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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 몸값은 오르지 않는다. 쭈욱~

[2009년, 살림살이 나아지셨나요⑤] 해는 바뀌어도 임금은 제자리

12월 마지막 두 주는 송년회를 위한 기간이다. 올해도 어김없었다.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송년회를 거치고 나니 친구들과의 만남이 또 기다린다. 28일 저녁, 퇴근 후 이미 잔해로 변해버린 종로 피맛골 인근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은 10년 전과 그대로(처럼) 느껴져서 넥타이와 정장이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지기들 네댓 명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연말 두 주간 있었던 송년회에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월급쟁이들의 오늘을 들여다봤다.

"애 분유값이 얼만 줄 알기나 해?"

술이 한두 잔 돌고 나니 어느새 왁자지껄. 옛날 새까맣게 불타오르던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의 눈들은 탁한 폭탄주 때문인지, 유난히 흐려져 보인다. 비교적 빨리 결혼해 첫 아이를 가진 A가 나선다.

"애가 일주일에 분유를 한 통 먹는다. 한 달이면 12만 원이다."

자칭 '내 아이에겐 무조건 최고만 선사한다'는 친구 A의 한 달 생활 형편을 뽑아봤다. 그의 연봉을 물어보고, 각종 생활비로 빠져나갈 돈들을 계산해봤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A의 연봉은 약 3300만 원(성과급 포함, 세후). 한 달 실수령액은 200만 원대다. 일단 보험료와 가족회비, 각종 경조사비 등으로 대략 한 달에 40만 원 정도를 지출한다.

한 달 전 구입한 자동차 유지비가 10만 원 이상 나간다. 자가용은 애가 생겨서 구입했지만 기름값 때문에 출퇴근은 대중교통만 이용한다. 아이가 생기면서 지출이 늘어난 건 또 있다. 5000만 원을 대출받아 아파트에 전세 입주했다. 아파트 관리비로 12만 원, 이자비용으로 대략 60만 원가량을 아내와 함께 부담한다. 올해 아이에게 들인 예방접종비, 각종 육아에 필요한 비용만 150만 원 정도가 들었다. 줄일래야 줄일 수도 없는 비용이다.

가정이 있지만 직장인이니만큼 식사와 술에 드는 비용은 총각 때와 비교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술을 줄여야지' 하면서도 한 달에 밥값과 술값으로 어림잡아 40만 원 정도는 꾸준히 드는 것 같다. 지금 얘기한 돈만으로 이미 월급이 거진 다 소진됐다. 아이가 생기면서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육아 휴직 중인 아내가 직장동료라 그나마 A는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사는 편이다. 그런데도 그는 제대로 된 저축을 하지 않는다. "빚 진 거 갚는 게 저축"이라고 두루뭉술 넘어간다. "그래도 노후 걱정 안 되냐"는 지적에 A는 코웃음을 친다.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이라며.

월급쟁이는 돈을 써야 한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B가 거든다. "일이 많아 죽겠는데 직원은 안 뽑지,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래야 뻔하지." B는 제법 많은 돈을 버는 영업맨이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세전으로는 최소 4000만 원대의 고소득을 올린다. 지난 10일 한국고용정보원 발표를 보면 2007년 4년제 대학 졸업생의 평균 월급은 198만 원이었다. 대부분이 경력 3년 이상의 직장인들이니만큼, 인상분을 감안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월급봉투가 졸업생 평균보다 두둑한 편이다.

왜 B는 "돈이 없다"고 말할까. 그가 말하는 '돈'이란 곧 '삶의 질'이다. 비단 B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단순히 급여수준으로 직장인의 오늘을 재단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문득 B의 거뭇하게 자라난 턱수염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잘라도 잘라도 다시금 기어 올라오는 턱수염이, 뿌연 담배연기와 함께 그의 세파에 찌든 삶을 반영하는 듯했다.

일단 그들은 공통적으로 많이 버는 만큼 많이 쓰고 있었다. 이들은 예외없이 부동산과 자동차, 주식 등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모두 빚을 내서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이래선 연봉이 아무리 높다한들, 늘 부족하기 마련이다. 아이에, 어른들께 드리는 용돈에, 회식 자리에서 '쏴야 하는' 돈 등 앞으로 돈이 들어갈 곳은 많기만 하다. 왜 이렇게들 돈을 쓰느냐고 물어봤다. B가 한마디 툭 내뱉는다. "야, 월급인상이 물가상승률보다 낮은데 그럼 어쩌라고? 재테크를 안할거면 수당이라도 많이 땡겨야 한다 너?" 이들이 술자리에서 털어놓은 '돈을 써야 하는 이유'를 되새겨본다.

(자가용을 5년 만에 바꾼 영업맨 B, 연봉 부정확) "내가 1년에 보통 8만㎞ 정도를 달린다. 웬만한 택시기사보다 더 많이 달려. 그러니 자동차도 금방 맛이 가지. 전에 자동차정비소에 갔다가 미터기를 보고 아내가 또 뭐라 한마디 하더라. '너 무슨 바깥 살림 차렸냐'고. 이렇게 차 안 몰면 어떻게 영업하라는 건지 원. 힘들어 죽는다. 나 살 빠진 거 보여?"

(골프를 치는 증권맨 C, 연봉 5000만 원가량) "내 동생이 소개해준 XX전자 구매팀 부장이 중요한 고객이다. 그런데 그 양반이 골프를 쳐. 거래처 사람과 자주 라운딩 한다. 접대받는 거잖아? 그래서 내가 같이 가서 이름 거짓으로 써주고 한 게임 친다. 골프 배워서 친해지니 이 사람이 또 다른 사람도 소개시켜주고 하는 거야. 그나마 이 사람들이 있으니 내 실적이 나오는 거다. 너 같으면 골프채 장만 안하겠냐?"

(안 힘든 게 없다는 대기업 사무직 노동자 D, 연봉 4000만 원 후반대) "주식으로 내가 날려먹은 돈이 좀 되지? 갚아야 할 돈이 이뿐인 줄 아냐? 아직 학자금 대출도 다 못 갚았다. 이번에 영업 뛰는 우리 형이 차를 질렀잖냐. 할부금 나도 같이 내준다. 고향에서 장사하시는 부모님도 어음 제 때 안 돌아서 내가 매달 정산할 때 일정액 드려야 된다. 남는 게 없어. 그나마 일이라도 적으면 말을 안해. 밤 9시 퇴근이 기본이다. 그냥 보내주면 다행이게? 부서 회식 때 나라고 안 쏘냐? 한번 쐈다 하면 수십만 원은 금방이야. 직장생활 안 해봤으면 말을 말아."


크게 지출하는 이들 모두에게선 공통적인 핑계 아닌 핑곗거리가 확인됐다. 돈을 쓰는 분야가 모두 직장생활과 관계돼 있었다. 삶의 전부가 사실상 일에 얽매여 있으니 자연히 스스로 생각하기에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착각 아닌 착각'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취업사이트 '사람인'이 올해 9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70%가 스스로를 '워킹푸어(근로빈곤층)'로 생각했다. 한 마디로 "내가 열심히 일하는데 비하면 월급이 짜"다고 느낀 것이다.

이런 현상은 회사에서 아무리 "자기계발시간을 가져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라"고 독촉한들 해소되지 않는다. 그들이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회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실제 D는 자기계발을 위해 한동안 새벽 6시 어학원을 다녔다. 사내에서 독촉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포기하고 말았다. 연일 새벽까지 계속되는 술접대를 이기고 새벽학원을 다니기에 그는 '너무 게을렀다.' 기자에겐 꿈과 같은 월급을 받는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가 '가난뱅이'라는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았다.

▲고달픈 출퇴근길, 연일 이어지는 회식과 격무,. 승진 경쟁, 충성경쟁, 거래처와의 관계, 선후배와의 관계…. 직장인들의 삶은 직장에 완연히 종속된다. 삶의 질은 언제쯤 나아질까. ⓒ뉴시스

월급쟁이 양극화

당연히 송년회에서 만난 이들이 모두 저들처럼 많은 돈을 버는 건 아니었다. 책이 좋아 중견 출판사에 취직한 대학 선배 E(33). 그의 생활수준은 4년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편집기획 업무 담당자로 충분한 경력을 쌓았음에도 연봉은 지난해와 다름없는 1980만 원이다. 책의 기획부터 작가 섭외, 원고 작성 등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은 사라진지 오래다. 무엇보다 그를 화나게 하는 이유는 회사의 부당한 대우다. 사장의 딸인 부서 팀장이 사실상 팀원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다. 역시 돈 뿐만 아니라 직장 환경, 곧 삶의 질이 문제였다.

"2년 전 처음 이 회사에 와서 놀란 게 뭔 줄 알아? 이 회사는 연봉계약서 안 쓴다. 그래도 나름 업계에서는 이름이 난 곳인데, 직원 연봉이 팀장 마음대로다. 웃기지?"

구두협상이 부조리하단 생각에 동료 직원들의 급여도 슬쩍 확인해보았다. 입사 당시 관련 경력이 하나도 없던 다른 팀 디자이너는 처음부터 자신보다 많은 연봉을 받았다. 딱히 불만을 털어놓을 곳도 없다. 이 회사에는 노조가 없다. 입사 전 노조 결성 움직임을 주도하던 이들이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곧바로 해고당했다는 말만 들었다.

회사 경영은 딱히 나쁘지 않지만 근무환경이 개선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경제위기를 핑계로 회사에서는 '요즘 같은 때는 잘리지만 않아도 다행'이라는 식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미 올해만 3명이 퇴사했다. 그만큼 일손이 줄어들어 E의 하루는 더 길어졌다. 실질 소득은 감소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E는 그토록 열망하던 출판업자의 삶에 진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꿈꾸던 일과 사생활이 공존하는 삶을 영위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주변에선 그저 "어쩌냐, 출판업계 현실이 그런데"하고 애써 아무 일 없다는 듯 넘긴다.

E는 원천공제하는 각종 세금을 제외하고 월 165만 원가량을 실수령한다. 받은 즉시 적금통장에 50만 원, 장기주택마련저축액으로 2만 원, 모 보험사의 생명보험료로 5만2000원 가량을 불입한다.

그는 모 진보정당 당원이다. 당비 1만 원에 비정규직기금 5000원을 매달 낸다. 또 종교단체의 장기기증사업 지원금과 말기 암환자를 돕기 위한 성금에도 매달 6000원을 꼬박꼬박 지급한다. 이 외에도 교통비(약 7만 원), 통신비(약 5만 원), 잡지 구독료(월 3000원) 등에 매달 돈을 쓴다. 정기적으로 무조건 나가는 금액은 약 71만6000원 정도다.

나머지 93만4000원이 E의 식비와 각종 경조사비, 의료비 등에 쓰인다.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긴 하지만 식비 부담은 만만찮다. 밥값, 술값, 커피값 등을 합쳐 대체로 3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 출판업계 종사자인 만큼 책을 구입하는데도 적잖은 돈을 쓴다. 카드값을 결제할 때마다 '언제 어디에 썼는지 모를' 돈이 빠져나간다.

E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저축해 놓은 돈이 많지 않아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미 여성으로서 결혼적령기를 넘겼다는 불안함도 안고 가야 한다. "난 그래도 부모와 한 집에 사니 다행"이라고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월급쟁이 몸값 후려치는 한국

어찌 보면 조금 극단적일지라도, E의 사례가 한국 월급쟁이의 현실을 보다 정확히 반영한다. 지난 경제위기 이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단위노동비용이 줄어든 나라다. 단위노동비용이란 상품 한 단위를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노동비용을 말한다. 명목임금이 줄어들거나 다른 조건이 같을 때 생산성이 올라가야 줄어든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올해 2분기 단위노동비용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5% 감소해 25개 비교대상 국가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했다. OECD 평균 증가율은 3.6%였다.

노동자들의 급여 감소는 비단 올해 일만이 아니다. 한국의 단위노동비용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작년 4분기와 올해 1분기에도 각각 전년 동기 대비 -3.2%, -1.4%씩 감소해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증가했다. 이 역시 OECD에서 유일하다.

결국 최근 한국의 빠른 경제위기 탈출 뒤에는 E처럼 실질임금 감소를 감수하거나, 임금 인상보다 더 큰 노동시간 연장을 받아들인 대다수 월급쟁이들의 애환이 있었던 셈이다. 비정규직 증가 역시 이론적으로는 단위노동비용을 줄인다. 지급되는 급여 자체가 형편없이 낮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삼성전자와 부품업체의 영업이익률 변화추이. 경기가 살아나는 신호를 보인 올해 3분기, 오히려 부품업체의 이익률은 떨어졌다. 이들 회사 직원의 연봉이 오를 리가 없다. ⓒ프레시안
내년, 경기가 좋아지면 이들 월급쟁이들의 지갑도 좀 더 두툼해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대기업에 다니는 이들은 결국 더 바빠질 것이다.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끝없는 사내 경쟁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런 현상은 내년에도 지속될 것이다. 내년 법정 최저임금은 올해보다 2.75% 인상된다. 한국은행은 올해 물가상승률을 3%로 전망했다. 결국 실질 소득은 줄어든다는 얘기다. 이런 분위기는 기업에도 그대로 전염된다. 이 살벌한 판국에 '알아서 기어야' 살아남는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에 경기회복은 본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증권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지난 2004년~2008년 연간 실적을 분석한 결과, 삼성전자 휴대폰 사업부문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1.32%에 달했지만 21개 부품업체 상장사는 5.7%에 불과했다.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로 중소기업은 경기가 좋아져도 크게 빛을 볼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E처럼 대체로 사양산업으로 평가받는 출판업계·인쇄업계·언론업계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월급이 오르지 않은 건 오래된 일이다. 기사를 준비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자 했다. 돌아온 대답은 참담했다.

한 게임개발업체에서 일하는 40대 이사 이모 씨는 "회사가 망할 지경이니 내 일자리나 알아봐 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답변을 했다. 회사경영이 최근 들어 악화된 한 중소기업 사장 김모 씨는 "회사 매각을 준비 중이다. 잘 풀리면 나중에 만나자"고 말했다.

한 대기업 계열사에 근무하는 것으로 알았던 대학 선배는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중소기업으로 옮겼다. 일하다 몸을 너무 버렸다. 월급이 줄어들었지만 그나마 살만하다"고 했다. 월급이 줄었는데도 '살만하다'고 말하는 월급쟁이.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월급쟁이의 오늘은, 그리고 내일은 너무 피곤하다. 볕들 날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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