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발언에 고무된 탓인지, <중앙일보>는 2월 28일자 사설을 통해 "북한의 핵위협을 실질적으로 억제하고 비핵화를 강제할 수단이 절실하다"며 "마침 미 당국자의 입장 표명이 있는 만큼 주한미군 핵무기 재배치를 정부가 미국에 공식 요청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나섰다. <조선일보> 역시 3월 1일자 사설에서 북한에 핵 폐기 시한을 제시하고 "시한(時限) 전에 북이 비핵화와 관련된 진전된 자세를 보인다면 그 순간 재배치 방침을 철회할 것이고, 전술핵을 재배치한 이후라도 북이 태도를 바꾼다면 언제라도 철수하면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파문이 확산되자 미국 백악관은 "전술 핵무기는 한국의 방위를 위해서는 불필요하며, 오바마 행정부는 전술 핵무기를 한국에 다시 반입할 계획 또는 의사를 갖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 역시 "미국 전술핵 재배치를 협의할 계획도, 요청할 계획도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전술핵 재배치나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장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성은 커졌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한데다가, 북한이 3차 핵실험 등 무리수를 두고 나올 경우 핵보유론은 또 다시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다. 또한 각종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의 과반수 이상은 핵무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싸우면서 닮아간다?
핵보유론 주장의 근저에는 북한이 핵을 보유한 만큼 남한도 어떠한 형태로든 핵 능력을 갖춰 '공포의 균형'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 깔려 있다. 특히 독자적인 핵무장론은 "한국도 자위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어디에서 많이 들어봤던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핵 위협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핵무장을 '자위용'이라고 주장한 것과 판박이인 것이다.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남한의 독자적 핵무장이든 미국 전술 핵무기의 재배치든 '공포의 균형론'이 담고 있는 목표는 북핵에 대한 강력한 억제 수단을 갖으면서 북한을 압박해 핵 포기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과 유대관계에 있으면서 동북아 핵 도미노를 우려하는 중국을 압박하는 효과가 클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새모어 역시 "중국은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를 막기 위해 모든 외교적 지렛대를 동원해 북한의 핵개발을 억누르려 할 것"이라며 "대북 경제 원조를 전면 중단할 수도 있다"며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그런데 이 역시 북한 논리의 판박이이다. "조선반도 비핵화"가 고(故)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북한은 자신의 핵무장을 통해 "조선반도의 전쟁을 억제하고" 미국의 적대시정책을 철회시켜 "조선반도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미국 전술핵 재배치가 북한과 중국에게 압박을 줄 수 있다는 주장 역시 "핵참화"를 운운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압박하려는 북한의 '강압 외교'와 흡사하다.
▲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1991년 9월 27일 전세계에 배치된 미군의 전술 핵무기를 모두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그에 따라 한국에 배치됐던 전술핵도 폐기됐다. 부시 대통령의 전술핵 폐기 선언을 톱기사로 보도한 <경향신문> 91년 9월 29일자 1면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화면 캡쳐 |
미국 전술핵 재배치, 역효과만 낸다
그렇다면 이러한 핵보유론은 북핵에 대한 억제력를 강화시키고 북한 및 중국에 대한 압박을 증대시켜 북핵 폐기를 유도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선 미국의 전술 핵무기 재배치 문제부터 살펴보자. 필자는 새모어의 발언과는 달리, 한국 정부가 요청하더라도 미국이 전술핵을 재배치할 가능성은 극히 낮을 뿐만 아니라, 역효과만 낼 것이라고 본다. 크게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하고 나섰는데 한국에 전술 핵무기를 재배치하는 것은 스스로 제 발등을 찍는 것과 다름없다. 새모어는 "미국의 전술핵은 (북한 비핵화라는) 목표가 달성되면 즉시 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핵무기 없는 세계'는 어느 순간에 달성되는 목표가 아니라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갈 때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이다. 그런데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는 오히려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되면 미국의 비확산 노선은 국제사회로부터 강력한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둘째는 러시아와 새로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비준한 미국은 다음 목표로 전술 핵무기 감축 협상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 전술 핵무기를 다시 갖다놓는 것은 협상하지 말자는 의미와 다름 아니다. 더구나 러시아는 전술핵 감축 협상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유럽에 배치된 미국 전술핵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 역시 유럽 일부 국가들 및 시민사회의 요구에 따라 유럽에 남아 있는 전술핵 철수를 저울질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전술 핵무기를 재배치한다면 혹을 하나 더 붙이는 꼴이 된다.
셋째는 군사적 타당성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군사기술적으로 볼 때, 미국은 굳이 한국에 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더라도 잠수함 발사 핵미사일을 통해 30분 이내에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 밖에도 다양한 전술·전략기를 통해 신속한 핵 공격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도 전술핵 남한에 배치하면 '북한을 겁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60년간 미국 핵 위협에 익숙해져 있다. 오히려 미국 전술핵의 재배치는 북한에게 "자위적 핵무장"과 "핵 억제력 강화"의 구실만 줄 공산이 크다.
넷째는 중국을 압박하는 효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미중관계와 한중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한 이유는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에게도 "대량 보복 전략"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중국은 미국이 한미동맹 및 미일동맹을 이용해 대중 봉쇄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는 강한 의구심도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전술핵 재배치가, 그것도 한국의 요구에 따라 이뤄진다면, 미중관계와 한중관계는 일대 파란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에 있는 북중간에 전략적 유착을 심화시켜 '한미동맹 대 북중동맹' 사이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 것이다.
한국의 미래가 북한의 현재일 순 없지 않은가?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론은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의 기술력과 재정 능력을 볼 때 핵무장에 성공할 잠재력은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에서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시간 내에 핵무장에 성공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우라늄 농축 시설이나 재처리 시설이 필요한데, 지금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건설한다고 해도 1∼2년은 소요되고, 또한 이들 시설에서 무기급 핵분열 물질을 추출하는 데에도 1년은 족히 걸린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최소 수준이다. 또한 핵실험과 핵무기 운반수단인 탄도미사일 개발 문제도 남게 된다. 그것이 억제용이든, 북한을 겁주기 위한 것이든, 유의미한 수준의 핵무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2차 공격(second strike) 능력을 구비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핵무기 및 미사일의 양과 질을 늘려야 하고 이 또한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반면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조건과 환경은 독자적 핵무장이 백해무익할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국이기 때문에 비밀리에 핵을 만들 수 없다. 핵을 만들기 위해서는 북한처럼 이들 조약으로부터 탈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경우 경제제재는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시도만으로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맹위를 떨치게 될 것이고, 실제 핵무장에 나설 경우 무역의존도가 80%를 넘는 한국은 쪽박 차는 신세를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국의 미래가 북한의 오늘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외교다운 외교를 해 본 적이 있는가?
미국 전술핵 재배치도 안 되고,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도 안 된다면, 대안이 뭐냐는 반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상식이 있다. 한국은 지난 60년간 세계 최강의 핵보유국인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어왔고, 최소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는 유지될 것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핵우산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제기한다. 그러나 미국 전술핵이 한국에 재배치되더라도 그것은 핵우산 정책의 일환에 불과하며, 무엇보다도 그 사용 권한은 전적으로 미국 정부에게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국 밖에 있는 미국 핵을 믿지 못한다면, 한국 안에 있는 미국 핵도 매한가지라는 의미이다.
미국이 전술핵 재배치를 비롯한 더욱 공세적인 대북 핵정책을 채택한다고 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일례로 부시 행정부는 명시적으로 북한을 선제 핵공격 대상에 올려놓았는데, 북한이 맞선 방식은 핵 포기가 아니라 핵 개발 가속화였다. 마찬가지로 미국 전술핵이 또 다시 한국 땅에 들어오는 순간, 북한은 자신의 핵보유를 더더욱 정당화하려고 할 것이다.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은 결코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핵무장은 한미동맹 파기로 이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독자적 핵무장론은 미국의 핵우산을 비롯한 안보 공약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이는 동맹 유지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인 신뢰관계가 깨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국 전술핵 재배치나 한국 핵무장 논란을 지켜보면서 떨쳐버릴 수 없는 안타까운 점이 있다. 과연 이러한 위험천만한 대안이 거론될 정도로 외교다운 외교를 한 적이 있느냐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의 핵포기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북핵 해결에 사활적인 이해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걸맞은 대담하고도 전략적인 외교가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병행해 추진키로 했던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평화포럼'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6자회담도 개점휴업 상태로 들어갔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은 그림의 떡을 보여주면서 북한에게 핵을 포기하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오늘날 6자회담 재개를 거부한 쪽도 북한이 아니라 한국과 미국이다. 그러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자기충족적 예언'에 빠져 있다.
이러한 비판이 북한을 두둔하거나 북핵을 옹호하자는 취지가 아님은 물론이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2005년 평양에 갔을 때 북측 인사에게 "소련이 핵이 부족해서 망했느냐"고 말했다가 "미제 스파이 같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필자가 쓴 <핵무기>라는 책에서는 북한을 '절대반지'를 쥐고 쇠락해가는 골롬에 비유하기도 했다. 공개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이 "조선반도 비핵화를 달성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유훈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가 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필자 역시 북한이 핵을 포기하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든 사례들이다.
결론적으로 북핵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한 외교다운 외교는 아직 없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그랜드 바겐'과 오바마 행정부의 초심인 "단호하고 직접적인 외교"가 손을 잡고 북한에게 통 큰 제안을 할 때, 기회의 문을 열릴 수 있다. 이것이 유일한 대안이고 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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