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나라(502~556)의 역사를 기록한 『양서(梁書)』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백제는 도성을 고마(固麻)라 하고 읍을 담로(簷魯)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宗族)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9)
위의 기록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도성을 고마 즉 곰의 성[熊城]이라고 하고 있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본 쥬신의 일반적 토템인 곰을 주요한 정신적 토대로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10)
다음으로 담로(擔魯)는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은 지방 통치조직을 의미합니다. 반도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담로가 백제 말의 음차로 읍성(邑城)을 의미하는데,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이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서 성(城)을 뜻하는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한 통치영역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담로는 일종의 봉건제로 인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제도가 해외 식민지의 개척의 거점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여의 역사를 보면 나라가 잘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재생하고 또 재생하는 부여만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외세의 침공으로 멸망했으면 대개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서 그 나라가 소생하기는 어려운데 부여는 망한 듯하면서 또 생겨나고 생겨납니다. 이것은 아마 담로제도가 큰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담로제도라는 것은 특정 지역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정벌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형태이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특정 지역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원부여가 멸망하더라도 담로제도를 바탕으로 새로운 거점이 형성되어 새로운 부여를 만들 수가 있겠지요. 그러면 원부여가 멸망하더라도 이들은 왕족들이기 때문에 정통성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를 부여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죠. 대체로 보면 원부여가 완전히 멸망(494)했을 때 백제는 남부여로 칭하게 되고(538), 백제가 완전히 사라지자(660) 일본이라는 명칭이 새로이 등장(670~698)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담로제도가 제도적으로 확실히 정착한 것이라면, 부여는 어느 곳이든지 쉽게 건국될 수 있으며, 이것이 여러 지역에 부여계가 정착할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지역의 부여는 바로 이 담로제도의 결과물일 수도 있습니다. 부여계가 반도를 거점으로 하여 열도에 비교적 쉽게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담로제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간단히 말해서 부여의 끊임없는 재생과정의 엔진(engine)은 바로 담로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475년 반도부여(백제)는 개로왕의 죽음과 도성의 함락으로 사실상 패망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웅진지역(공주)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이 됩니다. 이때의 반도부여는 열도(일본)의 부여세력의 지원으로 재건된 것으로 보입니다.
담로제도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생겨난 것으로 보기도 하고, 근초고왕이 지방 지배조직을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한 때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반도 사학계에서는 대체로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이후 이 제도가 보다 충실하게 운영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11)『양서』의 기록에는 22개의 담로가 나오지만 이것도 부여계의 확장에 따라서는 이 이상이 될 수도 있고 그 이하가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와 유사한 행태가 만주 지역의 원부여 시대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부여(285)의 경우입니다.
동부여(285)는 모용선비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서 두만강 쪽으로 피난하여 생긴 부여입니다. 즉 동부여는 일종의 새도우캐비넷(shadow cabinet)으로 일부 왕족들이 그 지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국외자(局外者)들이 보면 마치 두 개의 부여 즉 동부여(東扶餘)와 북부여(北扶餘)가 존재하는 듯이 느껴지지만 사실상 하나의 나라지요. 쉽게 말하면 만성적인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일종의 새도우캐비넷을 유지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이 피난정부와 본국정부와의 사이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정치이니까요. 만약 원부여가 멸망하게 되면, 동부여를 중심으로 다시 부여의 건국을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동부여(東扶餘)가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 그저 부여의 동부 지방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쓰다 소기치(津田左右吉)가 이 같은 견해를 제창(1924)한 이후 이께우찌히로시(池內宏)는 이를 분석하여 동부여(285)는 부여왕 의려의 동생과 아들이 북옥저(간도지방)에 세운 별국(別國 : 분국)이며 125년 후 410년 광개토 대왕에 의해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었다는 것라고 합니다.12) 이것을 대부분 정설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별국이라는 말보다는 연방 또는 연합국가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유심히 보면 반도부여가 열도부여를 건국해가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여 놀랍습니다.
부여의 이 같은 행태는 다른 나라들의 행태와는 매우 다른 특징을 보입니다. 즉 대부분의 나라들은 중앙을 거점으로 하여 주변을 공략하여 확대되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이지만, 부여는 주변 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지 안전한 환경으로 이동하여 거점을 건설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부여가 워낙 주변 세력(강력한 유목민들)들에 비하여 힘이 약해서 생긴 일로 판단됩니다. 부여계가 산동(山東) 반도에서 만주, 한반도, 열도 등지에서 출몰한 점들도 이를 설명해 줍니다.
그 동안 담로(擔魯)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담로라는 말이 『삼국사기』「백제본기」 어디에도 나타나지가 않고 엉뚱하게도 중국의 사서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담로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탐구가 있었는데 주로 다물(多勿)과 관련된 말이라는 견해가 많고 특이한 경우로는 (인디아의) 드라비다어로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송양왕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므로 왕은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라고 하고 ― 고구려 말에 복구한 땅을 다물(多勿)이라 말하는 까닭으로 이와 같이 부른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13) 김성호 선생은 담로의 어원을 고구려의 다물이라고 보는데 고구려에서는 빼앗은 땅, 점령지를 다모리라 했으며 백제인들의 정착지도 '다모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다모리가 다물, 담라, 담로로 변천했다는 것이죠. '담'은 담장 또는 경계를 뜻하고 '로'는 나라는 뜻하는 것이고 이 말은 백제의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전남 해안이나 도서 지방에는 밭두렁에 돌담을 쌓아놓는데 이것을 '돌다모리'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담로를 뜻하는 여러 지명들이 제주도까지 걸쳐 남아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강길운 교수에 따르면, 담로는 드라비다어인 tombe(회중, 군중), tumpai(군중, 집결), dombe(군중, 폭도), tombara(무리), tamil(지역이름) 가운데 어느 하나이거나 일본어의 다미[tami(民)], 다무레[tamure(둔영 : 屯營)], 다무로[tamuro(둔 : 屯)] 등의 말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합니다.14)
제가 보기엔 드라비다어는 그렇다 치고 일본어는 담로와 거의 일치하는 말이 보이는 군요. 즉 백성들을 의미하는 '다미'와 둔영(屯營)을 의미하는 '다무로'는 항상 국가비상사태에 가까운 상태였던 부여의 행정조직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담로는 지방의 거점으로 관도를 따라 축성된 관성으로 이를 통해 수리권을 장악하고 지방 세력을 통제하였다고 합니다. 이도학 교수는 후대에 지배하게 된 금강 이남지방이 가진 정치적, 문화적 이질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자치권을 부여하는 의미에서 중앙통치 지역과 달리 왕의 자제· 종친을 파견하여 분봉한 것이 담로제라고 추정하였습니다.15)
즉 백제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영토를 통치할 때는 그 지역적인 특수성을 인정하는 효율적 통치제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도학 교수는 금강 이북의 기존 영토는 5부제를, 금강 이남의 신 영토에 대해서는 담로제를 실시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양서』「백제전」의 기록이라고 합니다.16) 만약 그렇다면 열도부여의 경우도 이 같은 방식에 준하여 건설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담로제도가 다소 느슨하지만 범부여권을 연결하는 봉건제도적인 요소가 강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담로제도는 매우 허약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역의 토착세력에 기반을 두지 않고 본국과의 긴밀성의 요소로만 묶여져 있기 때문에 이 긴밀성을 상실하게 되면, 쉽게 두 개, 세 개의 나라로 분리됩니다. 그래서 이 긴밀성의 유지는 부여계의 역사에서는 절대적인 요소로 나타납니다.
즉 담로 또는 이와 유사한 느슨한 봉건적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여의 정체성을 견고히 유지하기 위한 활발한 교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반도와 열도의 역사를 면밀히 보면, 왕족의 교류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상당수의 백제왕이 일본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다시 반도로 돌아와 등극합니다. 만약 이 같은 과정이 없다면 이 담로제는 매우 허약한 제도로 쉽게 붕괴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해서, 반도부여와 열도부여는 수세기를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우의(友誼)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이것은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여계의 역사를 연방 또는 연합국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담로제도가 근초고왕대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제도라고 한다면 이것은 당시 위기에 처했던 범부여계의 자가분열(自家分裂)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열도부여의 건설에 매우 효율적인 제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먼저 『구당서(舊唐書)』를 봅시다. 『구당서』에 "백제는 본시 부여족 가운데 하나(別種)이다. 일찍이 마한의 옛땅이었고 …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서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 왕은 동서의 양 도읍에 머물렀다."라고 합니다.17) 이 기록은 백제의 영역이 광대함과 동시에 동쪽과 서쪽에 도읍이 두 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범부여계의 맹주가 있었다면 그는 양 도읍을 오고가면서 범부여의 영역을 통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일본서기』의 기록들에서 일본의 천황과 백제의 왕이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경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일본 = 부여'라는 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알아봅시다.
필자 주
(9)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簷魯, 如中國之言郡縣也.其國有二十二簷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其人形長, 衣服淨潔. 其國近倭, 頗有文身者.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梁書』卷54 列傳 第48 諸夷 海南 東夷 西北諸戎).
(10) 참고로 웅천(熊川) 또는 공주(公州)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三月廿一年春三月。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以久麻那利賜汶洲王。救興其國。時人皆云。百濟國雖屬旣亡聚夏倉下。實賴於天皇。更造其國。〈汶洲王盖鹵王母弟也。日本舊記云。以久麻那利賜末多王。盖是誤也。久麻那利者任那國下□呼□縣之別邑也。"(『日本書紀』卷十四雄略天皇二一年(丁巳四七七)
(11)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백제사 총론 』백제문화사 대계 연구총서 1(2007) 49쪽.
(12) 池內宏 "扶餘考"『滿鮮史硏究』(1951)
(13) 『三國史記』「高句麗 本紀」東明聖王 2年.
(14) 강길운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새문사 : 1990)
(15) 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푸른역사 : 1997)
(16) 이도학, 앞의 책.
(17)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裏,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舊唐書』卷199上 列傳 第149上 東夷 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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