흥(高興)에게 국사인 『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