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 책의 말미에 편집위원으로 적혀 있지만 창간호 작업에는 참여하지 못했기에 더욱 짐작이 안 갔다. 편집위원을 수락한 이유는 홍세화와 문부식이 함께 모종의 잡지를 만든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론인이나 문필가로서 더 어울릴 두 분이 작년에 진보신당(현 노동당)이 어려운 사정에서 당 활동을 떠맡은 것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특히 홍세화의 경우 진보신당의 4기 대표를 맡아 총선과 대선을 치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것으로 안다. 당 활동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떠맡아야 했던 분에 대한 죄송스러움이 없을 수 없었다.
▲ 격월간 <말과 활> 창간호(말과 활 편집부 지음, 일곱번째숲 펴냄). ⓒ일곱번째숲 |
첫인상에서 받은 거리감은 약간의 상념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좌파나 운동권이 학습이나 성찰을 게으르다고 진단한다면 거기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긴 글을 싫어하게 된 세태는 좌파들의 무능과는 별도의 사태다. 오히려 유난히 긴 노동 시간과 각박한 삶의 환경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한 사안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보고 생각을 길게 하기보다는 단답형 요약 정리 지식을 요구하도록 하는 실정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세태는 언론 환경과 담론 환경마저 규정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론 기사들이 속보 경쟁과 '낚시 제목', 그리고 자극적인 워딩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비단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가 언론 환경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네이버 뉴스캐스트에서 뉴스스탠드로의 개편에서 나온 현상이 보여주었듯, 포털 사이트가 메인 편집의 선정성을 버릴 경우엔 언론사 스스로가 그런 편집을 해야 하는 실정이다. 설문 조사 통계로 보건대 누리꾼은 속보 기사와 낚시 제목에 짜증은 내지만 그러면서도 심층 분석보다는 '떠먹여주는' 종류의 글을 원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실정에서, '긴 글'을 읽어야 한다는 요구가 당장은 대중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좌파들을 향한 것이라도 하더라도, 결국에 그것은 '긴 글'을 읽을 여력이 있거나 그래야 한단 결단을 내린 이들만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는, 어떤 종류의 나르시시즘이나 엘리트주의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좌파들의 자기반성이란 것이 역설적으로 그런 효과를 내며 대중과의 '거리감'을 강화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우려가 들었다.
그런 우려는 일종의 자기변명일 수도 있었다. 당장 나부터가 점점 긴 글에서 멀어지고 있는 듯 했고, 사람은 자신이 비난받는 것을 편하게 생각할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나 역시 '글밥'을 먹고 살게 된 이후 오히려 예전만큼 편하게 독서를 할 수 없다는 모순을 느껴야 했다. 논의를 따라가기보다는 어떠어떠한 논의가 있다는 사실 정도만 확인하기 급급했고, 해당 주제에 대한 글을 써야 할 때에만 최소한의 맥락을 확인하는 식의 발췌 읽기를 해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을 하는 책은 서평 청탁을 받은 책 밖에 없었는데 그런 경우엔 정말로 건성건성 읽고 '야마'를 잡아야 했다.
물론 내가 편하게 읽던 시기를 추억할 수 있는 건 부모 돈으로 학교를 다녔다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나마 글밥이라도 먹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읽는 것일 뿐, 대부분의 대학생들이나 생활인은 이만큼도 못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나는 누군가의 '읽지 않음'을 비판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무지와 무시가 될 가능성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에 대한 존경과는 별개로, 나는 몇 년 전부터 '무식한 대학생'을 비판하는 홍세화의 태도가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문제의 맥락과 결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새로 만드는 잡지가 그러한 태도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펼쳐본 잡지는 육중한 두께와 묵직한 필진이 주는 그런 거리감을 떨쳐낼 만한 것이었다. 잡지 맨 앞에 실린 "머리 위의 섬"이라는 노순택의 사진 에세이는, 편집진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왜 이 잡지의 제목이 '말과 활'인지를 나름대로 설명해주는 듯 했다.
그는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 위로 기어오른 '체공녀' 강주룡의 사진부터 시작해,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위로 올라간 고공 농성자의 사진을 소개한다. 광주 금난로 분수대 앞 교통 감시탑(2009년), 서울 양화대교 북단 고압 송전탑(2008년), 용산 참사가 있었던 남일당 빌딩(2009년). 평택 대추리 농성장의 지붕 위(2006년), 희망 버스를 만들어 낸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타워크레인(2011년).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옛 사옥 앞 포클레인(2010년) 등 (내가 수록된 사진들을 다 적은 것도 아니다.) '말'을 듣지 않은 세태에 어쩔 수 없이 높은 곳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는 '말'을 굳이 물질적으로 표현한다면 활에서 쏘아진 화살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말'을 전달하고 싶었던 그 대상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아득한 거리를 생각한다면, 거기에 닿아야 할 '말'도 활이지 않았을까.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닿을 수 있는 '말' 역시 활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활은 다른 무기와는 달리 단지 사람을 다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쏘는 것이 아니라 소식을 전하거나 줄을 연결하기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학자, 비평가, 활동가 등 다양한 성격의 필진들이 쓴 글들도 그러한 연상을 강화했다. 각각의 필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이나 문제의식을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투쟁하는 노동자와 투쟁하지 못하는 노동자, 노동 계급과 비계급, 노동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성소수자, 공간을 뺏기는 사람들 등 현상적이거나 추상적인 분류에서 드러나는 분열과 간극을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경험에서 나온 글들은 묵직하게 아팠고, 추상적 논의를 하는 글들도 현실의 문제를 통해 발언했다. 각 글마다 많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고 창간 취지라면 두 달 정도 씹어 먹어야 하는 책을 급하게 보느라 피곤했지만, 이 '긴 글'들은 요즘의 논의가 현실 문제에 어떻게 접합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에 유용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잡지의 장점일 것이다. 여기에 글을 쓴 필자들이 대단히 훌륭한 분들이긴 하지만, 만약 그들이 쓴 단행본을 읽는다면, 그 논의를 지탱하거나 경험을 보강하기 위한 서술이 많을 것이고, 이렇게 여러 가지 다른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는 압축적인 글들을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편집진의 역량을 증명하듯 <말과 활>에는 다양한 결을 가진 필진들이 있다. 말하자면 다양한 종류의 활들이 발사 직전에 있다.
그렇게, 이 잡지는 어떤 엄밀한 건축물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쏘아진 각각의 화살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서 있는 곳곳의 분열과 간극을 체험하고 성찰하고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지를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도 학자들의 에세이가 버거운 이들이 있다면, 활동가들의 글부터 먼저 읽고 나머지 글에 도전해보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설령 건너뛴다고 해도 먼저 읽은 것만으로 느끼는 것들이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잠시 각자의 창을 열고, <말과 활>에서 발사되는 화살을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 화살들은 어떤 종류의 상상적인 위로들과는 달리, 당신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고립을 넘어서라도 말을 걸고 싶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할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그러한 깨달음에서 자라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말과 활>이 되도록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이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