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떤 가능성들은 굳이 미래를 전제로 할 이유가 없다. 지금 당장 한반도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한다면? 실용성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이런 가정은 오히려 현재에 국한해야 실효가 더 클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SF에서 즐겨 사용하는 주제를 하나 결합해보자. 바로 인류의 지적 능력 향상이다. 고전 SF의 경우 이 문제를 이른바 '초능력'으로 풀어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를 '진화'와 연결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최소한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큰 규모의 진화는 단숨에 일어나지 않는다.) 초능력을 수단으로 채택하게 되면 거의 필연적으로 소수 vs. 다수의 대결/인권/처우의 문제가 등장한다. 진화 쪽으로 가닥을 잡아도 새 인류와 구 인류의 대조라는 문제는 짚고 넘어가게 된다.
▲ <브레인 웨이브>(폴 앤더슨 지음, 유소영 옮김, 문학수첩 펴냄). ⓒ문학수첩 |
작품 속에서 인류의 지능은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상승한다. 과학자들은 태양계가 지금까지 우주적 규모의 전자기장 속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거기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전자기장은 (아마도)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 보이며, 은하계가 회전하고 태양계가 이동하다보니 마침내 그 구역에서 벗어난 것이다.
문제의 전자기장은 뉴런 활동 등 두뇌의 기능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지구가 장의 범위 안에 처음 들어갈 당시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한 생물들은 멸종했다. 인류는 (그리고 현재 생존하고 있는 다른 동물 종들도) 그 시련을 견딜 만큼 강했다. 또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그 압력을 견뎌낸 DNA의 후손들이다. 이제 족쇄가 사라졌으니 두뇌의 능력은 비약적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이 서평을 읽는 분들 가운데 지능이 올라가면 눈에서 갑자기 광선이 뿜어져 나오고 초능력을 발휘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 세계를 설득력 있게 그린다면 그것도 재미있겠지만) 그리고 작가인 폴 앤더슨은 주제를 정공법으로 풀어나가는 정통 SF 작가군에 속한다. 이런 경향으로 지능 문제를 다루다보니, <브레인 웨이브>에는 이른바 SF적인 경이감의 요소는 부족한 편이다. 경이감이란 독자의 인식이 확장되면서 느끼는 감각인데 폴 앤더슨은 그런 요소를 배제하고 대신 지구인의 변화를 담담하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내의 사건이 미치는 파장을 고려해 볼 때, 이런 서술 방식은 폭 넓은 시각으로 침착하게 문제를 고려한다는 효과를 거두게 해준다.
<브레인 웨이브>는 두뇌가 자유를 얻은 다음 (현재의) 삶이 어떻게 바뀌고 사회는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 다른 네 명을 중심 인물로 잡는다. 지적 장애를 겪고 농장에서 잡부로 일하던 아치는 변화 후 정상인의 지적 수준에 도달하며 삶이 바뀐다. 과학자 피터는 순식간에 발전한 물리 이론을 이용해서 우주선을 제작하고 성간 여행에 나선다. 피터의 아내는 높아진 지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과거를 그리워한다. 폴 앤더슨은 이 세 사람을 대표로 삼아서 전 지구인(과 뇌가 있는 동물들)의 지능이 높아졌을 때 우리의 삶과 인간관계가 겪을 질곡을 미리 그려보고 있다.
<브레인 웨이브>를 읽고 나면 작가의 착상이 제시하는 가능성에 비해서 그 결과가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물론 일차적인 원인은 작가의 필력이나 상상력 결여에 있을 것이다. (또는 마감에 쫓겼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서평을 적는 이유는 따로 있다. 폴 앤더슨은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인물 각자가 겪는 심리적 변화와 이해관계의 충돌에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사실 작금의 사회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현재 인류는 기술 발달을 통해 많은 변화를 겪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급격히 향상되었다는 점이야말로 본질적인 변화에 속한다. (물론 일부 층에서는 이런 흐름을 막기 위해 애를 쓰겠지만) 정보의 축적과 지능은 다른 얘기이나, 적어도 우리는 이전과 다른 눈으로 사회를 조망할 기회를 얻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브레인 웨이브>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식 가치관에 매달리는 사람들과 그런 가치관에 일말의 미련도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어쩌면 이 서평을 읽는 독자도 그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일지 모른다.
물론 신/구라는 단어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가치 판단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번 향상된 지능을, 한 번 확장된 정보 전달의 통로를 경험한 뒤에 그 흐름을 막거나 되돌리려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이다. 경험과 정보는 인식과 생각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런 변화의 일선에 섰을 때 고정관념을 재정의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브레인 웨이브> 역시 작품 전체를 통해 그 점을 역설하고 있다.
<브레인 웨이브>는 경이감을 많이 포기한 대신 그처럼 생각할 기회를 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본다. 무더위가 마녀의 스프처럼 부글거리고 이해관계가 이종격투처럼 충돌하는 이 계절에, SF 한 권을 통해 잠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차분함을 얻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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