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한미 FTA에는 일방의 이익을 대놓고 옹호하는 조문이 있다. 바로 제11장 투자 챕터다. 특히 투자자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분쟁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투자자-국가 분쟁(ISD)' 해결 제도는 투자자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국제법의 이단아로 불리기까지 한다.
(ISD를 '투자자-국가 소송'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점에서 서평 대상인 책 <한미 FTA, 소송 당하는 대한민국>(김익태 지음, 꿈꾸는터 펴냄)의 제목에서 "소송"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문제가 있다. ISD는 법원의 공권적 판단을 구하는 소송이 아니라, 개인 법률가들에게 사적 판단을 구하는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한다. ISD가 중재이기 때문에 중재인을 당사자가 직접 선정하고, 중재 절차로 분쟁을 해결하겠다는 양 당사자의 사전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합의가 없으면 중재 결정에 한 쪽이 승복하지 않더라도 강제할 수 없다. 이에 비해 소송에서는 재판부를 당사자가 정할 수 없고, 피고의 동의가 없어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으며, 판결에 불만이 있어도 승복해야 한다. 판결은 공권적 판단이기 때문에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의 신분을 보장하고, 절차적 공정성을 담보하는 여러 제도들을 둔다. 그러나 ISD에서는 이런 게 없다. 이처럼 순전히 사적인 판단을 통해 국가의 공공 정책까지도 좌지우지될 수 있기 때문에, ISD로 인한 사법 주권의 훼손까지 우려하는 것이다.)
투자자는 자기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가 간접으로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기업을 대신해서도 ISD를 제기할 수 있다. 국가의 모든 조치, 심지어 입법 행위까지 문제 삼을 수 있다. 분쟁은 투자자만 제기할 수 있고 국가는 절차 진행에 반대하지도 못한다. 투자자가 분쟁을 제기하면, 국가는 일단 끌려가야 한다. 아무리 공공 정책이라고 항변해도, 중재 판정부를 구성하는 세 명의 법률가가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더구나 분쟁을 해결하는 기준도 투자 유치국의 법률이 아니라, 투자 보호를 위한 별도의 규칙을 적용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격언이 투자자에게만큼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 <한미 FTA, 소송 당하는 대한민국>(김익태 지음, 꿈꾸는터 펴냄). ⓒ꿈꾸는터 |
이미 론스타가 ISD 절차를 시작했고,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천공항 매각과 지하철 9호선 요금 인하 정책이 유력한 분쟁 후보다. 실제로 분쟁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공공 정책이 위축되는 효과는 더 무섭다. 저자가 잘 설명한 것처럼 돈 냄새를 맡은 국내 대형 로펌들은 앞으로 있을 ISD 분쟁 사건을 수임하려고 진작부터 준비를 서둘렀다. 과거에도 없었고 그래서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정부의 예측을 "초국적 자본과 그의 검투사들"은 믿지 않는 모양이다.
ISD의 본질을 알고 나면 이게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진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삼성과 애플의 특허 소송을 보면서 재미난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삼성이 미국 법원의 판결에 ISD를 제기하면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애플도 한국 법원의 판결을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로 끌고 간다면? 설마 사법부의 판결이 ISD 대상이 될까 의문을 품을 수 있겠지만, 이런 사례는 많다. 내가 아는 것만 열 건이 넘는다. 책에서는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미국을 상대로 한 최초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ISD 사건(Lowen 사건)도 미국 미시시피 주법원의 판결을 문제 삼은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캐나다 제약사 아포텍스가 미국 연방고등법원의 판결이 NAFTA를 위반했다며 분쟁을 제기했다.
알다시피 미국 법원에서 배심원은 삼성이 애플의 특허와 디자인, 상표권을 침해했다며 약 1조2000억 원의 손해 배상을 평결했다. 반면 애플은 삼성의 특허를 하나도 침해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 평결로 삼성전자는 주식이 폭락하는 손해를 보았고, 모방꾼이란 오명까지 안았다. 그런데 아홉 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불과 스물두 시간 만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삼성이 요청한 질문만 수백 개가 되고, 전문가도 하기 어려운 결정을 너무 빨리 내린 것이다.
더구나 배심원은 손해액을 잘못 계산하여 판사의 지적을 받고 여러 군데를 고쳤다. 또 배심원장이 애플 제품에 적용될 수 있는 특허를 가지고 있어서 편향된 평결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만약 이런 결정이 그대로 확정되면(법원 판결을 ISD로 끌고 가려면 판결이 확정되어야 한다), 삼성 입장에서는 배심원 평결이 외국인 투자 보호를 위한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 의무(한미 FTA 제11.5조)를 위반했다고 주장할 만하지 않을까?
통상관료들이 늘 얘기하듯 우리 기업이 외국에서 제대로 보호받으려면 ISD가 필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가상의 사례를 든 이유는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사법 주권이 ISD를 통해 무력화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ISD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를 떠나 삼성이나 애플은 한미 FTA의 투자자라는 외피를 뒤집어쓰면, 3심제를 근간으로 하는 사법 제도를 무력화할 수단을 갖게 된다.
궁금했다. FTA에 대한 찬반 입장을 얘기하지 않고 침묵하던 다수의 법률가들은 한미 FTA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미국 법에 정통한 저자는 이렇게 요약한다. 한미 FTA는 "미국식 법제의 이식과 ISD라는 신무기"라고(22쪽). ISD라는 틀로 한미 FTA를 분석한 저자는 그 동안 정부가 얘기했던 거짓말을 조목조목 폭로한다. 우리나라가 한 번도 ISD 분쟁을 당한 적이 없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저자의 지적에는 허탈감마저 느낀다.
"미국의 국내법과 미국식 분쟁 해결 모델을 수출함으로써 미국의 해외 투자와 기타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것"(118쪽)이 FTA의 목적이라는 미국 무역법의 조문만 봐도 미국의 의도는 처음부터 분명했다. 이를 두고 제도의 선진화라는 정부의 주장은 근거 없는 선동에 불과하다. 복잡한 법률 문제이긴 하지만,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의 효력을 부인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매들린 판결(Medellin vs. Texax)과 미국 이행 법을 예로 들면서 미국은 ISD를 인정하더라도 사법 주권 훼손을 막을 수 있다는 저자의 지적(183쪽 이하)은, 한미 FTA의 불평등성을 또 다른 시각에서 드러낸 예리한 분석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제기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저자는 '진실 6: 한미 FTA 서문에 숨겨진 미국의 꼼수'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한미 FTA 협정문 서문에 따르면(내용이 너무 길어 인용은 하지 않는다), 외국인 투자자는 국내 투자자보다 더 많은 권리를 부여받을 수 없으며, 이 규정은 미국에만 적용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한국 투자자는 미국에서 미국의 국내법 이상의 투자 보호를 받을 수 없지만, 미국 투자자는 한국에서 한국법 이상의 투자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만약 저자의 주장대로 한미 FTA가 해석되고 적용된다면, 이는 실로 중대한 문제다. 한국 정부가 미국과 FTA를 추진한 이유 절반 이상이 날아간다. 한국 투자자는 미국에서 미국 법에서 정한 것 이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미 FTA를 하나마나란 소리다.
그런데 협정문 서문을 저자와 같이 해석하기는 만만치 않다. 한미 FTA를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미국의 시민 단체 '퍼블릭 시티즌'의 분석을 보자("May 2007 Preamble Changes Fails to Resolve Concerns with FTA Investment Rules", 2011년 6월 14일).
미국이 체결한 FTA나 양자 간 투자 협정(BIT)에 따른 ISD 결정문 마흔다섯 건을 분석한 결과, 80퍼센트가 서문 규정을 아예 무시했거나 투자자에게 유리한 조항만 참조했다고 한다. 서문 규정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90퍼센트나 된다. 그리고 나머지 사건도 공공 정책에 유리한 서문 조항은 제대로 의무 부여를 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도 서문이 협정 의무의 본질을 변경할 수 없으며 협정 당사국에게 별도의 의무를 부과한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 펼친 바 있다.
미국의 꼼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서문의 이 조항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덧붙임
저작권 이용 허락 표시. 출처를 명시하는 한 누구든지 비영리 목적으로 이 글을 자유롭게 복제, 배포, 전송 등의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