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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왕조의 시조,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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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왕조의 시조, 근초고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25> 근초고왕, 야마토 왕조를 열다 ②

(2) 야마토 왕조의 시조, 근초고왕

『일본서기』는 연대를 조작하여 시기를 정확히 판별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은 다른 사서와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사건들을 파악해낼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진구황후」부분이기도 합니다.

진구황후가 바로 근초고왕이라는 부분을 좀더 살펴봅시다. 『일본서기』「진구황후」40년의 기록에 정시(正始) 원년(元年), 위나라에서 조서(詔書)와 인수(印綬)를 가지고 왜국으로 사신을 보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정시(正始) 원년(元年)이면 위나라 제왕 때의 일로 240년인데 이로부터 15년 뒤인 진구황후 55년 즉 255년에 근초고왕이 서거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6) 그런데 근초고왕은 375년 서거했기 때문에 120년을 앞으로 당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쉽게 말해서 근초고왕의 업적을 진구황후의 업적처럼 만들어 두었는데 그것을 120년 정도 당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히미코가 마치 진구황후인 것처럼 은근슬쩍 만들어두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일본서기』의 진구황후는 히미코 + 근초고왕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일본서기』의 기년(紀年)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진구황후 46년 봄 3월조에 보면, 시마노스쿠네(斯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내자 탁순국 왕이 이르기를 '갑자년 7월 백제인인 구테이(久氐), 미스루(彌州流), 마꾸고(莫古) 세 사람이 말하기를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신하들을 보내어 가게 하였다.' "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일본서기』에서는 마치 244년(갑자년)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다가 120년을 더하면 364년으로 근초고왕대(346~376)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면, 열도의 권위있는 『일본서기』해설서에도 진구황후 47년 4월조(백제왕이 구저 등을 보내어 조공함), 49년 3월조(아라다와께[荒田別] 등을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으로 가서 신라를 정벌하려함), 52년 9·10월조(구저 등이 千熊長彦를 따라와 칠지도 등을 바침), 55년조(백제의 초고왕이 서거함) 등의 기사들은 각각 간지이운(干支二運) 즉 120년을 내리면 대체로 사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7) 그러니까 위의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를 각각 367년, 369년, 372년, 375년으로 하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에마쓰야스카즈(末松保和) 조차도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46년~51년의 백제관계 기사는 일본적인 윤색(潤色) 내지 개조(改造)가 있다."고 인정하고, "『삼국사기』의 백제의 기년을 표준으로 하여 『일본서기』의 대한국 관련기사의 부분을 실제의 연대로 정리·연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8) 이와 같이 『일본서기』의 실제연대에 대해서는 에도시대 이후 많은 연구들이 있어왔는데, 열도(일본) 학계의 통설은 나카미치요(那珂通世)의 견해입니다. 즉 나카미치요는 "진구·오우진 2대의 『일본서기』기년은 120년 연장되었고, 유라쿠 이후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와 일치하므로 기년의 연장은 인교천황(允恭天皇) 이전에 그친다."라고 주장했습니다.9)

이와 같이 『일본서기』의 파악은 『일본서기』가 제시하는 연대보다는 사건을 중심으로 파악하고 이를 다른 사서들의 기록들과 비교 검토함으로써 사실 규명이 가능합니다. 즉 『일본서기』에는 백제왕이 서거[훙(薨)]한 기록과 즉위한 기록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진구황후 55년에서 킨메이 천황 18년까지 14회에 걸쳐 이러한 기록들이 나타납니다. 이 기록들은 『일본서기』에 나타난 사건들의 시기를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위덕왕 이후부터는 이와 같이 기사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성왕을 기점으로 역사의 기록에 무언가 큰 변화가 나타났다는 말인데 아직까지 이에 대한 분석은 없습니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참고로 키토우 키요아키(鬼頭淸明) 교수는 "『일본서기』는 가공의 인물인 진무천황(神武天皇)으로부터 시작하여 7세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계통으로 이어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심스럽다.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천황은 킨메이천황(欽明天皇)이다."라고 합니다.10) 이 킨메이 천황이 백제의 성왕과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분입니다. 앞으로 상세히 분석해드릴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좀해 봅시다.

제가 '진구황후 = 근초고왕'이라고 주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4세기 한반도 중남부를 경략한 유일한 역사적 실존인물이 근초고왕일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의 업적으로 추정되는 일을 한 사람인 진구황후가 실존인물이라는 증거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 측의 문헌 외에 진구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서 본대로 가장 가까운 인물로는 3세기 왜 여왕 히미코인데, 히미코여왕의 업적과 진구황후의 업적의 실질적인 공통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히미코 여왕은 정복군주와는 거리가 멀고 갈등이 심한 각 부족들 간의 화합과 조화를 이끌어 내었던 영명한 군주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39년, 40년, 43년의 기사는 히미코의 기사로 대체해두고 있습니다. 이 때의 연호가 정시(正始)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반도부여(백제)의 경우에는 고이왕 시기에 해당합니다. 즉 부여계의 제2차 남하 시기입니다. 그러면 히미코를 진구황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정작 히미코는 진구황후와는 공통성이 없어 이 기록들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왕의 업적을 끌어다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사람에 주목합니다. 바로 7세기 후반의 사이메이(齊明天皇) 천황입니다. 사이메이천황은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할 당시, 반도부여(백제)의 구원을 위한 국가적 사업을 하다가 중도에 서거한 여자 천황입니다. 열도인(일본인)들은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합니다. 사이메이 천황은 반도부여의 멸망 이후 열도부여를 이끌어 가는 두 명의 영웅 즉 '텐지 천황'과 '텐무 천황'의 어머님이 되는 인물로 역사의 정점에 서있는 여걸(女傑)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이메이 천황 6년 열도에서는 660년 3월 당군(唐軍)의 대대적인 반도부여(백제) 침공 소식과 더불어 그해 5월에 인왕반야회(仁王般若會)를 개최하는데, 이 법회는 외적 침입의 위기와 때를 같이하여 백여 위의 불상과 보살상을 안치하고 백인의 승려를 청하여 경전을 읽음으로써 부처님으로 하여 국토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합니다.
▲ [그림 ④] 사이메이(齊明) 천황(왼쪽 아래)과 그녀를 모신 신사

예순을 넘긴 사이메이 천황은 구원 요청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출병을 결정하고 친히 오사카, 북 규슈까지 가서 백제 지원을 진두지휘합니다. 661년 오사카 항을 출발하여 모병(募兵)을 독려하고 그해 3월 쯔쿠시(筑紫)에 도착했고 그 해 7월 급서(急逝)하고 맙니다. 이후 황태자인 나까노오오에(中大兄) 황자[후일 텐지(天智)천황]는 9월에 5천의 군사를 선발대로 백제 왕자 풍장에게 딸려 보내고 국상을 치른 후 11월부터 다시 출병준비를 본격화합니다.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과 나까노오오에 황자는 원정 해군을 지휘했으며 5명의 장군과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파견합니다.

어떤가요? 사이메이 천황조를 읽어보면 진구황후의 느낌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사이메이 천황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많이 아쉬워 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사이메이 천황을 진구황후로 부활시켰을 것입니다. 저명한 고대사가인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도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은 가공의 이야기로 그런 출병은 없었다. 663년에 있었던 백촌강(白村江)에서 크게 패한 사건을 주제로 작성된 글"이라고 단언합니다.11) 일본내의 고대사의 연구자들도 대체로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진구황후는 히미코(3세기) + 근초고왕·근구수왕(4세기) + 사이메이천황(7세기) 등의 모습을 하나로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치 선덕여왕(7세기) + 강감찬 장군(12세기) + 인수대비(15세기) 등을 합쳐서 인공황후(人工皇后)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드는 식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진구황후의 설화들을 허구라고 보면 안되지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야마토 왕조의 시조급의 인물인 오우진 천황의 어머니라는 점과 일본의 고분시대 즉 야마도 왕조의 성립 시기인 4세기를 기점으로 봐야하므로 진구황후는 근초고왕·근구수왕(4세기) 등의 반도부여(백제) 왕들의 업적을 한데 모아 여성화시켜 창조해낸 인물이라는 얘깁니다. 백제 전문가 이도학 교수도 『일본서기』에 근초고왕 당시 전라도 지역에 왜(倭)의 군대가 활동한 것도 사실은 근초고왕이 주도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야마도 왕조가 고분시대인 4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볼 때, 야마도 왕조의 시조로 평가되는 오우진·닌도쿠는 바로 근초고왕·근구수왕 계열이라는 것입니다. 오우진은 바로 근초고왕의 아들이나 손자가 될 것입니다. 한일고대사 전문가인 연민수 교수는 "『신찬성씨록』에 근초고왕을 선조로 하는 씨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일본 지배층들이 근초고왕을 백제의 시조적인 인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2)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여13) 부여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동안 열도(일본)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를 허구로 보고 있으며 백제의 건국은 최초의 정복왕이자 실체가 확인되는 근초고왕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근초고왕 이전의 역사는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삼국사기』「백제본기」는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이왕이 개루왕(蓋婁王: 128~166)의 둘째 아들이라면서 개루왕이 서거한 해(166년)에 출생했다해도 고이왕은 서거 당시 나이는 120세가 되는 문제, 초고왕(肖古王)의 즉위년(166)은 공교롭게도 근초고왕의 즉위년(346)과 간지(干支)의 3운(運) 즉 180년 전으로 일치합니다.14) 뿐만 아니라 4대 개루왕(蓋婁王 : 128~166)은 제21대 개로왕(蓋鹵婁 : 455~475)의 이름에서 갖다 붙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마치 『일본서기』의 왜곡 과정을 보는 듯합니다.이 같은 많은 예들은 『대쥬신을 찾아서』에서도 이미 많이 지적되었습니다.

반도사학계에서는 진구황후 49년 조의 기사는 왜의 가야 정벌이 아니라 근초고왕의 한반도 남부 경략으로 파악하고 있으며,15) 진구황후가 정벌했던 비자발(比自㶱) 등을 평정한 주체가 백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16) 김태식 교수는 이 때의 실제 상황이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백제 성왕이) 옛날에 우리 선조이신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 때에 안라, 가라, 탁순, 한기 들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서로 통하여 친교를 두터이 맺었다."라는 기록이라고 합니다. 또 그 나라들은 3~4세기 당시의 나라 이름이라기보다는 5세기 이후 후기 가야시대의 나라이름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17) 김태식 교수의 견해는 이노우에히데오(井上秀雄) 교수의 게이타이 천황(6세기 전반)과 긴메이 천황(539~571)의 역사를 과거에 투영시킨 것이라는 견해에 기반을 하고 있습니다.18)

저는 근초고왕이 부여계의 3차 남하의 주체세력이자 일본 야마도 왕조의 시조라고 보고 있습니다. 가장 미스테리한 일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는 근초고왕의 업적이 2년 기록이 나오다가 바로 21년 기록이 나와서 거의 20여년이 도망가고 없는데 이 근초고왕이 『일본서기』에는 진구황후(神功皇后)의 명을 받아 백제왕으로 한반도 남부 전역을 공략하는 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19) 마치 하나의 역사적 사건들을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가 나눠가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근초고왕의 업적은 『일본서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부여의 왕(백제왕)의 업적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던 것인데 이를 토대로 반도부여(백제)의 실체가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진구황후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삼국사기』에서 근초고왕의 행적은 사라졌는데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 섭정 46년(366)부터 56년(376)까지는 오로지 근초고왕 등 백제와 관련된 기사들만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업적을 두 곳에 사용하기가 힘들었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나아가 『일본서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진구황후 46년(366), 47년(367), 49년(369) 년에 마한을 공략하는데 이상하게도 『삼국사기』「백제본기」의 온조 24년(AD 6), 25년(AD 7), 26년(AD 8), 27년(AD 9) 등에 나타난 마한정벌의 기사보다 정확히 360년을 앞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온조가 가공의 인물이거나 온조의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을 토대로 조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진구황후가 가공의 인물인데 그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을 복사한 것이므로 『일본서기』에 나타난 진구황후·오오진 천황이 계보는 결국 근초고왕·근구수왕의 계보가 되고 말죠. 간단히 말해서 근초고왕은 남부여(반도부여) 중흥의 군주이자 일본 야마토 왕조를 창시한 부여왕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의 글을 한번 봅시다. 『일본서기』진구황후 51년조를 보면, 진구황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친교하는 백제국(百濟國)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사람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옥을 비롯한 수많은 진기한 물건 등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해마다 이 진귀한 물건들을 부치니 나는 너무 기분이 좋다. 내가 살아있을 때와 같이 후하게 은혜를 베풀도록 하라."

위의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 이전에는 백제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구황후는 앞서 본대로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고 근초고왕이나 근구수왕이 여성의 탈을 쓴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근초고왕이 한 말이라면 백제 땅(한강유역에 기반한 백제세력을 바탕으로 근초고왕이 한반도 중남부지역을 새로이 정벌한 영역)은 부여인들에게는 하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일본서기』진구황후 52년, 백제 근초고왕이 칠지도(七支刀)·칠자경(七子鏡)을 황후에게 바쳤다고 하는데 진구황후가 허구이므로 결국은 근초고왕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열도를 다스릴 사람에게 칠지도(七枝刀)를 하사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구황후가 근초고왕이라는 것을 고증하면서 이 점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부여의 역사가 서서히 눈에 들어오리라 생각이 됩니다. 지금부터는 부여의 나라인 일본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필자 주

(6) 『日本書紀』「神功皇后」55년의 기록으로 이 기록에는 '초고왕'으로 기록되어있지만, 초고왕 - 구수왕을 가공의 인물로 보는 것이 대체로 정설이고 초고왕(166~214)의 재위연대와도 달라서 『日本書紀』「神功皇后」편에 기록된 초고왕은 근초고왕으로 보는 것이 한국과 일본 학계의 일관된 견해이다.
(7) 岩波書店『日本書紀』(上) (1967)
(8) 末松保和『任那興亡史』(1956) 17쪽, 58쪽.
(9) 岩波書店『日本書紀』(上) (1967) 580~581쪽.
(10) 鬼頭淸明 「日本古代國家の成立と東亞細亞(1976)」276~277쪽.
(11) 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現代新書 : 1967)
(12) 연민수『고대한일교류사』(혜안 : 2003) 140쪽.
(13) 『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
(14) 太田亮『日本古代史新硏究』(1928) 430~441쪽.
(15) 이병주 『한국고대사 연구』(박영사 : 1976) 511-514쪽.
(16) 천관우 『가야사 연구』(일조각 : 1991) 160-162쪽, 김현구「神功紀加羅 7國 平定記事에 관한 일고찰」 『史叢 39』(1993).
(17) 김태식 「4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27쪽.
(18) 井上秀雄 『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 : 1973) 42쪽.
(19) 『日本書紀』「神功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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