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혁명, 쿠바의 일차 의료>(린다 화이트포드·로렌스 브랜치 지음, 최영철 외 옮김, 메이데이 펴냄) 저자는 책의 서문부터 피코 아이어의 글을 인용하면서 "쿠바의 모순이 지닌 매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들이 쿠바의 1차 의료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모순덩어리' 쿠바다.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는 많은 사람에게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의 턱밑에서 "사회주의"를 여전히 국가 운영의 원칙으로 고수하는 나라이고, 수십 년간의 경제 봉쇄 속에서 1인당 소득이 9700달러로 세계 109위에 머물러 있는 중미의 빈국이면서도 미국보다 낮은 영아 사망률(CIA의 발표를 보면, 미국은 10만 명당 6.14 쿠바는 5.72다.)을 자랑하며 한국과 비슷한 평균수명을 가진 나라([표 1] ). 또 생태 지향적인 농업을 운영하는 나라가 쿠바다.
▲ [표 1] 국가 간 기대수명 비교. ⓒ프레시안 |
이러한 미스터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놓고 저자들은 그 대답을 쿠바 혁명과 동시에 진행된 "쿠바의 1차 의료"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어로 나온 쿠바에 대한 책이나 글이 많은 부분 인상기에 머물렀다면 이 책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분량의 책 치고는 쿠바 의료에 대해 상당히 많은 자료를 근거로 나름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교과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또 순서도 상당히 교과서적이다. 쿠바의 역사와 보건의료의 역사를 설명하고(1장, 2장), 1차 의료 개념을 이야기하며(3장) 모자 보건(4장), 전염병(5장), 만성 질환(6장), 공공 보건의 의미(7장), 쿠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8장)을 다룬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쿠바에 대한 일방적 선전물이라는 염려는 안 해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쿠바 의료가 가지는 결점이나 모순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하고 또 변호한다. 예를 들어 쿠바의 HIV/AIDS 감염인이나 환자에 대한 강제 격리 조치의 문제라든가, 의약품의 부족이라든가, 동구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 시기의 어려움(쿠바에서는 이 시기를 '특별한 시기'라고 부른다고 한다)이라든가 문제를 충분히 다룬다. 매춘 문제등과 같은 쿠바의 치부도 다룬다. 또 개인의 자유 또는 사생활과 국가의 집단적 동원 간의 갈등이나 모순을 지속적으로 다룬다.
오히려 이 책은 저자들이 미국인이라는 또 플로리다를 직업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보건이나 지역 참여의 문제를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자유와 충돌하는 무엇인가로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고 정부가 개인의 건강에 간섭하는 제도는 미국에서는 매우 낯설겠지만 주치의 제도가 당연하고 무상 의료가 일상화된 유럽에서는 공공성과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충돌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할지 의문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이들에게 기본적인 교육과 건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충분한 위생 시설을 공급하는데 드는 비용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24명의 재산의 4%에 불과하다"는 글에서 그들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드러난다.
이들은 1993년 세계은행이 <세계개발보고서 : 건강에 대한 투자>를 펴낸 후 세계은행과 IMF 등은 "사회 불평등을 줄이고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관점으로부터 멀어져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값싸고 효과적인 최소한의 개입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질병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따라서 사회의 포괄적인 건강 형평성이라는 관점보다는 특정 질병에 대한 의료 서비스의 제공이라는 관점으로 변화한 것이 세계의 불평등을 증대시키고 인간의 건강을 퇴보시켰다는 지적이다.
쿠바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보건의료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저자들의 답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쿠바를 베낄 수는 없지만 훌륭한 참고서는 된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사실 소아마비, 말라리아, 뎅기열 등을 사실상 퇴치한 것은 다른 중남미 국가에 비교해 볼 때 월등한 것이며 HIV/AIDS 감염에 대한 예방은 미국보다도 낫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혁명수호위원회, 여성연맹, 전국소농연합 등의 '운동권' 이름의 단체들이 지역 주민들의 참여와 역능화(dmpowerment)라는 지점에서 다루어진다는 점이 한국의 시민사회에서는 생소할 수 있고 또 정부가 이를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생소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적극적 주민 참여를 통해 쿠바가 실제로 보건의료 분야에서 높은 '성적표'를 올린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인구의 15%나 되는 고혈압 환자를 주로 식이요법이나 운동으로 치료한다는 방침이나 암에 대해서도 예방이나 건강 증진이 기본 방침이라는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혹시 이 나라는 약도 없는 것 아닌가? <열한 번째 테제로 살아가기>(박미영·신영전·전혜진 옮김, 한울 펴냄)이라는 책의 저자로 한국에서 알려진 리처드 레빈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쿠바는 천국이 아니다.
"어디에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과에 대한 통계들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 체계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고 현재도 문제 개선을 통해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의약품 부족 같은 문제는 분명한 사실이다. 무역 봉쇄 조치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 현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필요한 의약품이 1000이라면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것은 겨우 5~600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쿠바가 의료 기술이 뒤지거나 약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쿠바는 의료 관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나라다. 아바나의 많은 병원들이 10%의 병상을 의료 관광을 위해 내놓고 이 재원으로 무상 의료를 시행한다. 또 중남미의 많은 의사들이 암 수술을 위해 환자를 쿠바로 보낸다. 쿠바의 병원(이른바 2, 3차 의료)은 상당한 의료 수준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의료 관광은 있을 수 없다. 또 모든 의약품을 자체 생산하지는 않지만 쿠바가 당뇨병 환자나 고혈압 환자를 약도 없이 운동이나 식이요법만 시키는 나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쿠바가 교조적일 정도로 예방과 건강 증진이라는 원칙적인 방침을 밀고나갈 수 있는 것은 저자들이 잘 지적하듯이 1차 의료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1차 의료를 한국에서처럼 동네의원 정도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쿠바의 의사 숫자는 1000명당 5.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2배 정도다. 그리고 더 많은 숫자의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이 주민들과 함께 산다.
의사 한 사람당 120~150가구가 맡겨지고 1층에는 병원, 2층에는 의사의 집이 있다. 오전에는 진료를 하고 오후에는 방문 진료를 한다. 필자처럼 엉터리 의사라도 한 동네에서 5년 정도만 진료를 하게 되면 단골 환자 집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떤 생활 습관이 문제인지를 알게 되기 마련인데 아예 한동네에서 살고 왕진을 이렇게 자주 간다?
고혈압, 당뇨는 물론, 암이라도 예방이나 건강 증진을 기본 방침으로 삼는 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지역 주민단체들(혹은 지역의 '완장'? 혹은 마당발들? 무어라 부르던)이 돕고 정부 지원까지 꾸준하다면 말이다. 하여튼 이러한 만성 질환 관리에서도 쿠바는 결과를 놓고 볼 때는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 평균 수명이 이를 보여준다.
물론 관료주의의 문제가 있을 것이고 개인의 자유 문제가 당연히 있다. 쿠바의 1차 의료는 많은 사람들이 한 동네에서 수십 년을 사는 쿠바의 봉쇄 경제 하에서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 책의 저자도 밝히고 있다. 폴 파머의 <권력의 병리학>(김주연·리병도 옮김, 건강과대안 기획, 후마니타스 펴냄)에서도 쿠바의 이런 문제를 다룬다. 쿠바는 HIV/에이즈 환자들을 강제 격리 조치 시켰다. 이는 당연히 상당한 비판을 불러왔다.
그러나 군사 시설에 환자들을 가두었다는 미국 측의 비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폴 파머가 밝히는데 이는 초기 몇 년간의 일이었고 (초기의 환자들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쿠바 병사들이었다는 점은 <또 하나의 혁명, 쿠바의 일차 의료> 이 책에서 밝혀진다) 1994년 이후에는 환자들이 격리된 마을에서 살지 말지를 본인이 결정하도록 했다는 것이 폴 파머가 직접 격리 마을을 찾아가 본 다음의 결론이다.
더욱이 폴 파머는 미국 측의 비판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쿠바의 '자유스러운' 격리 마을과 미국으로 피난 온 아이티 난민을 격리 조치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를 비교함으로서 그 차이점을 역겨울 정도로 생생히 드러낸다. 여기까지 오면 쿠바의 '관료주의'와 '개인의 자유의 억압'이라는 것이 어디까지가 미국과 서방 측의 악선전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 의료>(린다 화이트포드 로렌스·브랜치 지음, 최영철·김승섭·김재영·오주환 옮김, 메이데이 펴냄). ⓒ메이데이 |
다른 하나는 쿠바와 같은 모델이고 "포괄적 서비스를 특징"으로 하고 "형평성을 목표로 하고 낮은 기술에 의존하며 인적 자원을 중시하는 모델"이다. 저자들은 이 게이츠 모델이 현재 세계적이거나 지역적인 "공공보건 프로그램의 정책을 결정하거나 재원을 분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은행, 록펠러그룹, 게이츠재단 및 몇몇 제약회사들이 결정정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어떤가? 또 어떤 모델을 좇아가야 할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일 것이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시장 지향적인 의료가 횡행하는 가운데 국민건강보험이 그나마 형평성을 겨우 최소한으로 지켜주는 상황이고 이것조차 무너뜨리기 위한 여러 의료 민영화 조처가 광풍처럼 들이닥칠 태세다.
한국은 도시의 경우 연간 거주 이동이 인구의 30%에 가깝다. 한국의 의사는 1000명당 1.7명에 불과하여 OECD의 반 정도이고 쿠바에 비하면 30%도 안된다. 그리고 의대를 졸업하려면 연 1000~2000만 원의 등록금이 든다. 웬만한 집이 아니면 마이너스 통장을 가져야만 한다. 한국의 대안이 쿠바일 수 있을까? 당연히 쿠바는 우리의 대안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쉬울 것이다. 또 한국에서의 쿠바는 여러모로 북한과 겹쳐 보인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건대 한국 의료의 상황은 상상력을 가지지 않으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 한국과 같이 쿠바보다 3~4배는 잘 사는 나라가 쿠바만큼의 평등한 보건의료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쿠바보다 민주적이면서도 쿠바보다 훨씬 첨단 의료기술을 잘 활용하는 의료 체계를 우리는 가질 자격이 없는 국민일까?
왜 정부는 국립의과대학만이라도 학생들을 무상 교육을 시키고 의무적으로 공립의료기관에 배치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우리보다 국민 소득이 낮았을 때 유럽 국가들이 이루어 낸 무상 의료 체계를 우리는 아직 못 만들어 낸 것일까? 왜 모든 유럽에 있는 주치의제도가 한국에는 없는 것일까?
쿠바는 우리의 대안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쿠바의 의료 체계는 우리에게 '심지어' 쿠바처럼 가난한 나라에서조차도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면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쿠바에서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쿠바의 보건의료 체계는 우리에게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보건의료 체계와 사회 체제가 지금과 같은 모든 것이 상품이고 돈인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의료 체계는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 책이 보여주는 미덕일 것이다.
사족 : 이 책에 실린 정호현 독립영화감독의 추천 글. 쿠바에서 연애하고 결혼하여 쿠바를 삶의 터전으로 살게 된 이의 이 글은 매혹적이다. 이 글만으로라도 책값의 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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